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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e0IZ5pgUl98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92)] 사람들이 세운 왕과 하나님이 세운 왕의 차이는?(삼상9:1~1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e0IZ5pgUl98

 

 

1. 들어가며

  성경에는 두 종류의 왕이 등장한다. 하나는 사람들이 세운 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세운 왕이다. 전자의 대표가 사울이며, 후자의 대표가 다윗이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단순한 인격의 차이도 아니고, 단순한 통치 능력의 차이도 아니다. 그것은 그 존재의 출발점에서부터 본질적으로 다른 차이이며, 결국 그 끝에서도 극명하게 갈리는 차이이다.

  우리는 왜 이 차이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가? 그 까닭은 신앙의 본질이 여기에 깊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함만이 아니다. 그분은 왕국을 세우러 오신 만왕의 왕이시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를 천국의 왕적 자리에 앉히시기 위해 오셨다. 천국은 평등한 단일 신분의 사회가 아니다. 왕이 있고, 장군이 있고, 백성이 있고, 종이 있는 분명한 왕국이다. 그 안에서 우리가 왕적 자리에 앉으려면 사울이 아닌 다윗과 같은 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 가운데서 다윗왕이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거의 다 알고 있었던 한 사람은 다윗이었다. 모세에게도 가르쳐 주시지 않은 깊은 비밀들이 다윗의 시편 곳곳에 흘러나온다. 천국에 가면 왕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 한 사람은 다윗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솔로몬이다. 그러나 그 두 왕복도 같지 않다. 다윗왕은 화려한 빛이 나는 왕복을 입고 다니지만, 솔로몬왕은 왕복은 입었으나 빛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천국에 한 사람의 장군이 돌아다니는데, 그가 곧 삼손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별것 아니라 여겼던 삼손이 사실 최초의 나실인이었으며, 그가 하늘에서는 장군의 자리에 있다.

  이러한 영적 실제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사람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가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이 세운 자리와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왕적 자리에 오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지도자에 그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우리 눈에 평범해 보일지라도 하늘에서 화려한 빛이 나는 왕복을 입게 되는 자가 있다. 그 결정적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래서 이 시간에는 사람들이 세운 왕과 하나님이 세운 왕의 본질적 차이가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떤 영적 도전과 적용을 주는지를 사울과 다윗의 대비를 따라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람들이 세운 왕과 하나님이 세운 왕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세운 왕과 하나님이 세운 왕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그 출발점에서부터 다르다. 사람들이 세운 왕은 백성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세워진 왕이다. 백성이 왕을 요구했고, 그 요구에 따라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한 사람을 세워 주셨다. 그것이 사울이다. 반면 하나님이 세운 왕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예정되어 이 땅에 보내진 자이다. 그것이 다윗이다. 이 차이가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보여 주는 본문이 사무엘상 12장에 있다(삼상 12:13-15).

삼상 12:13-15 이제 너희가 구한 왕 너희가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이 본문에서 사무엘은 "너희가 구한 왕, 너희가 택한 왕"이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반복한다. 곧 사울은 어디까지나 백성이 구한 왕이며 백성이 택한 왕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은 그저 그 요구를 들어주신 분일 뿐이다. 더 나아가 사무엘은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백성도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왕도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사울왕은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왕이었다.

  반면 다윗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삼상 16:1).

삼상 16: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다윗은 백성이 요구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미 보아 두신 왕이었다. 곧 다윗은 왕적 자질과 능력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자였다. 14만 4천 명 중에서도 24장로의 반열에 속한 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단지 신앙의 깊이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사역적 예정의 차이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실 때 그가 감당할 직분과 사명을 미리 정해서 보내신다. 그 사람의 그릇과 분량에 맞게 보내신다. 그런데 사울은 본래 왕으로 예정되어 보내신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백성이 강력히 요구하니, 하나님이 그 요구를 들어주시면서 한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신 것이다. 다윗은 다르다. 그는 처음부터 왕으로 보내심 받은 자였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진리에 이른다. 어떤 자리에 앉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그를 그 자리에 앉혔느냐이다. 사람이 앉힌 자리와 하나님이 앉히신 자리는 그 무게가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람이 앉힌 자리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흔들리고, 결국 그 자리에 합당한 능력이 따라오지 않으면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이 앉히신 자리는 그분이 끝까지 책임지시며, 그 자리에 합당한 은사와 달란트와 능력을 동시에 부어 주신다.

  이것이 천국에서 왕복의 빛이 다른 이유이다. 다윗왕의 왕복은 빛이 나고 솔로몬의 왕복은 빛이 나지 않는 까닭은, 다윗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서 그 본질을 지켜 냈으나, 솔로몬은 후반부에 이방 신을 섬기며 자기 자리를 떠나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국에서 어떤 빛을 발하게 될지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달려 있다.

 

3.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신 본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우리는 사울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다윗이 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삼상 9:16).

삼상 9:16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나기드)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여기에서 두 가지 핵심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첫째, 사울에게 주신 사명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둘째, 그 지도자로서의 구체적인 사명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내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블레셋이었는가? 블레셋은 단순한 이웃 적국이 아니었다. 블레셋에는 골리앗이 살고 있고, 거대한 아낙 자손이 거하고 있었다. 이 아낙 자손은 단순한 거인이 아니었다. 블레셋과 골리앗은 사탄의 나라와 큰 영인 사탄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블레셋과의 전쟁은 영토 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었다. 큰 영을 처치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 큰 영을 본격적으로 때려잡기 시작한 자가 바로 다윗이었다. 다윗은 불과 15세 어린 나이에 골리앗을 무너뜨림으로써 이 영적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이 영적 전쟁의 완성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광야의 시험을 통해 사탄과의 본격적인 영적 대결을 시작하셨고, 사역 내내 귀신들의 왕을 굴복시키셨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는 일을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사울이 받은 사명은 단지 한 나라를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큰 영, 곧 영적 세력과의 전쟁을 시작하라는 영적 사명이었다. 그런데 사울은 이 사명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블레셋과 전쟁한답시고 군사적 차원에서만 움직였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치라는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군사력을 다른 곳에 낭비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보낸 종인 다윗을 죽이려고 그 군사력을 사용했으며, 끝내 자신이 블레셋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은 진리 하나를 발견한다.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세움을 받았는가? 내가 무엇을 위해 이 시대에 보내심을 받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도 본래의 사명과 무관한 일에 시간과 힘을 쏟다가 끝나고 만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신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어떤 자에게는 영혼 구원의 사명이 주어졌고, 어떤 자에게는 영적 전쟁의 사명이 주어졌으며, 어떤 자에게는 가정을 거룩하게 세우는 사명이 주어졌다. 그 사명을 분명히 자각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자가 곧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한 가지 비극은 많은 사역자가 자기 본래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는 점이다. 큰 교회를 세우는 것, 많은 성도를 모으는 것, 인기 있는 강단에 서는 것에 매달리느라 정작 하나님이 이 시대에 자기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은 외면한다. 이것이 곧 사울의 길이며, 결국 같은 결말로 이어진다.

 

4. 하나님은 왜 사울을 '왕'이 아닌 '지도자'로만 부르셨는가?

  사울에 관한 본문을 깊이 살펴보면 매우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단 한 번도 '왕(멜레크)'이라 부르신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백성이 사울을 왕이라 불렀고, 사무엘도 어떤 맥락에서는 왕이라 칭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그를 '지도자(나기드)'로만 부르셨다.

  이 차이가 사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서 이는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멜레크(king)'는 본격적인 왕권을 의미한다. 우리가 잘 아는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에도 이 '멜레크'가 들어 있다. 반면 '나기드'는 지도자, 통치자, 우두머리를 의미한다. 영어로 본다면 'ruler' 또는 'leader'에 가깝다. 곧 본격적인 왕은 아니지만 지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사울에 대해 명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을 다시 보자.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삼상 9:16). 여기서 "지도자"가 바로 '나기드'이다.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에도 사무엘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삼상 10:1).   여기서도 '지도자', 곧 나기드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사무엘은 알고 있었다. 백성이 왕이라 부르더라도, 사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라는 사실을. 그는 본격적인 의미의 왕은 아니었던 것이다.

삼상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나기드)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반면 다윗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멜레크', 곧 왕이라 부르셨다(삼상 16:1).

삼상 16:1 ...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멜레크)을 보았느니라

  여기서 "한 왕"이라는 표현은 분명히 '멜레크'이다. 다윗은 처음부터 왕적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자, 곧 본격적인 왕으로 예정되어 보내심 받은 자였다. 이 차이가 사울과 다윗의 본질적 차이를 한마디로 정리해 준다.

  그런데 사울에 관한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배워야 한다.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자리를 허락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울은 본래 나기드로 이 땅에 보내심 받은 자였다. 그런데 백성의 요구로 그가 멜레크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본래 정해진 위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이 경우에 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백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본래 이 자리에 합당한 자가 아니었는데, 하나님이 백성의 요구를 들으셔서 나를 이 자리에까지 올려 주셨으니, 나는 어떻게든 이 자리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한 자세로 살아야 한다. 매일 더 깊이 회개하고, 매일 더 깊이 기도하고, 매일 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 그 자리를 끝까지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사울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분에 넘치는 자리를 자기 명예의 도구로 사용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자기 기념비를 세웠고(삼상 15:12), 백성의 인기를 누렸으며, 다윗이 등장하자 그를 시기 질투했다(삼상 18:7-10). 분에 넘치는 자리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그 자리를 자기를 위해 사용한 것이다. 이것이 사울이 결국 그 자리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본질적 이유이다.

  오늘 우리도 이 진리 앞에서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의 본래 그릇보다 더 큰 자리를 허락하셨다면, 나는 그 자리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 자리에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백배의 노력으로 그 자리에 합당한 자가 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신앙은 정직해야 한다.

 

5. 사울이 도덕적으로 훌륭했음에도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사울은 본래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도자로 세우셨는가? 사울이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세움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울은 사실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는 과정을 살펴보자. 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어버렸을 때,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사울은 한 사환과 함께 그것을 찾으러 떠났다. 이 첫 장면에서 우리는 이미 사울의 효심을 본다.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군말 없이 따르는 자였다. 더욱이 사울은 외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낮추어 종 노릇하는 자처럼 길을 떠났다.

  그뿐 아니다. 아무리 찾아도 나귀를 찾지 못하자 사울은 아버지를 걱정했다. "아버지께서 나귀에 대한 근심은 그만두시고 도리어 우리를 위하여 염려하실까 두려워하노라(삼상 9:5)" 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것이 곧 사울의 효심이었다. 자기보다 아버지의 마음을 더 살피는 자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의 사환이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모든 말이 다 이루어지니 그에게 가서 묻자(삼상 9:6)"고 제안했을 때, 사울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식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는 사환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것이 곧 아랫사람의 말도 귀담아 듣는 자세이다. 지도자의 자질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고도 사울은 한 가지 더 신경을 썼다. "그러나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그릇에 양식이 다 떨어졌으니(삼상 9:7)"라고 했다. 그는 어른을 찾아 뵙는 자리에 빈손으로 가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가진 것이 적었으나 무엇이라도 드리고자 하는 그 예의가 그에게 있었다.

  사울이 사무엘 앞에 처음 섰을 때 그의 겸손도 인상적이었다. 사무엘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하자, 사울은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삼상 9:21)"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나중에 백성 앞에서 왕으로 뽑힐 때에도 그는 행구 사이에 숨었다.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는 자기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사울은 거의 흠잡을 데가 없는 인물이다. 효성스럽고, 겸손하며, 책임감이 있고, 아랫사람의 말도 듣고, 예의도 알고, 자기를 낮출 줄도 안다. 이만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왜 사울은 결국 실패했는가?

  여기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영적 진리가 있다. 곧 도덕적 자질과 영적 자질은 다르다는 사실이다. 사울에게 있었던 것은 도덕적 자질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영적 자질,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사울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장면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다윗은 시편 곳곳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그러한 고백이 없다. 그는 도덕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차이가 결정적이다. 도덕적 자질만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 도덕적 훈련은 인간적 노력의 결과이지만, 영적 자질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울은 인간 사회에서 존경받을 만한 자였으나,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을 만한 자가 되지는 못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도덕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이 많다. 인격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 있지 않다면, 그들은 결국 사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는 영적 차원의 변화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 그분의 백성을 자기 양 떼처럼 여기는 마음, 그것이 곧 진정한 지도자의 본질이다.

 

6. 사울의 결정적 실수는 무엇이며 왜 그러했는가?

  사울이 왕으로 세움 받은 후 그의 영적 본질이 드러나는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 첫 번째 결정적 실수는 길갈에서의 사건이었다(삼상 13:8-9).

삼상 13:8-9 그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고, 백성은 두려움 가운데 흩어지고 있었다. 사무엘이 정한 7일이 거의 다 되었으나 사무엘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때 사울은 자기 마음대로 번제를 드렸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왕권으로 제사장권을 찬탈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분명한 영적 질서가 있었다. 왕은 군사적·정치적 일을 책임지지만, 제사를 드리는 영적 일은 제사장의 몫이었다. 두 권한이 분명히 구별되어야 했다. 그런데 사울은 이 질서를 무너뜨렸다. 자기가 직접 번제를 드렸다. 이것은 단순한 조급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영적 질서를 무시한 교만의 표현이었다. 사울이 이렇게 한 까닭이 무엇인가? 그는 자기 왕권의 유지가 영적 질서보다 더 중요했다. 백성이 흩어지면 자기 왕권이 위협받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영적 규례도 어겨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곧 사울의 영적 본질이었다.

  그의 두 번째 결정적 실수는 아말렉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하셨다. 사람과 가축을 모두 죽이라 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헤렘 전쟁, 곧 거룩한 진멸 전쟁이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뒤에서 쳤던 족속이었고, 그 영적 뿌리가 매우 악한 족속이었다. 그러므로 씨를 말려야 했다. 그런데 사울은 어떻게 했는가? 좋은 양과 소를 살려두고, 왕 아각도 살려두었다. 그러고는 사무엘에게 변명했다. "백성이 가장 좋은 양과 소를 남기고 본래 진멸할 것을 진멸하였으나 그 외의 것을 모두 진멸하였나이다." 그는 부분 순종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 부분 순종은 사실 불순종이다. 90퍼센트를 지키고 10퍼센트를 어겼다면 그것은 100퍼센트 어긴 것과 같다. 하나님의 명령은 모두 다 지켜야 의미가 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후의 결과이다. 아말렉의 씨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에 그 후손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멸절하려고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가 바로 에스더서의 하만이다. 하만은 아말렉 사람의 후손이었다. 사울이 한 번 부분 순종한 결과가 수백 년 후 이스라엘 전체의 멸절 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적 원리 하나를 발견한다. 곧 씨를 말려야 할 때 씨를 말리지 않으면 그것이 반드시 후환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씨도 마찬가지이다. 회개로 그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그것은 살아남아 우리 자손과 우리 공동체를 흔드는 재앙이 된다.

  사울의 세 번째 결정적 실수는 다윗을 향한 시기 질투였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백성의 환호를 받자 사울은 마음이 뒤틀렸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삼상 18:7)"라는 노래가 그의 마음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때부터 그는 다윗을 죽이려고 10년 세월을 보냈다.

  그렇다면 사울이 이때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 그 노래를 들었을 때, 그는 멈출 줄 알아야 했다. "주님께서 다윗을 통해 더 큰 일을 이루고자 하시는구나.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는 깨달음에 이르러야 했다. 그리고 자기 아들 요나단을 불러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요나단아, 나는 너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다윗인 것 같구나. 우리가 처음 왕으로 이 나라의 기틀을 잡은 것만으로 감사하자. 너무 슬퍼하지 마라." 그렇게 멈췄다면 사울은 비록 본격적인 왕은 아니었어도 천국의 보좌 가까운 자리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못했다. 그 시기와 질투의 영을 극복하지 못했다. 도리어 그 영에게 사로잡혀 다윗 죽이는 데 모든 군사력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정작 블레셋을 치는 본래 사명은 외면당했고, 결국 자기와 자기 세 아들이 함께 길보아 산에서 전사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자기를 왕으로 세워 주신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자기 사명조차 감당하지 못한 채 비참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7. 다윗이 하나님께 세움 받은 본질적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다윗은 사울과 무엇이 달랐기에 하나님께 그토록 사랑받는 자가 되었는가? 그 본질적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는 천국에서 왕노릇할 자가 되기 위해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셨을 때, 사무엘은 이새의 장남 엘리압을 보고 감탄했다. 엘리압은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마음속으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 앞에 있도다(삼상 16:6)"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히 그를 거부하셨다(삼상 16:7).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기에서 "중심"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레바브'이다. 이는 단순한 중심이 아니라 마음, 곧 하트(heart)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무엇을 보시는가? 그분을 향한 사랑이다. "네 마음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마 22:37)"는 그 말씀이 곧 첫째 되는 계명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첫째 엘리압부터 일곱째 아들까지 차례로 사무엘 앞을 지나갔으나 하나님은 모두 거절하셨다. 그러자 이새는 마지막으로 들에서 양 떼를 치고 있던 막내를 데려왔다. 그가 곧 다윗이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즉시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다. "이가 그(왕)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깊은 사실을 발견한다. 다윗이 들에서 양 떼를 치는 동안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보고 계셨다는 것이다. 양 떼와 함께 있던 그 외로운 들녘에서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수금을 켜며 시편을 노래하던 자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2)" 하고 노래하던 자였다. 더 나아가 다윗은 양 떼를 사랑하는 자였다.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물어 가려 하면, 그는 망설임 없이 달려가 그 짐승의 입을 찢어 양을 구해 냈다.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양 한 마리를 살리려는 그 마음이 그에게 있었다. 이것이 곧 목자의 마음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왕의 마음이다. 나중에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 앞에 섰을 때, 그가 사울에게 자신을 설명한 말이 이러하다.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 17:34-36)." 골리앗과 싸우러 나간 그 용기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양 한 마리를 살리려고 사자와 곰과 싸웠던 그 일상의 헌신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깊은 비밀이 있다. 다윗의 출생의 비밀이다(삼상 18:23).

삼상 18:23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의 귀에 전하매 다윗이 이르되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한지라

  다윗은 자기자신을 가리켜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고백했다. 이는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 그의 출생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 막내로 들에서 양을 치게 한 데에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이 본래 비천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평생 잊지 않았다. 이 출생의 비천함이 곧 그를 끝까지 겸손하게 한 보이지 않는 닻이었다.

  그렇지만 사울은 외아들로 부족함 없이 자랐다. 외모도 준수했고 가문도 평범한 가운데서도 그가 가장 잘난 자였다. 그래서 그는 권세를 받으면 자기 자랑에 빠지기 쉬웠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본래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자가 아니다"는 자기 인식이 그를 평생 지켰다. 사울에게 두 번이나 그를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다윗은 끝내 손대지 않았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내가 어찌 치리이까(삼상 24:6, 26:11)" 하는 그 경외심이 있었다. 이것이 곧 마음의 사람, 다윗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신 본질적 이유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의 마음(레바브)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 둘째, 그 마음이 양 떼, 곧 백성을 향해서도 있었다. 셋째, 그가 자기 출생의 비천함을 잊지 않고 끝까지 겸손했다. 이 세 가지가 곧 천국에서 화려한 빛이 나는 왕복을 입게 된 비결이다.

 

8. 오늘 우리는 사울과 다윗의 대비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가르침을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 사울과 다윗의 대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분과 자리가 어떤 차원의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어떤 자에게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멜레크로 정해서 보내신 자리가 있고, 어떤 자에게는 본래 분량보다 더 큰 직분이 백성의 요구로 허락된 자리가 있다. 어느 쪽이든 그 자리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본래 정해진 자리를 가진 자는 그 자리에 합당한 충성을 다해야 하고, 분에 넘치는 자리를 받은 자는 백배의 노력으로 그 자리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도덕적 차원을 넘어 영적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늘 한국 교회 안에는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사역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도덕적 자질만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 우리는 사울처럼 도덕적으로 훌륭한 자가 아니라, 다윗처럼 영적으로 진실한 자가 되어야 한다. 도덕적 성품은 사람의 칭찬을 얻지만, 영적 진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다.

  셋째, 마음(레바브)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외적인 성공이나 사역의 규모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이다. 우리 마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우리 마음이 정녕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

  넷째,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분명히 분별하고 그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사울에게 주어진 사명은 블레셋, 곧 큰 영을 처치하는 영적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명을 외면하고 다윗 죽이는 데 자기 군사력을 쏟아부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분명한 사명이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영적 전쟁이다.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영을 회개로 뽑아내고, 다른 영혼들 가운데 자리 잡은 악한 영을 영적 전쟁으로 몰아내는 일이다. 이 본질적 사명을 외면하고 부수적인 일에 매달리면 우리도 사울의 길을 가게 된다.

  다섯째, 시기와 질투를 회개해야 한다. 사울의 결정적 실패는 다윗을 향한 시기 질투에서 비롯되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는 그 한마디가 사울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박혔다. 우리 마음에도 시기와 질투가 자라기 쉽다. 다른 사람의 은사를 시기하고, 다른 사역자의 부흥을 질투하고, 자기보다 더 쓰임 받는 자를 미워한다. 이 모든 영을 회개로 뽑아내야 한다. 회개 기도문에는 시기 질투에 대한 회개가 빠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섯째, 멈출 때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사울에게는 멈출 기회가 있었다.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 "이제 내 시대는 여기까지이며, 다윗이 더 큰 일을 이루도록 길을 비켜 주는 것이 내 마지막 사명이다"라고 깨달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기 자리를 붙들고 다윗을 죽이려 했다. 우리도 그러기 쉽다. 자기 자리를 끝까지 붙들고, 더 합당한 자가 일어나도 길을 막는다. 이것이 곧 영적 노쇠의 가장 무서운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기 자리에 대해 자유로워야 한다. 하나님이 다른 자를 세우신다면 기꺼이 그 길을 비켜 줄 줄 알아야 한다.

  일곱째,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자기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시편을 지어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같은 승리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 그 두 사람의 본질을 갈랐다. 우리에게 어떤 성과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자기 명예로 가져가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돌리는가? 이 작은 선택이 우리의 영적 운명을 결정한다.

  필자도 천국에 가서 비로소 알았다.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사역적으로 예정하셔서 이 땅에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자리에 합당한 자는 아무도 없다. 다 부족한 가운데서 그 자리에 합당한 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어떤 직분이 주어졌든, 우리는 그 직분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아야 한다. 회개로 자신을 정결케 하고, 사랑으로 자신을 채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영광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9. 나오며

  지금까지 우리는 사람들이 세운 왕과 하나님이 세운 왕의 결정적 차이가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영적 도전과 적용을 주는지를 살펴보았다. 사울이 백성의 요구로 세워진 왕이었고 다윗이 하나님께 처음부터 정해진 왕이었다는 본질적 차이를 살펴보았다. 또한 하나님이 사울을 세우신 본래 목적이 블레셋, 곧 큰 영과의 영적 전쟁이었음을 살펴보았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사울을 한 번도 '멜레크'라 부르지 않으시고 '나귀드'로만 부르신 깊은 의미를 살펴보았고, 사울이 도덕적으로 훌륭했음에도 영적 차원의 부재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의 결정적 실수들, 곧 7일을 기다리지 못한 번제, 아말렉을 향한 부분 순종, 다윗을 향한 10년의 시기 질투를 살펴보았으며, 반면 다윗이 마음(레바브)과 양 떼를 사랑하는 목자의 자세와 출생의 비천함에서 비롯된 끝까지 가는 겸손으로 하나님께 세움 받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이 모든 대비에서 어떤 영적 도전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함께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과 자리의 본질을 분별해야 한다. 그 자리가 본래의 분량 안에 있는 자리인지, 아니면 분에 넘치는 자리인지를 정직하게 살펴야 한다. 어느 쪽이든 그 자리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백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도덕적 차원에 안주하지 말고 영적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신앙이 단지 사람의 존경을 얻는 도덕적 훈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 그분의 백성을 자기 양 떼처럼 사랑하는 마음,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셋째, 우리에게 주어진 본질적 사명을 분별하고 그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사울처럼 본래의 사명을 외면하고 부수적인 일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영적 전쟁이 우리의 본질적 사명임을 자각하고, 회개와 영적 전쟁의 자리에 자신을 드려야 한다. 넷째, 시기와 질투를 비롯한 모든 악한 영을 회개로 뽑아내야 한다. 사울이 자기 안의 시기 질투의 영을 다루지 못해 무너졌듯이, 우리도 우리 안의 그 영을 다루지 못하면 같은 길을 가게 된다. 회개 기도문을 가지고 매일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다섯째, 멈출 때 멈출 줄 아는 겸손과, 자기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자기 자리에 집착하지 말고, 더 합당한 자가 일어나면 기꺼이 길을 비켜 줄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성과와 승리를 자기 기념비로 세우지 말고, 시편의 노래로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여섯째, 마음(레바브)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우리의 외적인 성공보다 우리 마음의 방향이 더 중요함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들에서 홀로 양 떼를 치며 수금을 켜던 다윗처럼,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두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세우는 자리보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자리를 사모하며, 도덕적 차원을 넘어 영적 차원에서 진실한 자가 되고, 사울이 아닌 다윗의 길을 따라가서 마침내 천국에서 화려한 빛이 나는 왕복을 입고 영광스러운 보좌 가까이 거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5월 15일(금)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사울과 다윗의 비교를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왕과 사람이 세운 왕의 결정적 차이를 기독론적 관점에서 고찰합니다. 사울은 백성의 요구로 세워진 단순한 지도자(나기드)에 불과했으나 부여된 직분에 도취되어 불순종의 길을 걸은 반면, 다윗은 하나님이 중심을 보시고 처음부터 왕(멜레크)으로 예정하여 보내신 인물임을 강조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사울이 도덕적 성품은 갖추었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온전한 순종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며, 신앙인은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이 과분함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성도들이 다윗과 같은 영적 분별력과 중심을 회복하여 천국에서 왕의 자리에 앉기에 합당한 자로 준비될 것을 촉구하는 목적을 지닙니다.

 

#기독론 #하나님이세운왕 #사람이세운왕 #사울 #다윗 #정보배목사 #동탄명성교회 #설교 #성경 #신앙 #왕 #겸손 #순종 #영적분별력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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