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시아에 있던 일곱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던 사데교회, 이 교회의 별명은 살아있다고 하는 명목상의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였다. 사실 이 교회는 오직 책망만 받은 두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 대체 이 교회는 무슨 잘못을 범했길래 주님으로부터 책망만 들어야 했던 것일까? 그들은 스스로 흰 옷을 입고 있다가 자처했으나 사실은 흰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또한 그들에 대한 주님의 처방전을 보면, 과거 그들이 받았고 들었던 복음을 계속해서 기억해야 하며, 것을 확고히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는 그들의 현재의 상태를 단호하게 회개해야 한다. 한편 오늘날 신학자들 중에는 이 사데교회가 교회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시대의 교회(A.D.1517~1700)의 예표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말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는 죽어있던 교회였을까? 정말 이미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으나 그 이름이 지워질 위기에 처한 교회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가? 사데교회가 처한 현실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를 되돌아보자.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밧모섬에 있을 때 사도요한이 보았던 것(1장) 그것은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천상에 계신 예수님이었다. 둘째는 지금 있는 일들로서, 예수께서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내라는 편지의 말씀다(계2~3장). 이것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들에게 하신 칭찬과 책망, 권면과 당부의 말씀이 요한계시록 2~3장의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셋째, 장차 되어질 일들로서, 사도요한이 하늘보좌와 일곱인과 일곱나팔 그리고 일곱대접 재앙에 관하여 본 환상과 계시가 그것이다(4~22장). 이것들 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말씀은 소아시아에 써보내라고 했던 일곱교회들 가운데 다섯번째 교회에 해당하는 사데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아있다는 명목상의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사실상 죽은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죽어가는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 교회가 교회사적으로 어느 시기에 해당한 교회이며, 그 시기를 살아가는 성도가 바로 우리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에 주의하며 살아가야 하는지까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데는 어떤 도시이며,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사데교회는 사데(현재 터키의 '사르디스')라는 도시에 세워진 교회다. 그런데 이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주 특별하다. 왜냐하면 길 양쪽에 아주 많은 무덤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도시를 들어가는 사람들은 무덤들을 보고 많이 의아해 할 겋이다. 그리고 사데교회 바로 옆에는 이 도시의 수호신인 거대한 시벨레(Cybele) 여신의 신전이 떡하고 들어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교회와 이방신전이 거의 붙어있다시피 하고 있다. 지금은 흔적만 남긴 채 들풀이 순례객들을 반길 뿐이다. 옛날 이 도시는 매우 평화로운 도시였다. 왜냐하면 이 도시가 크지도 않지만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삼면의 절벽이 병풍처럼 놓여 있고 그 위에 도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도시는 이 도시가 생긴이래 단 두 번의 침략 이외에는 침략을 받아보지 못한 도시였다. 또한 이 도시는 자기를 휘감고 도는 강에서 사금을 채취할 수 있었고, 흰 양털로 옷감을 만들어 팔았기 때문에 가난같은 걱정은 하지 않고 있던 동네였다. 다시 말해, 이 도시는 경제적으로 볼 때에도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 세워진 사데교회는 다음과 같은 3가지 면에서 참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첫째, 에베소나 버가모나 두아디라 교회처럼 이단의 공격이나 유혹을 받아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유대인들이나 로마정부로부터 핍박이나 고난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이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칭찬은 하나도 없도 오직 책망이 있는 교회라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이 교회의 신앙은 거의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신앙이 견고해지고 강해지려면 유혹이나 핍박이 있는 상황이 더 낫지 아니하나 싶다. 하지만 사데교회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는 아주 평화스러운 교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 교회에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하시고 있을까? 그리고 이들이 들어야 했던 책망은 대체 무엇이었으며, 격려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기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또한 무엇이었을까?
3. 사데교회에게 주님은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셨는가?
(1절) 그리고 너는 사데들 안에 있는 교회의 사자(메시지 전달자)에게 [단번에] 편지하라(쓰라). 하나님의 일곱 영들을 가지고 있는 이 그리고 일곱 별들을 가지고 있는 이가 이것들을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행위들을 알아왔다. 네가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명성)을 가지고 있으나 [사실은] 죽어 있다는 것을.
첫째, 이 교회를 향하여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어떤 존재로서 소개하셨는지를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자신을 2가지로 소개하셨다. 첫째, 하나님의 일곱 영들을 가지신 이라고 소개하셨다(계3:1b).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로서(계4:5), 이 세상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어린양(예수님)의 일곱 눈들을 가리킨다(계5:6). 그런데 여기서 어린양의 눈들이 몇 개인지를 보라. 7개다. 그렇다면 정말 어린양의 눈들이 숫자적으로 일곱 개일까? 그것은 아니다. 만약 실제로 그렇다면 어린양은 괴물이라고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곱 눈들은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7이란 숫자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성경에서 7(4+3)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완전수를 가리킨다. 만약 하늘(천국)에서의 완전수라면 그것은 12(4*3)일 것이다. 고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들인 성령은 예수님의 눈들로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이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곱 영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께서 바로 전지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눈으로 또한 사데교회도 함께 감찰하고 계심을 말해준다. 그러니 예수님의 판단(책망)은 100% 확실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다. 한편, 하나님의 일곱영들이 곧 어린양의 일곱눈들이라는 표현은 성령이 곧 예수님의 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그렇다. 예수님의 영이 하나님의 보좌앞에 있는 일곱영들이자 성령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이 영들을 소유하고 계신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 영들이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예수님은 일곱 별들을 가지신 이로 소개되고 있다(계3:1b). 요한계시록 1장에 의하면, 일곱금촛대인 교회들 사이를 거닐고 계신 예수께서는 그의 오른 손에 일곱 별들을 쥐고 계셨다. 그런데 바로 일곱별들은 일곱교회의 사자(말씀전달자)라고 예수께서 직접 사도요한에게 알려주셨다(계1:20). 고로, 예수께서 일곱 별들을 쥐고 계시다는 것은 예수께서 비록 천상에 계시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목회자들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사데교회의 목회자는 당시 어떤 상태에 있었을까? 예수께서는 사데교회의 별이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있다고 하셨다(계3:2). 고로 만약 사데교회의 메시지 전달자가 그러한 상태로 계속 간다면 그는 틀림없이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말 안타까운 현실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계3:5).
4. 사데교회가 책망받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2절) 너는 [계속] 깨어있는 자가 되어라. 그리고 너는 막 죽으려고 하고 있었던 남은 것들을 [단번에] 강하게(굳세게) 하라. 왜냐하면 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채 있는 너의 행위들을 내가 발견한 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사데교회가 들었던 책망은 무엇이었는가?(계3:1b~2) 사데교회는 책망을 듣되 2가지로 책망을 들었다. 첫째, 사데교회는 살아있다는 명목상의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사실 죽어가고 있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계1:1b). 둘째, 하나님 앞에 그들의 행한 행위들 중에 온전한 모습들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의 죽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5. 죽어가는 사데교회에 대한 주님의 처방책은 무엇이었는가?
(3절) 그러므로 너는 어떻게 받은 채로 있으며 그리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계속] 생각해보라(기억해보라). 그리고 너는 [계속] 지키어라. 그리고 너는 [단번에] 회개하라. 그러므로 만일 네가 깨어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다다를(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느 시간에 네 위에 다다를른지(도착할른지) 네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셋째, 주님의 처방책은 무엇이었는가?(계3:3) 주님은 그것을 3가지로 말씀하셨다. 첫째로, 사데 교회가 처음에 복음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기억해보고 또한 어떻게 들었는지를 계속해서 기억해보라(곰곰히 생각해보라)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들이 받고 들었던 것을 확고하게 계속해서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로, 회개하되 단번에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지금 변질되어버린 곧 식어버리고 미지근한 상태를 회개하고, 처음에 열정적으로 복음을 들었던 것처럼 다시 열심을 내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과거에 우상숭배나 음행을 책망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제라도 책망하고 그것을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정신차리지 아니하면, 주님께서는 갑작스럽게 그곳에 가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다. 도둑같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님의 갑작스러운 재림 곧 재림의 돌발성을 가르쳐주는 경고의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환란전휴거론자, 베리칩종말론자, 세대주의자들은 예수께서 도둑처럼 오신다는 비유말씀을 도둑이 오는 것은 보물만을 훔쳐가기 위함이요, 그때는 도둑같이 오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아니다. 예수께서 직접적으로 들려주신 말씀(마24:43)이나, 사도바울(살전5:2)과 베드로(벧후3:10)가 들려주고 있는 말씀은 다 갑작스러운 주님의 재림과 그리고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있는 것이지 보물을 훔쳐가기 위해 비밀리에 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계16:15). 그렇다면 우리가 사탄의 이러한 미혹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처음 들었던 복음을 상기해보고, 그것을 견고히 붙잡고, 잘못된 행위들을 회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데교회를 살리기 위한 주님의 확실한 처방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 "깨어있으라(정신차리고 있으라)"는 말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사데라는 도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실 난공불락의 요새였다고 한다. 하지만 두 번 정복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보초를 섰던 병사가 졸다가 떨어뜨린 철모를 주으러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것을 보았던 페르시아와 헬라병사가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페르시아 병사나 헬라병사도 철모를 주우러 왔다가 올라간 사데병사를 따라서 올라가서 도시의 성문을 열어젖혀서 정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믿는 자는 언제 주님이 오실른지 알 수 없다.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그것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잘못된 삶을 날마다 회개하는 자라야 그날 도둑처럼 임하시는 주님을 만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6. 사데교회에 남아있는 소수의 흰 옷 입은 자들은 누구인가?
(4절) 그러나 너는 사데들 안에 자기들의 겉옷들을 더럽히지 아니하였던 작은 이름들(몇 명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나와 함께 흰(빛나는) [옷들] 안에서(옷들을 입고) [장차] 다닐(걷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합당하기(칭찬받을만하기) 때문이다.
넷째, 한편 이 교회에 소수라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몇몇 사람들을 위한 격려의 말씀이 있었다(계3:4). 이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 중에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더럽혀진 옷이 아니라 빛나는 옷(흰 옷)을 입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막1:15). 여기서 옷(히말티온)은 겉옷(garment)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믿는 성도들의 행실을 나타내는 말인데, 주께서는 자신의 행위를 깨끗하게 하여 빛나는 흰 옷을 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의 두루마기를 예수님의 피에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계22:14,7:14).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의 행실이 자동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럴려면 반드시 회개를 하여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피가 자신의 죄된 행위들을 깨끗하게 하여 흰 양털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7. 사데교회의 상황에서도 이기는 자들은 어떤 보상을 받는가?
(5절) 이기고 있는 자는 이와 같이 흰(빛나는) 겉옷들 안으로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의 책으로부터 [밖으로] 그의 이름을 결코 지우지(닦아내지) 아니할 것이다. 오히려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리고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다.
(6절) 귀를 가지고 있는 자는 그 영이 교회들에게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단번에] 들으라.
다섯째, 이제는 주께서 사데교회의 이기는 자들에 주신 약속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에 대한 축복을 무려 3가지나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에게 흰옷이 입혀질 것이라고 했다(계3:5a). 이것은 자신이 지은 죄를 다 용서함받아 천국에 들어가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둘째로,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계3:5b). 이것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 이미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충성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회개하는 삶을 살았기에, 죽는 순간에 그의 죄를 다 용서받고 어린양의 생명에서 그의 이름이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만약 짐승인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을 것이며, 이미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죽을 때에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것이기 때문이다(계13:8,17:8, 21:27). 그렇다면, 진짜 천국에 이러한 생명책이 있을까? 그렇다. 생명책의 존재여부는 요한계시록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구약의 모세도 알고 있었고 다윗도 알고 있었다(출32:32, 시69:28). 또한 사도바울도 알고 있었다(빌4:3). 셋째로, 이기는 자는 아버지의 앞과 거룩한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이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계3:5c). 이것은 그가 살아있을 때에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예수께서도 기억하시고 그대로 갚아주실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마10:32). 그러므로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은 예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들에게 주신 이러한 말씀들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계3:6).
8. 사데교회와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이제는 끝으로 사데교회가 교회사적으로 어떤 시기에 해당하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많은 성경주석가들은 에베소부터 라오디게아교회까지 일곱교회의 열거순서가 곧 역사 가운데 등장했던 교회들의 모습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여러모로 살펴보아도 거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에베소교회는 참된 진리를 수호하고 첫사랑이 식어진 교회로서 초기교회(A.D.65~95)를 가리키며, 서머나교회는 믿음을 지키려다가 환난과 궁핍을 받는 고난받는 로마박해시대의 교회(A.D.95~313)를 가리킨다. 한편 세번째로 버가모교회는 지도자들은 참된 진리를 수호하려 하지만, 성도들이 그만 발람의 교훈을 따라 핍박(고난)과 경제적인 궁핍을 해결하고자 우상숭배를 행하고 음행에 참여하는 로마국교시대의 교회(A.D.313~590)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네번째로, 두아디라교회는 주의 종들마저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이지만 그것을 죄가 아니라고 가르치던, 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A.D.590~1517)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교회사적으로 어떤 시기에 해당하는 것일까? 성경주석가들은 이 시기가 바로 A.D.1517~1700년까지의 종교개혁시대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시대의 교회가 복음이 최고로 회복되었던 시기였다고 가르치고 있고, 우리가 진정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맞는 주장일까? 이제와 생각해보면 종교개혁자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이 한 가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어도 결국 구원에서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바로 회개다. 예수님께서 사데교회와 다른 교회들에게 그렇게 중요하게 말씀하시고 또 강조하신 바로 그 주제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는 전능자 예수께서도 비록 사데교회가 살았다고 하는 명목상의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상태라고 진단하신 것은 종교개혁의 시대가 회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다시 살아나기는 했으나, 루터의 뒤를 이은 칼빈에 의하여 이중예정론이 교회를 지배함에 따라 교회가 다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루터가 진행했던 처음의 종교개혁은 아주 복음적이고 성경적이었다. 왜냐하면 오직 사람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종교개혁자 칼빈에 의해 다시 종교개혁은 거대한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만 것이다. 중세시대의 어거스틴의 잘못된 신학사상을 꺼내온 칼빈이, 구원론을 믿음과 회개에서 그만 믿음과 예정으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반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구원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믿음과 회개였다. 다시 말해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막1:15)"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루터도 처음에는 오직 믿음과 지속적인 회개를 통해서만이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그가 쓴 95개조의 반박문 중에는 무려 11조항이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지속적으로 회개해야 한다 고 하였다. 그렇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어받은 칼빈이 개인구원예정과 성도의 견인교리를 가지고 들어옴에 따라 교회는 다시 중세와 같이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칼빈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서가 아니라, 만세전의 성부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주님의 절대적인 작정에 의하여 받는 구원이기 때문에 바꿀 수도 없으며, 한 번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성경적인 교리였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어떤 개인을 구원으로 만세전에 예정해 놓았다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있다면 개인사역예정만 있을 뿐이다. 성경은 오직 복음을 듣고 믿어 회개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해 놓은 것만 말씀하고 있다(막1:15, 엡1:3~14). 다시 말해 성경에는 개인구원에 관한 예정이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구원예정 교리를 칼빈이 교리화시켜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든지 그 교리를 듣는 순간,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야 할 구원을 그만 따놓은 당상처럼 여겨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긴장의 끈을 무장해제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이 설령 죄를 짓고 있어도, 칼빈의 견인교리를 들은 자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기를 천국까지 데려가실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말씀이 아니다. 멀리는 어거스틴의 주장이며 가까이는 칼빈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눅15장의 회개하는 둘째 아들의 예를 살펴보라. 그가 어떻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는지 말하고 있는가?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 회개는 아버지가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코를 꿰어서 억지로 회개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의 과거의 삶을 돌아보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가 용서를 비는 것이다. 그래야 용서받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아니했다. 그러니 처음에는 예정론에 의한 구원론으로 인하여 감격해 했지만, 나중에는 구원의 감격이 다 식어버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종교개혁시대의 교회가 외부적으로는 살아있는 교회라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죽어가는 교회였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9. 나오며
그러므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된 일차적인 구원을 죽는 그 순간까지 지켜내야 한다. 어떤 핍박과 유혹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지켜내야 한다(빌2:12).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자복하면서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돌이킨 후에는 다시는 그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죄와 싸워서 이겨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혹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성도라 할지라도 죽는 순간에 그만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곧 구원은 아니다. 구원의 노정에 발을 내 딛은 것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영혼이 천국에 입성하는 그 순간까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한다. 사데교회나 혹은 실제의 종교개혁시대처럼 잘못된 전통과 교리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지 말아야 한다. 거기에 속해 있다면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야 한다. 아니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도록 날마다 더러운 자신의 더러운 행실을 예수님의 피에 씻어서 흰 옷이 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충성해야 한다. 건투를 빈다.
2018년 9월 26일(수) 1차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