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4(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왜 바울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도방법을 전환했는가?(고전2:3~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BbVvOBDcME4 [또는 https://tv.naver.com/v/36738127]
1.들어가며
한국 교회가 전도의 위기에 봉착했다. 전도가 잘 되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정의 복음화가 되지 않는다. 이는 실로 심각하다. 한국 교회의 50~60대 성도들의 자녀들과 젊은 세대들이 대부분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신앙이 가정에서 계승되지 않고 끊어지고 있는 것인가? 대체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래서 오늘은 초대 교회를 장식했던 사도 바울이 왜 고린도에 가서 전도 방법을 새롭게 바꾸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전도 방법 전환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전도가 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지를 분석해 보고, 앞으로 어떻게 전도하여야 신앙의 계승이 이어지게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지금 한국 교 회가 잃어버린 전도 방식은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 교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전도 방식을 사실상 잃어버렸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초대 교회의 전도 방식으로 전도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의 전도 방식은 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도하는 방식이었다(고전2:4).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러한 전도 방식을 채택하게 된 데에는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그것은 조금 있다가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 교회가 최근 20~30년간 채택했던 전도 방식은 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지혜로운 말로 하는 전도 방식이었다. 4영리와 같은 것을 달달달 암송하여, 복음을 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상당한 수준으로 전도의 열매를 거둘 수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전도 방식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의 자녀들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에는 부모가 가니까 따라와서 교회에 출석했지만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된 후부터는 아예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 큰 자녀를 이래라저래라 강요할 수는 없기에 언젠가 변화되어 신앙생활을 잘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지만 그것이 바람대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 마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래서 고민이 깊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초대 교회의 전도 방식을 되찾아 나부터 변화되는 수밖에 없다. 가정의 복음화는 말로 해서는 안 되고 삶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3. 왜 바울은 고린도에 갔을 때에 전도 방법을 전환하게 되었는가?
바울이 2차 전도여행(A.D.49~52)시 고린도에 가기 전까지, 그는 전도 방식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 시에 할 수 있는 전도 방식으로 전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1차 전도여행(A.D.47~49)과 2차 전도여행 초반까지 사도 바울은 주로 이방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되 주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배웠던 율법에 기록된 그리스도가 어떻게 이 땅에 오셨는지를 설명해 주면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이야말로 자기 조상들이 그토록 바라고 기다렸던 메시야라는 것을 풀어서 알려 주면 되었다. 그렇지만 문제가 없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중에 귀가 열린 사람들이야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였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두 분 하나님을 전하는 자로 판단하고는, 그가 신성모독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얼마 되지 않아서 바울은 각처의 전도지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쫓겨났고, 또한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그리고 베뢰아에서 아덴(아테네)으로 쫓겨나다시피 하여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그런데 바울이 아덴에 도착했을 때에 또 다른 상황을 맞딱뜨리게 된다. 그에게 순전히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는지를 고민한 끝에, 논리적으로 예수님을 설명해 주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저마다 우상을 두고 섬기는 것을 보고는 그러한 사실에서부터 전도를 시작하였다.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자 바울은 우주와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누군지부터 전했다. 그분이 온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신 분이라고 하면서, 그분이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들었고, 이 땅에 살게 하셨으며, 인간의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다고 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어떤 시인의 싯귀처럼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 신은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길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신은 온 천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분이 온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시고 우상숭배의 죄로부터 구원할 한 사람을 보내 주셨는데, 하나님께서도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말했다.
이것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나 정보를 모르는 이방인에게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전도 방식이었다. 그러나 반응은 싸늘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한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은 바울을 조롱하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다시 듣겠다고 했으나 전도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복음을 논리적으로 증언해 보았지만 그 결과는 싸늘했던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속소로 돌아가서는 아덴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고린도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는 이제 많이 위축되었고, 약해졌으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복음 전파에 자신감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쓰고 있으니 "내가 너희 가운데에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바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어떻게 전도해야 이방인들에게서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른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4. 바울이 깨달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나타남'의 전도 방식은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생각했다. 그 해답은 바울이 이전에 빌립보에 갔을 때에 이방인을 어떻게 전도했는지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때 바울은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본 후, 에게해를 건너 유럽 대륙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빌립보로 갔다. 처음에는 이전의 전도 방식처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자주 장사 루디아를 얻었다. 그러다가 시내를 전도하던 중에 귀신들려 점치는 여자를 만났다. 그런데 그녀가 따라다니면서 바울의 전도를 방해했다. 그러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 준다. 하지만 귀신이 떠나가자 점을 치지 못해 화가 난 그녀의 주인들이 바울을 고발해버린다. 그러자 지휘관들이 바울의 옷을 벗기고 매로 치고는 그를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그러자 바울과 실라는 깊은 감옥에 갇혀 착고가 채워진 채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한다.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다시 기회를 달라고 말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천사를 보내신다. 큰 지진이 일어났고 옥터가 흔들리면서 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들의 결박이 풀어지고 착고도 벗겨졌다. 그러자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친 줄 알고는 그만 자결하려고 한다. 죄수를 잘못 관리하면 자신이 똑같은 형벌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바울은 큰 소리로 그를 안심시키면서 말린다. 그러자 간수는 그동안 왜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어서 옥터가 흔들리게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바울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바울은 간수의 집에 들어가 그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래서 그들이 세례를 받는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이 빌립보교회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랬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앞에 이방인들이 굴복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때를 기점으로 바울은 복음 전파 방법을 대대적으로 수정한다. 그래서 이때부터 바울은 말의 지혜와 아름다움으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5. 바울이 고린도에서 적용하기 시작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전도 방법이란 어떤 것인가?
사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비로소 깨달아서 실천하게 된 전도 방법, 곧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도하는 방법은 바울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할 때 사용하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전도할 때에 어떻게 했는가?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율법 말씀만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셨고, 병든 자를 치유해 주면서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2년이 지났을 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12제자들에게 귀신 쫓는 권세와 병 고치는 능력을 주면서 그들을 세상에 전도하러 보내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유하면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에서 깨달았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전도 방법은 이미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나타남'의 전도 방식은 어떤 것인가? 첫째, 성령의 나타남을 사용하여 전도하는 것이다. 이때 사도 바울은 '성령의 나타남'이 무엇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적어 놓았다. 그것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9가지 은사를 사용하는 전도 방식이었다. 그것은 바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말함, 방언들 통역함'이었다(고전12:8~10). 그렇다. 오늘날 우리가 제대로 된 전도를 하여,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게 하려면, 우리도 성령의 은사를 받아 그것으로 전도해야 하는 것이다. 환상을 보고 불신자의 영적 상태를 파악한 뒤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 특히 질병이나 가난의 문제를 풀어 주는 방식으로 전도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능력의 나타남을 사용하여 전도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그냥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권면하지 않으셨다. 성령이 제자들 위에 내려와서 능력을 받으면, 그때에 나가서 전도하라고 하셨다(행1:8).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가? 성령이 위에 내려와서 능력을 받은 상태로 나가고 있는가? 아니다. 성경 구절을 외워서 전도하고 있다. 성령이 위에 내려오심으로 은사도 받고 능력도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으며, 병든 자도 치유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안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었던 것이 그때의 전도 방식이었다. 하지만 말로만 복음을 들어서 믿게 된 오늘날의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의 능력도 모르고, 복음의 능력도 모른다. 그러므로 믿다가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예수님을 담대하게 전해 주지도 못한다. 특히 자기 자식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 주지 못해, 자기 자식들을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면서 새로운 전도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전에는 한곳에서 채 한 달을 채우지도 못한 채 쫓겨나야 했지만,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을 유하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나타남으로 전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동한 에베소서에서는 무려 3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전도를 하게 된다. 그러자 바울의 영적 수준은 최고 수준에 오르게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신의 손을 얹기만 해도 기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울이 일하다가 땀을 닦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환자의 몸에 얹어도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갔기 때문이다(행19:11~12).
6. 어떻게 하면 나도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어떻게 하면 바울처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안에서 전도할 수 있는가? 그럴려면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나도 바울처럼 성령의 나타남 안에서 전도하는 것을 사모하는 것이다(고전12:31, 14:1, 39). 그리하여 성령의 무기를 장착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모한다'는 말은 '젤로오'라는 동사인데, 이는 '열심을 내다, 열정적이다'는 뜻이다. 더불어 '본받으려고 노력하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된 전도를 하려면 바울과 같은 방식으로 전도하는 것을 사모해야 한다. 아니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처럼 전도하는 것을 사모해야 한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사용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모하는 것이다. 둘째, 열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다(행1:12~14). 왜냐하면 그래야 능력의 천사들이 달라붙게 되고 그럴 때에 나도 능력을 장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귀신잡는 군대천사의 도움을 받아서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의 육체를 치유하는 치유천사의 도움을 받아 병을 치료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루살렘교회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얻게 된 데에는, 그들이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행1:12~14). 우리는 이 시대에 왜 다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무장해야 하는가? 그것은 불신자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들을 때려잡지 않고서는 온전한 전도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불신자들의 육체 안을 보면 얼마나 많은 귀신들이 집을 짓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밖에도 어마어마한 숫자의 귀신들이 죽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와 능력으로 장착해야 한다.
7. 나오며
사실 오늘날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그 믿음이 흐지부지 되는 것과 자기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못하는 이유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맛보지 못했던 것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자신도 그렇게 해서 간들간들하게 붙잡고 있는 신앙을 어찌 자녀들에게 담대하게 전해 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한국 교회는 지금 신앙 계승의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끝나면 더 이상 한국 교회에 부흥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태껏 우리나라 교회가 예수님과 초대 교회의 전도 방법을 사용하여 전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로만 복음을 듣고 전도받은 자들 중에, 상당수가 죽은 후에 구원을 받지도 못한 채 성밖이나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지 못한 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환난이나 핍박이 찾아오면 과연 그것을 얼마나 이겨낼 수 있을른지 의문이다. 과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신앙을 수호할 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는 능력으로 전도해야 하는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계11:5~6). 이제는 다시 초대 교회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사용하던 전도 방법을 배우고, 그래서 영적인 전도 무기들로 장착해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면서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3년 05월 14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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