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사람이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것이 사람의 영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영이 다 영적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그 영에게 생명이 공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에게 생명이 공급됨으로 영이 활동을 시작케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을 성경은 "거듭남'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을 우리 자신이 어떻게 감지하고 느끼며 또한 그분의 음성을 파악하고 따라갈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거듭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가는 것인지 그 방법을 알아야 한다. 모쪼록 이 말씀이 우리의 영적인 삶에 매우 중요한 기폭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혹은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우신 분이 있으면, 지난주의 주일낮설교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과 성령께서 내 안에 거처를 정하셨다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다면 그 사람에게 성령께서 들어오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 안에 들어오시어 거듭나게 하신다. 그 일은 사람에 따라서 약간은 다르겠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몇 개월에서 몇 년 사이에 일어날 것이다. 그럴지라고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거처를 정하시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거듭 태어났어도 여전히 육신에 팔려 육신을 따라 살고 있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육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3.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미 이루어진 사실과 앞으로 이뤄가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미 이루어진 사실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 상태로 있다는 것이다. 그때 보면 그 사람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주하고 계신다(계3:20).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누구든지 당신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계3:20). 그런데 그때 우리는 무엇을 받았는가? 두려워하는 종살이의 영을 받지 아니했다. 그때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식들이 되었다(롬8:15). 그런데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친자이시다. 그렇지만 법적으로 볼 때에는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자녀이며, 권리도 자녀로서 권세를 받는다(요1:12, 14:12). 다만 우리가 가진 믿음이 부족하여서 받은 권세를 다 사용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 앞으로 이뤄가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 로마서 8장 전반부에서는 2가지로 언급한다. 첫째,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롬8:9).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롬8:14). 그런데 성령을 모셔만 놓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어떻게 받는지를 모르므로 여전히 자기의 혼적인 지식을 사용해 신앙생활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 태어난 자는 영적으로 볼 때 "어린아기"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엄마의 뱃속에서 출생한 아이는 역시 아기이듯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태어난 자라도 역시 영적으로는 어린아기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아기는 어떤 존재인가? 스스로 자기 몸을 지킬 수도 없이 약하다. 아니 먹는 것조차도 부모가 신경써주어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영적으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우리의 영은 자라갈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게 하신 후에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록 기꺼이 우리가 그분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일이다. 하지만 성령이 들어오셨을 뿐 성령께서 자기 안에 거처를 정하지 못한 성도들이 사실 부지기수다. 또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한 채, 여전히 어린아기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성도들도 참 많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은 어린아기가 아니라고 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는 자기도 영적인 전사가 되겠노라고 말하는 사실이다. 자기의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있는 영적인 어린아기가 어떻게 영적으로 마귀들과 싸우는 영적인 전사가 될 수 있겠는가?
4. 어떻게 하면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처를 정하시게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영적으로 어린아기로 태어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할 때 성장해할 수 있는가?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어떻게 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 거처를 정하게 하실 수 있는가이며,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가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내 생각을 내 영에 두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거듭 태어는 성도라도 자신이 계속해서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영의 성장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때 자기자신의 생각을 어디에 두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을 육에 두는 자는 계속해서 육신의 일을 생각할 것이고, 자신의 생각을 영에 두는 자는 계속해서 그 영의 일을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롬8:5).
그렇다면 "생각하다(프로네오)"이라는 단어는 무슨 뜻인가? 어떻게 보면, 생각의 기능은 보통 혼의 기능 정도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생각하다"는 단어는 혼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혼이 생각하는 것은 "누스(이성)"의 사고작용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영이 생각하는 것은 "프로네마"의 사고작용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에게 "누스"는 배워서 아는 것만큼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스는 시대에 따라 가치기준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프로네마"는 영의 본래의 작용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령의 사고의 작용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고, 영의 사고의 작용을 가리킬 때도 사용도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영의 사고작용은 일정하다. 시대마다 마구 달라지는 사고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일정하며, 변함이 없다.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온 사고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영에 둔다"는 말은 사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특히 내 영이 생각하는 바로 그것에 내가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영이 "생각한다"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이 말은 사실 예수님께서 사울보다 먼저 사용하셨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 후, 주께서 죽으실 것이라고 예고하니까 베드로가 대뜸 나서서 "주여 죽지 마옵소서"라고 하고 말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16:23 [그런데] 예수께서 돌이키시며(돌이키신 후에) 베드로에게 이르시되(말씀하셨다)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 가[고 있어]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들]을 생각하지(프로네오=마음에 두지,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들]을 생각하는도다(마음에 두는도다, 관심을 기울이는도다) 하시고
그렇다. 영의 사고작용을 가리키는 "프로네오"는 거기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고 거기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에 생각을 둔다는 말은 자신의 영에게 자신의 마음을 두고 자신의 관심을 거기에 쏟는 것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빌2:5에도 나오는데,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씀에서 "마음을 품으라"는 단어가 바로 "프로네오"라는 동사다. 그러므로 내가 내 생각을 내 영에 둔다는 것은 내 생각의 사고작용을 늘 내 영에 두고 그것을 품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가리킨다.
5. 나는 내 영을 어떻게 감지하며 어떻게 내 생각을 영에게 둘 수 있는가?
성령은 사실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다.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바람"과 같기 때문이다. 성령이 존재에 대해서는 그 영의 활동과 결과를 보고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성령 그 자체를 직접 우리가 어떻게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그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셨으며(요5:26),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고전15:45). 사도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성령을 "생명의 영"(롬8:2)이라고 칭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영의 인도를 받기를 원한다면 그 영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들어와서 계시는 성령께서 내게서 마음껏 활동하실 수 있도록 생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의 3가지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첫째, 내 안에 있는 쓰레기들을 청소해야 한다. 즉 성령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더럽혀진 공간을 깨끗히 청소해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것에서 자기자신을 깨끗히 하자"고 말했던 것이다(고후7:1). 그 일은 내 안에 이미 오염되어 있는 것들 곧 죄악의 찌꺼기 등을 청소하는 것으로서 곧 회개를 가리킨다. 사실 영안을 열고 보면, 성령께서 우리 사람 속에 들어오신 후에 하시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배에서 생수를 만들어 퍼올리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장차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께서 뱃속에서 하실 일로서 소개한 바 있다(요7:37~39). 누구나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사람의 배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생수는 위로 올라가서 가슴에 있는 심령의 그릇에 채워져야 정상이다. 그러면 생명의 활동이 증가하게 되어, 기쁨과 감사와 넘쳐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에 속한 사람은 시기와 질투과 다툼의 분쟁을 함으로 인하여 길어올린 생수를 흘려버린다. 그렇다면, 시기와 질투, 다툼과 분쟁의 영은 주로 우리 몸의 어느 부분에 위치해 있는가? 그것은 사람의 배 부분이다. 옛날 어르신 말씀에 "사돈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정말 시기와 질투의 영이 배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육체에 속한 사람은 육체의 본성대로 행하다보니 이 생수가 위로 올라가지 못한다. 그러면 심령의 그릇에 생수가 말라버린다. 그러면 나오는 것이 원망과 불평이다. 원망과 불평의 영(귀신들)은 보통 심장을 감고 있다. 그러므로 시기와 질투,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사람은 성령께서 생수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보시면 된다. 그런 사람은 사실 만사를 힘들어하고 귀찮아 한다. 생수가 만들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는 빨히 회개해야 한다. 육체의 본성을 따라 행했던 것과 수많은 죄들을 통해서 자기 안에 귀신을 불러들인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둘째, 언제나 내 생각이 그 영(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이다(롬8:5~6). 이대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증상은 "생명과 평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육체에 속한 사람은 어떠한가? 그는 늘 육체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맺는 결과는 결국에 사망이다. 여기서 "사망"이란 사탄이 내 몸에서 역사한 결과를 가리키고, "생명"이란 성령께서 내 몸에서 일한 결과를 가리킨다. 그럼, 사탄이 내 몸에 일한 결과로서 사망이 내 몸을 지배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에는 육체의 무수한 열매들을 나오게 된다. 시기와 질투심, 원망과 불평, 걱정과 불안, 두려움과 의심, 탐욕과 게으름, 혈기와 분노가 육체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께 내 생각을 기울이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그러면 성령의 열매가 나오게 된다. 만족과 행복, 기쁨과 감사, 안정과 평화, 오래참음과 긍휼, 충성과 절제, 온유와 겸손이 나오기 때문이다.
셋째, 앞으로는 육신의 일들에 자기의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생각을 육신에 두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의 생각을 육신에 두면 육신의 일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역시 육신의 열매들을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육신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결과를 낳는다. 첫째,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롬8:7).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를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굴복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결국에 가서는 죽게 된다는 것이다. 고로 육신에 속한 자는 늘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고, 그 마음이 교만하며 겸손하지 않으며, 불손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우리의 생각을 육신에 두지 않기로 노력해야 한다. 육신은 사망의 열매를 맺기 때문에 육신은 쳐 복종시켜야 한다. 그것에 내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되며 그것이 올라올 때마다 우리는 그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겨야 한다.
6. 나오며
우리가 거듭난 이후 나는 과연 어디에 내 생각과 관심을 두고 살았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라.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우리의 영이 강건해져야 한다. 영적인 사람이 됨으로 충분히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이 내 안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드리고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이며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하는 일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생수를 만들어내시고 퍼올리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생명의 활동을 그분이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을 할 때에도 이 말이 과연 사람을 살리는 것인지 아닌지를 늘 생각해보아야 한다. 내가 하는 이 말과 행동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믿음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이 말과 행동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면 결단코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육신적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날마다 회개를 하여 우리의 속을 깨끗하게 청소한다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생명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요 성장하게 하는 것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의 열매들을 늘 살펴보라. 육의 열매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빨리 그것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회개를 통해 더럽혀진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을 청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각을 영에 두어야 한다. 내 영 속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자꾸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게 되면 우리는 어느 순간에 "아, 이것이 성령의 생명의 활동이구나"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성령께서는 내 배에서 생수를 더 만들어 퍼올리실 것이다. 그리고 내 심령의 그릇에 가득가득 채우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생명이 왕성한 사람이 되고 내 몸과 마음과 영은 건강해지며 더욱 더 성장라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우리 자신이 전사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1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