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가 다시 없으며(계22:1~5)_2021-06-20(주일)

by 갈렙 posted Jun 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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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저주가 다시 없으며(22:1~5)

[일시] 20210425(주일) 오전9, 11

[찬송] 25장 면류관 벗어서, 298장 속죄하신 구세주를, 269 그 참혹한 십자가에

PW: 믿음, MIW: 악한 영

T.S: 믿음이란 회개를 통하여 저주의 실체인 악한 영들을 떠나가게 하는 것이다.

 

1. 서론

1)인사

오늘도 거룩한 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예배하러 나온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계시며, 예배중에 임재하시어 복을 주십니다.

오늘은 그동안 회개를 실천하면서 꼭 한 번 나누고 싶었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저주란 무엇이며, 사람들이 받고 있는 저주의 실체가 무엇이며, 그 저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떤 단어나 주제를 가지고 우리가 말씀을 살펴볼 때에는 그 단어가 가진 역사성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처음에 그것이 어떤 개념으로 쓰였는데 어떤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지금은 이러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저주라는 단어를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히 구약시대에 저주라는 개념은 어떤 개념이었고, 신약에 들어와서 저주라는 개념은 과연 어떤 개념으로 발전되었는지를 통하여, 오늘 우리 성도들이 받는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저주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갈3:13의 말씀에 저주가 끝났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말씀에 따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엑사고라죠) 즉 값을 주고 되사셨기 때문에 이미 우리에게서 저주가 끝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2가지 측면에서 옳게 해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첫째, 다른 성경말씀의 증언과 상치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었던 요한계시록 22:3에 나와있는 말씀입니다.

22:3 다시(더이상)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요한계시록 21장에서 22장의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말씀이요 그중에서도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한 말씀인데,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더 이상 저주가 없다고 말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뒤집어보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더 이상 저주가 없다는 말은 결국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저주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저주가 끝났다는 말은 틀린 해석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실제 현실에서 저주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갈3:13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이미 저주가 끝났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되면 저주에서 다 해방된 것입니까? 질병에 걸리지 않습니까? 사건사고를 당하지 않습니까? 손대는 일마다 다 잘 됩니까? 재정이 풍성해집니까? 자녀의 앞길이 잘 열립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다 그래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불신자처럼 똑같이 숱한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우리의 모든 저주를 없애버리셔서 저주가 다 사라졌다면 우리에게는 저주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야 합니다. 복과 형통함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도 저주와 같은 여러 가지 질병들과 가난과 매임과 고통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갈3:13에 대한 말씀은 재고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3:13에서 말씀하고 있는 저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돌아 보고, 구약시대에 있어서 저주의 실체는 무엇이며, 신약시대에 있어서 저주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비교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 가운데 살면서도 저주를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문제제기

 

1)본문요약 및 의문점 제시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요한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 성을 보여주고 있는 한 천사가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더 이상 저주가 없다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천사가 말하고 있는 저주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왜 새로운 세상 곧 천국에서는 저주가 더 이상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2)청중적 접근

저주라고 말하면 그것을 좋아할 성도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주라고 말하면 괜히 불행이나 재앙이 계속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 여러분은 이 저주로부터 다 해방받으셨습니까?

 

3)본문문제배경

오늘 본문 말씀은 A.D.95~6년경 사도요한밧모섬에 귀양갔다가 거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천국을 보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일곱 천사중 하나인 한 천사가 보여준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4)문제발생원인

이때 천사는 사도요한에게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보여주었습니다. 보니 그 성의 한 가운데 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었고 그 보좌로부터 물이 흘러나와서 커다란 정금길 한 가운데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 좌우편에는 달마다 열매를 맺고 있는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가서도 천국백성들에게 생명과일은 그들에게 영생하는 양식인 것입니다. 이 땅에 에덴동산에서 있다가 사라졌던 생명나무와 생명과가 바로 천국의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있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민족들, 나라들=에쓰논=에쓰노스의 복수형, nations)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회개하고 있는 저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3절 말씀입니다.

22:3 [그 성 안에는] 다시(더이상) 저주가 없으며...

그렇습니다. 부활체가 들어가는 천국에는 더 이상 저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밤도 없고, 애통도 없고, 울부짖음도 없고 아픔도 없고, 저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5)문제 심리묘사

믿음이 있어도 천국에 더이상 저주가 없다는 것을 잘못 이해하면, 그리스도인은 예수믿을 때부터 저주로부터 해방받았다고 믿어버리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도 천국에서 비로소 저주가 없어진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이 세상에서 저주를 받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이미 저주에서 해방받았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도 천국에서 비로소 저주가 없어진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실제로는 저주를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저주에서 해방받았다는 말만 믿고 일평생 고통 가운데 살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천국에서 비로소 저주가 없어진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지금 어떻게 해야 저주로부터 해방받는지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천국에서 비로소 저주가 없어진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저주가 무엇이며 저주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공부하려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천국에서 비로소 저주가 없어진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저주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저주에서 해방받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3. 문제해결

1)인간의 헌신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저주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여, 저주의 실체를 알고 저주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의 주권(방법, 심정)

 

. 저주의 정의와 그 결과는 무엇인가?

3;13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속량받은 것이 율법의 저주였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그리고 이 말씀의 배경은 구약성경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로 우리는 구약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저주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3;13의 말씀을 헬라어원문에서 직역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13[직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가 되신 후에,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록된 채 있기 때문이다. “나무 위에 매달렸던 모든 자는 저주받은 자다

고로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율법의 저주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지를 알아야 하며, 사도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나무 위에 매달렸던 모든 자는 저주받은 자다라는 신명기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약에성경 나오는 저주라는 단어는 총 2가지입니다. 하나는 갈3:10,13에 나오는 단어로서 카타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또한 오늘 읽었던 22:3에 나오는 단어로서 카타데마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의 뜻은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저주라는 단어5가지가 있는데, “아라르, 켈랄라, 알라, 하람, 카바브가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아라르켈랄라입니다. 이 중에서 아라르는 단어는 선언으로의 저주를 가리킬 때 사용되며, 켈랄라는 재앙으로서의 저주를 말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먼저, 저주를 선언하다는 의미로서의 아라르의 용례를 살펴보겠습니다.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아라르)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9: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아라르)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2:6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아라르)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아라르) 자는 저주(아라르)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그렇습니다. 저주 중에서 아라르말을 가지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선언하는 저주를 가리킵니다. 사실 국어사전에서도 저주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는 것. 또는 그렇게 하여서 일어난 재앙이나 불행를 가리킨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저주라는 것이 을 가지고 하는 저주가 있고 재앙이나 불행을 가리키는 저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재앙이나 불행과 같은 형벌로 주어지는 저주라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켈랄라니다. 이것은 율법말씀을 지키기 아니하고 곧 우상을 숭배하거나 간음을 행하거나 했을 때에 형벌로 주어지는 저주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단어의 반대되는 단어는 이라는 단어입니다.

27:12 아버지(이삭)께서 나(야곱)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베라카)은 고사하고 저주(켈랄라)를 받을까 하나이다

11:26 내가 오늘 (베라카)과 저주(켈랄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켈랄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그렇습니다. 켈랄라는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실행하지 않은 자에게 형벌로 주어지는 재앙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3:13의 인용구에 등장하는 신명기 21:23의 말씀도 바로 재앙으로서의 저주 곧 켈랄라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켈랄라)를 받았음이니라

다시 말해, 예수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은 율법이 말씀하고 있는 저주의 댓가로서 그 형벌을 대신 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율법이 말씀하고 있는 불순종에 대한 형벌 곧 재앙을 받아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했을 때 그 저주선언으로의 저주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형벌로서의 저주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갈3:10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3:10 [왜냐하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기록된 바(채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받은)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서 저주라는 개념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선언으로서의 저주입니다. 왜냐하면 갈3:10에서 인용하고 있는 말씀은 27:26의 말씀인데, 이 말씀에서 저주라는 선언으로서의 저주를 의미하는 아라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7: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라르)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나온 원문을 따라 갈3:13의 말씀을 해석하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말은 일종의 선언같은 것이고, 뒤에 나오는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은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에 우리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입니다.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때에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말이 유행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단성 시비가 붙었고 그것을 주장하셨던 분이 공식적으로 사과함으로 그 문제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잠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정말 저주가 이미 없어진 것일까요?3:13에 의하면 예수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분명히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이제 우리의 삶에는 저주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저주가 없어지는 것입니까? 그럼,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은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해야 한다고 사도 요한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속량의 효력이 내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귀신도 나가기 때문입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고로 예수님을 믿은 자에게도 여전히 저주가 남아있는 것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들과 아기를 임신하지 못하는 불임증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혼외정사와 이혼과 별거로 인한 계속적인 가정불화가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가난과 재정적자로 시달리는 집도 있고, 갑작스런 사고사 내지는 자살자와 비명횡사자와 요절자가 있는 집안도 있습니다. 또한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자도 있으며, 여러 가지 중독증상과 가족 중에 우상숭배관련 종사자 즉 무당 박수 점쟁이가 계속 나오기도 하며, 이단에 빠진 자가 나오기도 합니다.

 

. 저주의 진짜 실체는 무엇인가?

이제는 저주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리할 차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지금도 재앙과 불행을 지속적으로 가져다주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저주란 죄는 아닙니다. 죄는 저주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빛이신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저주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람 속에 들어가 있는 영적 존재 곧 귀신들이었습니다.

8: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모든 병의 원인이 다 귀신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질병의 재앙으로 고통받는 것은 귀신이 우리 몸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에 율법에 제시된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와서 재앙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을 일종의 저주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구약시대에는 어떤 뱀도 사람 속에 들어가서 질병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시대부터 달라졌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기 직전에 하늘에서 타락한 천사들이 추방당해 이땅으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타락한 천사들인 귀신들뱀이 되어서 사람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서 질병, 빼앗김, 패망, 실패, 정신병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로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저주의 실체는, 선조들의 죄라기보다는 선조들이 지은 죄의 결과로서 침투해 들어오는 귀신들를 가리키는 것이요, 내가 회개하지 않아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귀신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죄를 지었을 때에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말씀(20:5)을 근거로 하여 우리 몸에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침투하여 저주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 천국에는 저주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는 더 이상 귀신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계속해서 저주를 일으킨다는 것은 그것이 살아있는 어떤 존재로서 계속 역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더라도 귀신이 아무 사람이나 치고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율법을 어김으로 죄를 지었을 때에 들어옵니다. 왜 굳이 사람 속에 들어오려고 합니까?(요일3:8, 3:14, 12:43~45, 벧후2:19).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아파르)을 먹을지니라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아파르)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12:43-4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 저주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주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이미 들어와 있는 저주의 실체들을 우리에게서 몰아내야 합니다. 것은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6:10)”고 하셨는데, 이는 하늘에서 귀신들이 쫓겨난 것처럼 이 땅에서도 쫓겨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귀신은 무턱대고 나가지는 않습니다. 죄가 남아있으면 합법적으로 우리 몸 안에 계속 붙어있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귀신을 내보낼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하여 회개하는 것입니다(요일1:9). 그러면 조상의 죄 때문에 우리 몸에 들어와있는 귀신일지라도 그것들은 힘을 잃고 떠나가게 됩니다. 십자가 세우기를 하면 더욱더 효과적으로 귀신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 다음에는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나와 우리의 가문을 망하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12:4의 말씀처럼, 이제는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회개할 기회가 주어질 때에 회개해야지 나중에 회개하려고 하다가는 에서처럼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12:16~17)

 

 

3)청중의 문제와 해결

 

4. 영적 법칙

믿음이란 저주의 실체인 악한 영들을 회개함으로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5. 복과 결단

1)

. 헌신자가 받는 복

그렇습니다. 천국이 그렇게 좋은 이유는 더 이상 귀신들이 천국에 못 들어오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실체와 영원한 이별하는 장소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우리가 발을 붙이고 있는 동안에는 귀신은 쉬지도 않고 우리를 죄짓게 만들고, 그런 다음에 우리 몸 속에 들어와 있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이 우리 몸 속에 들어오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도 저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내가 해결해놓지 않으면 내 아들과 손자에게로 내려간다는 사실입니다.

 

. 청중의 더 큰 복

 

2)결단

고로 3;13의 말씀은 우리가 모든 저주로부터 이미 벗어났다는 확정의 말이 아니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일종의 선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오늘 우리가 회개하고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까? 왜 회개하고 십자가 세우기를 해야 합니까? 그것은 저주의 실체인 악한 영들이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서는 결코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악한 영들이 사람 속에 들어가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저주가 반복적으로 가문에 나타나는 사례가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지은 죄 때문에, 당대에 기근전염병같은 재앙이 임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다릅니다.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귀신은 계속해서 우리의 자손에게로 내려가서 저주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주의 실체인 귀신의 공격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롭게 되고, 우리 후손도 자유롭게 하려면 날마다 죄를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결단의 필요성과 방법

 

. 결단의 축복

 

 

<하나님의 장자의 명령과 선포>

1)감사와 회개

주여, 무엇이 저주이며 무엇이 저주의 실체인지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저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일종의 선언과 같은 것이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구약시대에 저주의 개념은 말과 선언으로서의 저주와 재앙과 형벌로서의 저주였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신약시대에 저주는 귀신이 사람의 몸 속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천국에는 저주의 실체인 귀신이 단 한 놈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저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나이다. 용서해주소서.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회개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날마다 회개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철저히 회개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쉬지 않고 회개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내게서 귀신이 없어질 때까지 회개하겠습니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저주의 실체가 자기들이라는 것을 감춘 채 저주는 이미 끝났다고 하는 악한 영들은 결박을 받으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회개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이미 저주가 없어진 것이라고 속여온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날마다 회개할지어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회개할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지금까지 갈3:13의 말씀은 구약성경의 말씀을 따라 해석하지 아니함으로 왜곡되어 왔었구나.

2.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믿고 회개하는 자를 저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한 속죄사역이었구나.

3. 구약시대에 저주의 개념은 말과 선포로서의 저주와 재앙과 형벌로서의 저주가 있었구나.

4. 신약시대에 저주의 개념은 귀신들의 지속적인 공격을 가리키는 것이었구나.

5. 저주의 실체는 악한 귀신들 곧 사람의 몸 속에 들어오는 사악한 뱀이었구나.

6. 회개하는 것만이 우리에게서 귀신들을 내보낼 수 유일한 해결책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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