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세 번에 걸쳐 자유의지의 변천사를 가지고 있다. 한 번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이 가지고 있던 자유의지다. 그리고 두번째는 타락후 아담의 후손들이 가지고 자유의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갖게 되는 자유의지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두번째 인간의 자유의지는 더이상 없다고 주장했다. 오직 죄를 지을 노예의지만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였다. 인간의 전적인 무능을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타락후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 맞는 진술인가? 그렇다면 왜 성경에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과 복을 택하라", "돌이켜 회개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내게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인간이 타락하긴 타락했어도 하나님을 붙들면 살 수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는 신학자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인간이 지녔던 세 번의 자유의지의 변천사를 통해 자유의지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인류에게는 크게 세 번에 걸쳐 자유의지를 사용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상황은 약간씩은 달랐다. 그것은 타락전과 타락후 그리고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오신 후다. 그런데 타락후에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어졌고 오직 죄를 짓기만 하고 사탄마귀를 따라갈 의지만 남아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A.D.1483~1546)"다. 그는 타락후 인간에게는 본질적인 자유의는 없어졌고 오직 죄를 짓고 살 수 있는 노예의지만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정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무능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의 사용에 관한 말씀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란 대체 어떤 것이며, 그때에 무엇을 선택해야 올바른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타락 전 아담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타락전 아담에게는 원초적인 자유의지가 있었다. 창조직후 그에게는 내부나 어떤 외부의 어떤 영향없이 오직 자기의 앞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산에 있는 모든 종류의 실과는 따먹을 수 있으나,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창2:16~17a)" 그런데 그때에 이미 범죄하여 선과 악을 알게 된 사탄마귀가 그에게 접근해왔다. 그는 이미 악을 선택한 상상태였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탄마귀를 일컬어 "악한 자"라고 표현한다(요일3:12). 이미 그는 자신이 가진 지유의지로서 악을 선택해버린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도록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하와를 속였다. 결국 그녀는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고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게도 주었다. 결국 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말았다. 그들은 스스로가 가진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악을 선택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곧 악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경고처럼 그들에게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이 찾아오게 되었다(창2:17b).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내부나 외부의 어떤 간섭없이 스스로 선악과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받아야 할 죄값 곧 죽음을 하나님께서 대신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아담은 자신은 자기의 범죄로 마땅히 죽임당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어 자신을 살려주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타락후 그는 자신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생명)"이라고 불렀다(창3:20). 그리고 양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입혀주신 하나님을 통하여 속죄의 제사법을 배웠다. 결국 살려주시려는 하나님을 선택한 아담은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갔기에 메시야의 조상 족보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3. 타락 후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아담의 타락후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루터는 인간에게 더이상 자유의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지만, 결론적으로 볼 때,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타락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살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생명과 복을 선택하고, 자신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의지하면 살 수 있기 때문이다(신30:19~20). 그렇다. 인간은 구원해주시려는 하나님을 붙들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정도의 자유의지는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의 주장은 옳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루터는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죄를 지을 노예의지만 남아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니다. 구원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시지만 그렇게 준비해두신 구원을 취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우리의 권한에 맡겨두셨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자유의지는 남겨두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자신을 구원해주시려는 하나님을 붙잡을 때에 구원받을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신다(딤전2:4). 그러나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는 것이다.
4. 종교개혁자들은 자유의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한편, 루터의 개혁신학을 이어받은 존 칼빈(A.D.1509~1564)과 그의 제자 데오도르 베자(A.D.1519~1605)는 루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 자유의지마저도 타락후 인간에게는 결코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전과정을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할 일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옳은 것인가? 아니다. 구원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주신다는 것을 맞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붙들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맡겨두셨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자유의지는 우리 인간에게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후 인간에게도 구원을 위한 선택지가 남아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받지 못한 것은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5.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자유의지는 어떻게 되었으며 또한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가?
그러나 자유의지는 마지막으로 한 단계가 더 있다. 그것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자유의지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 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진실로 믿음을 가진 자라면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듭남이 발생할 것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에(정확히는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을 중생하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그에게 분배되어 그도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이 거듭나면 타락후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던 자유의지가 더 회복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보다도 우리 안에 새로이 들어오신 성령의 욕구가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갈5:16~17).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게 되면 그분의 피가 우리의 죄들을 깨끗히 씻어줌으로 우리의 영은 더 성결해진다. 그러니 훨씬 더 죄에 대해 민감해진다. 양심이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금방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죄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게 된다.
그렇다면 거듭난 후에는 우리의 선택은 필요없게 되는가? 아니다. 그후에도 또 다시 우리에게는 선과 악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또 서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과연 나는 주일에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릴 것인가 아니면 친구의 결혼식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이다. 거듭난 후라도 자동적으로 어떤 것이 선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록 거듭나서 영생을 얻은 후라 하더라도, 그래서 자유의지가 더 회복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그에게는 선택지가 또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의 음성을 따라 순종하게 된다면 그는 더 깨끗한 양심에 따라 선(정확히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택하게 된다. 그럴수록 그는 죄를 덜 짓게 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얻게 될 영원하고 가치있는 것을 더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에게는 또 하나의 선택의 결정사항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이때에도 여전히 자유의지가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에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육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가진 자가 되었다. 그러기에 주일에 한 번 정도는 빠질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은 주일에 생명과 복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망과 저주를 선택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6. 인간에게 주어지거나 남겨지거나 회복된 자유의지는 어디에 사용하라는 자유의지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의지에 관하여 여기서 꼭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어느정도 있으며 남아 있고 회복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더불어 사람이 비록 타락하거나 성령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선택지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타락전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악과는 그냥 내버려두어야 했다. 마귀가 어떻게 꾀어도 그것을 물리쳤어야 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탄마귀의 말에 순종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악을 선택하는 데 사용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망을 선택한 것이며, 저주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 때문에 인류에게 사망과 저주가 들어온 것이다(롬5:12).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고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그것을 악을 선택하라는 자유의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담 자신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앞에 선악과를 두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악을 선택하라고 두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이 사망을 선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 조치가 바로 "선악과 만큼은 따먹지 말라"는 비상조치였던 것이다(창2:17).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구약시대로 치자면 꼭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이 명령이라도 주지 않았다면, 인간이 악을 선택하여 사망과 저주를 불러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탄마귀의 말에 속아넘아가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그것은 곧 인간 스스로 사망과 저주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후 인류에게서 있어서도 여전히 동일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직후 인간이 멸망받을 것을 아시고 인간을 살리기 위해 다른 길을 제시해주셨다. 그것은 대속제물을 희생시킴으로 말미암아, 죽어마땅할 인간들을 살리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그래서 구약족장들이나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장차 대속제물로 어떤 존재를 보내줄 것인가를 계속 말씀해주셨다. 그것이 바로 메시야에 관한 350가지 이상 등장하는 구약예언들이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그 약속을 따라 메시야가 왔고 인류의 죄를 넘겨받아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 그러나 정작 아들 자신에게는 죄가 없었기에 약속대로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40일동안 자신의 부활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승천하셨다. 그리고 10일 뒤에 약속하신 성령을 믿는 자들에게 보내주셨다. 보혜사 성령께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오신 것이고, 믿는 자들 마음 속에 들어가셨다. 하지만 이처럼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았어도 여전히 인간은 또한 선을 택할 것인가 악을 선택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음으로 더 깨끗하여진 자유의지이지만 또한 그러한 자유의지를 어디에 쓸 것인가를 정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믿는 자는 세상의 쾌락과 안락을 위해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의지의 바른 사용이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회복시켜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깨끗해진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영원하고 가치 있고 의미 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취하라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죄를 지으라고 자유의지로 회복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로 회복시켜주신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 인류에게 있어서 자유의지의 사용은 딱 세 차례 있었던 것이다. 타락 전의 아담에게, 타락 후 인류에게,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성령을 받은 성도들에게, 자유의지는 지금도 기로에 서 있어서 우리의 자유의지의 사용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믿는 이들은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아담의 타락후에는 인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자.
겔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신30:19-20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승천후 성령을 받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자.
갈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중생한 자는 늘 성령을 따라 걸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힘쓰지 아니하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갈 확률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더욱 더 열심히 자신의 육체를 쳐 복종시키기를 힘써야 한다(고전9:27). 그리고 게으름과 나태와 음란함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더욱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롬12:11). 이는 주 안에서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아니한다는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고전15:58). 더욱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죽은 후에 그 선택의 결과를 자신이 도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늘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사망과 저주를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생명과 복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살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미래를 위하여 사망과 저주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오직 생명과 복을 선택해야 한다. 마귀의 말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죄된 본성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선택해야 한다. 주일에 놀러가는 것을 선택하지 말고,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가운데 만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결코 거져주어지지는 아니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그것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미래는 더 밝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죄를 회개하면 회개할소록 우리 믿는 이들은 훨씬 더 생명과 구원과 하나님과 영원한 것을 선택해나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천국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4월 27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