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0)]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6) 그는 메시야에 대한 최고의 예언자였다(03)(시22:1~2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MpzXbxrIduQ
1. 들어가며
다윗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스라엘의 왕이자 시편 기자인 그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분량으로 소개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다윗을 이해할 때 사무엘상하만을 참고하는 경향이 있다. 사무엘상 16장부터 시작되는 다윗의 생애는 사무엘하 마지막 24장까지 이어지며,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방대한 분량이다. 그러나 다윗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역대상도 함께 보아야 하고, 무엇보다 시편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사무엘상하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다윗의 내면, 그의 처절한 부르짖음과 저주의 기도가 시편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시편은 과연 어떤 책인가? 시편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노래한 시가(詩歌)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예언의 말씀인가? 많은 성도들이 시편을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서와 함께 시가서(詩歌書)로 분류하여 개인의 감정과 지혜를 노래한 문학 작품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편을 포함한 구약 성경 전체가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말씀이라고 직접 선언하셨다. 이 선언은 우리가 시편을 읽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시편은 단순한 노래책이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예언서이며, 다윗은 인류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장 많은 예언을 남긴 최고의 예언자였다.
그러나 시편에는 아름다운 찬양과 감사의 노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수를 향한 처절한 저주의 기도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다윗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혓바닥을 잘라 달라고, 음부에 산 채로 내려가게 해 달라고, 생명책에서 지워 달라고 하나님께 아뢰었다. 이 기도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신약의 관점에서 이것은 죄인가, 아니면 허용된 기도인가? 그리고 이 저주의 기도들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우리는 다윗처럼 기도해도 되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도해야 하는가?
그래서 이 시간에는 다윗의 저주 기도가 왜 하나님의 심판 권한을 월권한 죄인지,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하는 도구로 쓰였는지, 그리고 신약의 성도로서 우리는 원수와 악인을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다윗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왜 성경 전체를 함께 읽어야 하는가?
다윗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를 함께 읽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히 더 많은 성경을 읽으라는 권면이 아니라, 특정 인물을 이해할 때 그에 관한 모든 성경의 증언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윗의 생애를 기록한 성경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사무엘상 16장부터 사무엘하 마지막 24장까지이다. 여기에는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왕으로서의 통치와 그의 실수들이 기록되어 있다. 둘째는 역대상이다. 역대상은 사무엘상하가 전하지 않는 부분, 특히 성전 준비와 레위인 조직,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예배자로서의 면모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대상 15:16). 셋째는 시편이다. 시편에는 사무엘상하나 역대상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다윗의 내면이 담겨 있다.
대상 15:16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의 형제 노래하는 자들을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금 등의 악기를 울려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하매
이것은 복음서를 읽는 방식과도 같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만을 읽는다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을 통해서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로 시작하며 (요 1:1),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복음서이다. 사복음서가 각각 예수님의 다른 측면을 조명하듯이, 사무엘상하와 역대상과 시편은 각각 다윗의 다른 측면을 조명한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사무엘상하는 다윗의 외적 행적을 보여 주고, 역대상은 예배자로서의 다윗을 보여 주며, 시편은 다윗의 영적 내면과 하나님 앞에서의 처절한 부르짖음을 보여 준다. 특히 시편을 봐야 하는 이유는 사무엘상하를 아무리 읽어도 발견할 수 없는 내용들이 시편에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윗이 아히멜렉의 제사장들을 죽인 에돔 사람 도엑을 저주하는 기도, 압살롬의 반역 당시 배신자 아히도벨을 향한 저주의 기도 등은 사무엘서에서는 일절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시편에서만 나타난다.
또한 역대하는 열왕기상하가 기록한 남북 왕조의 역사 가운데 북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를 걷어내고, 남유다 왕들의 이야기만을 중심으로 기록한 책이다. 역대하는 솔로몬부터 시작하며, 그 전에 기록인 역대상에는 조상들의 이야기부터 다윗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처럼 성경은 같은 시대와 인물을 각기 다른 관점과 목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 모든 기록을 함께 읽어야만 비로소 온전한 그림이 그려진다.
또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지 않고서는 성경 전체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 어린양, 나팔, 인(印) 등의 상징들은 모두 구약 성경, 특히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요엘 같은 묵시 문학과 창세기의 유월절 어린양에 이르기까지 구약 전체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예언된 모든 묵시 문학의 종합이 요한계시록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선언하시는데 (계 1:17), 이것은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 예수님이 곧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이다(사 41:4, 44:6, 48:12).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분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책이다. 다윗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무엘상하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역대상과 시편을 함께 볼 때 비로소 다윗이 어떤 인물이었는지가 온전히 드러난다.
계 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3. 예수님은 시편이 자신에 대한 예언임을 어떻게 직접 증언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는 말씀이라고 직접 선언하셨다. 이 선언은 단지 이사야서나 미가서 같은 예언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먼저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여기서 말씀하시는 '성경'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구약 성경이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 전체가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정작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론적 관점, 곧 '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라는 눈으로 읽어야 비로소 성경의 깊이를 볼 수 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리고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 예수님은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4).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구약 성경의 세 구분, 즉 모세의 율법(창세기에서 신명기), 선지자의 글(역사서와 예언서), 그리고 시편(성문서)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시며 이 모든 기록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선언하셨다.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 말씀의 의미는 매우 크다. 시편은 예수님이 직접 지목하신 예언서이다. 시편은 인간의 감상을 기록한 노래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메시아 예언서인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구약 성경의 사건들이 모형론적(模型論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을 가르쳤다. 모형론이란 구약의 인물, 사건, 제도들이 신약에서 성취될 실체의 그림자요 예표라는 해석 방법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다윗의 생애 전체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예표하는 그림자이며,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한 내용들은 장차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과 영광을 예언하는 말씀이다. 실제로 시편에는 어떤 예언서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많다. 이사야서가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예언했다면, 시편은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메시아의 고난과 왕권을 예언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을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메시아에 대한 최고의 예언자로 볼 수 있는 근거이다. 다윗은 영분별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 있어서 최고봉에 있었으며,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시편을 통해 수천 년 후에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생하게 예언하였다. 또한 다윗은 신구약 성경에서 이기는 자의 최고봉이다.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가 왕과 제사장이 될 것을 약속하는데, 다윗이 바로 그 왕과 제사장 직분의 최고의 예표이다. 그러므로 다윗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요, 시편을 올바로 읽는 것은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다.
4. 저주의 시편(35·55·69·109편)에는 어떤 저주의 내용이 담겨 있는가?
시편 가운데는 원수에 대한 저주를 담은 시편들이 있다. 학자들은 이를 '저주 시편' 혹은 '탄식 시편'이라고 부른다. 저주의 시편들은 모두 비탄 시편에 속하며, 비탄 가운데서 원수를 향한 저주가 특히 강하게 나타나는 것들을 따로 저주 시편으로 분류한다. 대표적인 것이 시편 35편, 55편, 69편, 109편이다. 이 시편들에는 다윗이 자신을 핍박하는 원수들을 향하여 얼마나 처절하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저주를 구하였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장 완화된 형태의 저주는 시편 35편에서 나타난다. 시편 35편은 십황무지 사람들이 자신을 고해바친 것을 배경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 35:19). 이 구절만 보면 비교적 온건한 기도처럼 보인다. 다른 저주 시편들과 비교했을 때 시편 35편의 저주는 가장 약한 수준에 속한다.
시 35:19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55편은 다윗의 중기, 곧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나던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삼하 15장).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편에 서서 다윗을 죽이려는 모략을 꾸밀 때 다윗이 드린 기도이다. 여기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내가 성 안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 (시 55:9). 그리고 15절에서는 한층 더 강렬한 저주가 나온다.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시 55:15). 이것은 민수기 16장에서 고라와 그의 무리가 땅이 갈라지며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간 사건을 연상시키는 저주이다.
시 55:9 내가 성 안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
시 55:15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시편 69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던 초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다윗은 더욱 무서운 저주를 드린다.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시고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시 69:25-28). 이 기도는 단순히 원수를 물리쳐 달라는 수준을 넘어서, 원수들이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도록, 즉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져 구원받지 못하도록 구하는 기도이다.
시 69:25-28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시고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 시편 109편은 다윗이 도피 초기에, 에돔 사람 도엑이 다윗을 고해바쳐 아히멜렉을 포함한 놉의 제사장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편에서 다윗의 저주는 극에 달한다.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시 109:8-10). 단순히 원수를 죽여 달라는 기도를 넘어서, 그 원수의 자녀까지 고아가 되어 길거리에서 빌어먹게 해 달라는 것이다.
시 109:8-10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사무엘상하를 아무리 정독해도 다윗이 이런 저주의 기도를 드렸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시편에만 나온다. 이것이 다윗을 이해하는 데 있어 시편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 저주의 기도들이 단순한 인간의 분노 표현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지를 이제 살펴보아야 한다.
5. 다윗의 저주 기도는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심판 권한을 월권한 죄인가?
다윗의 저주 기도는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다윗은 사실 아무런 죄 없이 까닭 없이 핍박을 받았다. 그가 자신을 보호해 주어야 할 사울 왕으로부터 쫓기고, 신뢰하던 측근이 배신하고, 죄 없는 제사장들이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더욱이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 소외당하고, 형제들로부터 무시를 받으며 자랐다. 이새가 사무엘에게 아들들을 소개할 때 다윗을 아예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윗이 가정 안에서 얼마나 소외된 존재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삼상 16:11). 이렇듯 다윗이 태어날 때부터 받았던 깊은 상처들은 겹겹히 쌓여 어느 순간 처절한 저주의 기도로 분출되어 나온 것이다.
삼상 16:11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기도의 내용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첫 번째 단계는 "내가 억울합니다. 하나님 나를 건져 주소서"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들을 벌하여 주시고 심판하여 주시어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지 못하게 해 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허용 범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혓바닥을 잘라 버리소서",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소서",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소서", "그 자녀들이 고아가 되고 빌어먹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렸다.
이러한 다윗의 저주의 기도는 왜 죄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심판의 권한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생명책에서 지워질지 그대로 기록될지, 어떤 사람이 성 밖으로 쫓겨날지 불못에 던져질지는 오직 심판자이신 예수님만이 결정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말씀하셨으며 (요 5:22), 요한계시록 21장 8절은 불못에 던져질 자들의 명단을 기록한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이렇게 어떤 사람이 성밖으로 가야하는지 불못에 던져져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계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런데 다윗은 그 권한을 자신이 대신 행사하려고 하나님께 주문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재판권을 월권(越權)한 것이다.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을 인간이 지정하여 하나님께 요청한 것, 그것 자체가 죄이다. 벌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이 결정할 일이지만, 어떤 종류의 벌을 내릴지, 생명책에서 지울지 남겨 둘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지, 인간이 하나님께 주문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더 나아가 신약의 빛 아래서 보면, 이러한 기도는 더욱 용납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3-44절에서 이렇게 명령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3-44). 이것은 헬라어 원문에서 명령법 현재 시제로 기록된 말씀이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원수를 사랑하고 계속해서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뜻이다.
마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원수를 미워하고 저주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신약의 기준이다. 다윗의 저주 기도는 구약 시대에 상처받은 한 인간의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옳은 기도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 권한을 월권한 죄이며, 악한 영에 의해 충동되어 드린 기도였다. 오늘날에도 고통당하는 성도들에게 "힘들면 그를 저주하는 기도를 해도 된다"고 가르치는 목회자들이 있지만, 이는 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잘못된 가르침이다.
6. 시편 22편의 비탄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예언하는가?
시편 22편은 비탄 시편의 정점이다. 저주의 시편들은 모두 비탄 시편에 속하며, 비탄 시편 가운데서 저주가 극도로 강화된 것이 앞서 살펴본 저주 시편들이다. 그런데 시편 22편을 읽어 보면, 다윗이 묘사하는 비탄의 내용이 단지 자신의 처지를 과장한 시적 표현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너무나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시편 22편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2:1). 이 부르짖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친히 외치신 말씀이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6). 다윗이 자신의 고통을 표현한 이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입술에서 그대로 울려 퍼진 것이다.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시편 22편 15절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시 22:15). 다윗이 실제로 혀가 입천장에 붙을 만큼 목이 말랐던 경험이 구체적으로 사무엘서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부르짖으셨고 (요 19:28), 실제로 극심한 목마름 가운데서 죽어 가셨다. 시편 22편의 이 표현은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것이었다.
시 22: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편 22편 18절이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위하여 제비를 뽑나이다" (시 22:18). 다윗의 생애에서 원수들이 그의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은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극한 고통을 시적으로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이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 19:23-24).
시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위하여 제비를 뽑나이다
요 19:23-24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또한 시편 22편 16절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 22:16). 다윗의 생애에서 누군가가 실제로 다윗의 수족을 찌른 적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손과 발이 찔리셨다. 더욱이 이 시편이 기록된 것은 B.C. 1,000년경이다. 당시에는 십자가형이라는 형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십자가형은 훗날 로마제국이 사용한 형벌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이것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예측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예언임이 분명하다.
시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그러나 시편 22편은 이 극한의 비탄 가운데서 원망과 절규로만 끝나지 않고, 결국 하나님을 찬송하는 결말로 이어진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이후 부활하시어 영광을 받으심을 예언하는 것이다. 비탄이 극에 달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얼마나 처참했는지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다윗이 시편에서 과장하여 표현한 모든 고통이 예수님에게는 실제로 이루어졌다. 옷이 제비 뽑히는 수치, 수족이 찔리는 고통, 혀가 입천장에 붙는 갈증,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배신이 모두 그대로 성취되었다.
7. 하나님께서 다윗의 저주 기도를 성경에 남겨두신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에 드린 저주의 기도는 하나님의 심판 권한을 월권한 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 기도들을 성경에 포함시켜 우리에게 전해 주셨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윗의 저주 기도가 지닌 예언적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다윗이 시편에서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들, 예를 들어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는다",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간다"는 표현들은 다윗이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극한의 고통을 시적으로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과장된 표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성경에 남겨지게 되었다.
만약 다윗이 이런 극한의 표현들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고난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 있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다윗의 처절한 비탄과 저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어떻게 배반당하고, 어떻게 유린당하고,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인지를 누군가는 예언해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그 격렬한 성정(性情)을 들어 쓰신 것이다. 다윗은 그것이 훗날 메시아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예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다윗의 입술을 통하여 수천 년 후에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기록해 두신 것이다.
특히 시편 55편에서 다윗이 아히도벨을 향하여 드린 저주 기도,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라는 기도는 예수님의 수난과 직결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다윗의 절친한 모사꾼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손을 잡고 다윗을 배반한 것의 예표이다. 다윗이 아히도벨에 대해 기도한 저주가 결국 예수님을 향한 예언이 되었고, 예수님은 실제로 죽음 이후 음부에까지 내려가셨다 (벧전 3:19). 또한 시편 69편의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사도행전 1장 20절에서 가룟 유다에게 성취된 것으로 인용된다.
벧전 3: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행 1: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고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상처와 분노와 과장된 표현까지도 사용하셔서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하는 도구로 삼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저주 기도들을 성경에 남겨두신 것은 우리에게 "다윗처럼 저주하라"고 가르치기 위함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저주 기도들이 성경에 남겨진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처참한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동시에, 그 저주 기도들 자체는 다윗이 악한 영에게 잠시 넘어간 상태에서 드린 죄된 기도였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이 저주 기도들이 성경에 남겨진 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중요한 경고이기도 하다. 우리가 고통 중에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를 드릴 때, 그 기도는 이미 우리의 죄값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 3:13). 그분이 이미 받으신 저주를 우리가 또다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주님의 고난을 다시 헛되게 하는 것이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8. 신약의 성도는 원수와 악인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다윗의 저주 기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예언되었고, 그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 이제 신약의 성도로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마태복음 5장 43-4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3-44). 헬라어 원문에서 '사랑하라'(아가파오)와 '기도하라'는 동사는 모두 명령법 현재 시제이다. 이것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이다.
마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더욱이 여기서 사용된 '사랑'은 헬라어 아가페(ἀγάπη)이다. 이것은 남녀 간의 에로스(eros)적 사랑이나 친구 간의 필리아(φιλία)적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인 인류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 주신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그 수준의 사랑으로 원수를 계속해서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이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원수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들어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이 되기 전에 청년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던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바울이 되었다. 또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이렇게 기도하였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60). 바울이 회심하게 된 배경에는 스데반의 이 용서의 기도가 있었다. 우리가 원수를 위해 기도할 때, 그 원수가 사울처럼 바울이 될 수 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가르치고 치료하고 섬겼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단 한 사람도 자신을 옹호하지 않고 모두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제자들과 군중들을 저주하셨더라면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로마서 12장에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가르쳤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17)고 했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21)고 하였다. 악으로 악을 이기려 하면 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뿐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신약의 길이다.
롬 12:17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국가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국가의 지도자가 잘못된 정책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그를 저주하고 모욕하는 것은 신약 성도의 방식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지도자를 붙잡으시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요, 나라가 악한 지도자를 만난 것이 우리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귀신들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우리는 귀신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대적하고 물리쳐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아무리 우리를 핍박하는 자라도, 그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요 회개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이다. 우리가 악한 기도를 하면 할수록 악한 영이 더욱 역사하게 되며, 그것은 결국 이미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또다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려 할 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이 땅에 흘러가게 된다. 그것이 신약 시대를 사는 성도가 걸어가야 할 기도의 길이다.
9. 나오며
다윗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사무엘상하뿐만 아니라 역대상과 시편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 예수님 자신이 시편을 포함한 구약 성경 전체가 자신에 대한 예언임을 직접 선언하셨다는 것, 저주의 시편들(35·55·69·109편)에 담긴 처절한 저주의 내용들, 다윗의 저주 기도가 하나님의 심판 권한을 월권한 죄라는 것, 시편 22편의 비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그 저주 기도들을 성경에 남겨두신 섭리적 이유, 그리고 신약의 성도가 원수와 악인을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다윗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이기는 자의 최고봉이다. 왕이요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탁월하다. 그리고 다윗이 남긴 시편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비롯한 어떤 예언서보다도 더 많은 분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예언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메시아에 대한 최고의 예언자였다. 성경이 이처럼 풍성한 증거를 남겨 두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더 깊이, 더 온전히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윗은 상처받은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와 형제들에게 소외당한 상처, 죄 없이 쫓기며 도망자로 살아야 했던 상처, 신뢰하던 자들에게 배신당한 상처가 그를 저주의 기도로 이끌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심판 권한을 월권한 죄였지만, 하나님은 그 죄까지도 섭리 가운데 사용하셔서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삼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요 경륜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두 가지 태도를 가져야 한다. 첫째, 예수님의 고난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한다. 다윗의 저주 기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깊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혀가 입천장에 붙는 목마름, 옷이 제비 뽑히는 수치, 수족이 찔리는 고통, 가까운 자들로부터 버림받는 배신,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가는 죽음까지, 이 모든 것이 다윗의 시편에 예언되었고 예수님에게 실제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 고난의 실재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둘째, 우리는 더 이상 다윗처럼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를 드려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이미 그 저주를 다 받으셨다. 우리가 다시 그 저주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주님의 고난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을 걸어야 한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의 용서와 기도의 씨앗이 또 다른 바울을 낳을 수 있다. 그리하여 원수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들도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02일(화)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구약의 다윗이 시편에서 쏟아낸 저주의 고백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하는 메시야적 예언으로 연결되는지를 탐구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다윗이 원수를 향해 뱉은 가혹한 저주들이 인간적인 한계와 분노를 드러낸 영적 허물이었음을 지적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비탄의 목소리를 사용해 장차 예수님이 겪으실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을 세밀하게 예언하셨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신약의 성도들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며, 다윗의 사례를 통해 심판의 권한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성경 전체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인간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조차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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