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에 나타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한 분 하나님의 실상(사 9:6~7)
1. 들어가며
예수님이 누구냐. 이 질문 하나에 신앙의 전부가 걸려 있다. 우리는 이사야서를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계속 공부하고 있다.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다. 그분은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그분은 희년의 성취자이시다.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그분은 아기이자 아들로 오셨다. 그러나 그 아기이자 아들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한 가지를 붙들면 유대인도 품을 수 있고 오늘날 개신교인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를 놓치면 신앙은 뿌리째 흔들린다.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모르면 우상숭배로 굴러떨어진다. 그리고 우상숭배는 사탄 마귀가 조장한 함정이다.
이 진리는 교회 안에서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건드리지 않는다. 정확히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 성도들이 이단에게 뽑혀 나간다. 신천지가 들어오고 하나님의교회가 들어온다. 비슷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알지 못하면 분별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붙들어야 한다.
이사야는 그 하나님을 아기이자 아들로 예언했다. 그런데 그 아기이자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단 한 번도 "나는 아버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분을 아버지라 불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긴장 속에 한 분 하나님의 신비가 들어 있다. 이 신비를 풀지 못하면 우리는 삼위일체를 잘못 알게 된다. 잘못 알면 양태론 이단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사야서에 나타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한 분 하나님의 실상을 붙들되, 하나님이 한 분이심이 왜 신앙의 근본인지, 이사야 9장에서 그 아기이자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른 이가 누구인지, 예수님은 왜 끝까지 나는 아버지다 말하지 않으셨는지, 구약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인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인지, 창세기 1장의 우리라는 표현이 삼위의 회의인지 천사와의 어전 회의인지,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는 고백이 왜 양태론과 갈라지는지,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이 왜 굳이 아기이자 아들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 왜 '한 분'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첫 단추가 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붙들어야 신앙의 방향이 바로 선다. 이것을 놓치면 처음부터 어긋난다.
이단을 판별하는 기준이 여기에 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이단 감별사들이 있다. 그들이 이단을 정의하는 첫 번째 잣대가 무엇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느냐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느냐까지 따진다. 그러나 핵심은 하나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고 있느냐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구별할 것이 있다. 이단은 피조물을 잘못 아는 것으로 갈리지 않는다. 창조주를 잘못 아는 것으로 갈린다. 예를 들어 귀신에 관하여 여러 견해가 있다. 귀신이 뱀과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귀신과 뱀이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귀신을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은 불신자의 사후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담 이전에 살았던 인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천사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잡종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별별 얘기를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이단이라 하지 않으신다. 피조물에 관한 견해로는 이단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창조주다. 하나님을 모르면 우상을 섬기게 된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것을 믿는다. 그것이 우상숭배다. 그러면 그 우상숭배를 누가 조장했는가. 악한 영이다. 사탄 마귀가 자기를 섬기라고 조장한 것이다. 하와가 속아 넘어가 엄청난 징계를 받았다. 우리도 잘못 믿으면 속아 넘어가 지옥에 간다. 마귀는 거짓말의 아비다(요8:44).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마귀가 하와에게 무엇이라 했는가.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했다. 그 거짓말이 지금도 흐른다. 겁 없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이라 한다. 자기가 재림 예수라 한다. 그러나 피조물이 창조주가 될 수 없다. 사람은 다 알지 못한다. 전지하지 않다. 전능하지 않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존재하지 못한다. 늙어 가는 존재일 뿐이다. 어찌 피조물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이단에 속한 사람은 뇌를 완전히 장악당한 상태다. 악한 영이 장악한다. 그래서 비슷하게 말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들어야 한다. 정확히 알아야만 이단을 분별해 낼 수 있다. 이것을 모르니 이단이 자꾸 들어와 양 떼를 뽑아 간다. 비슷하기 때문에 속는다.
그런데 정작 이 진리를 다루어야 할 교회가 침묵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건드리지 않는다. 구원론도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이라고 못 박아 버린다. 그렇게 해 놓고 천국 못 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국에 가서 주님께 직접 물어 그 답을 전하면 직통 계시라고 몰아붙인다. 이단으로 정죄한다. 주님께 어떻게 직접 말을 듣느냐는 것이다. 못 듣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나쁘게 만들어 버린다. 무슨 파, 무슨 파 하고 낙인을 찍는다. 회개하고 행함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면 행위 구원자라고 매도한다. 이것이 전부 사탄 마귀의 작전이다. 우리가 여기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정죄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부터 정확히 붙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은 자신을 무엇이라 하셨는가. 이사야는 그 답을 정확히 기록했다. 이제 그 본문으로 들어간다.
3. 이사야 9장 6~7절에서 그 아기이자 아들을 '영존하신 아버지'라 부른 이는 누구인가?
이사야 9장 7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밝히신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니라. 그러므로 6절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감동시켜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 사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먼저 6절을 보자(사9:6).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여기서 주어를 정확히 보아야 한다. 지금 예언하고 있는 사람은 이사야다. 그런데 본문의 주어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제3자의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어를 제대로 잡아야 이 본문이 열린다.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해 보면 구조가 선명해진다.
먼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이다. 여기서 아기에 해당하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의 그 낱말은 헬라어로 옮기면 파이디온이다. 곧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직역하면 이렇다. 아이가 우리를 향하여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사야가 하는 말이다. 이어서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이다. 여기에는 전치사가 붙어 있다. 그래서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주어졌다는 뜻이 된다. 아이가 우리를 향하여 단번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치권이 그의 어깨 위로 단번에 있게 되었다. 정사, 곧 주권이 그 어깨에 얹혔다.
여기까지는 주어가 아이와 아들이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다. 그다음 문장에서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앞에서는 아이와 아들이 주어였는데, 이름을 부르는 대목에서는 주어가 감추어져 있다. 그 감추어진 주어가 무엇인가. 3인칭 단수다. 그분이다. 그분이 그 아기이자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기로 태어나고 어깨 위에 통치권이 주어질 그 아들의 이름을, 그분이 기묘자라, 모사라, 용사이신 하나님이라, 영원함의 아버지라, 평강의 통치자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분이 누구신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다. 이사야가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부른 것도 아니다. 답은 7절에 있다. 만군의 여호와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장차 보낼 그 아기이자 아들을 그렇게 부르시는 것이다.
번역의 문제도 짚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 대목을 수동태로 읽는다. 그의 이름이 기묘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읽는다. 그러나 원문은 능동태다. 그분이 그의 이름을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부르셨다. 정확히는 장차 부르실 것이다. 미완료 형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이미 부르신 것처럼 말씀하실 수 있다.
이제 7절을 보자(사9:7).
사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것을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원문의 골격은 이렇다. 통치의 많아짐을 위하여, 그리고 평강을 위하여 끝이 없다. 통치가 계속되고 평강이 계속된다. 그래서 무궁하다고 옮긴다. 다윗의 보좌 위로, 그의 왕국 위로 끝이 없다.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공의 안에서 그의 의 안에서 그것을 굳게 세우고 지탱하기 위하여 끝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못을 박는다. 군대들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것을 장차 이루실 것이다. 곧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
결론은 분명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장차 보낼 아기이자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르신다. 아기로 오시는 그분이 곧 영원하신 아버지로 불릴 그분이시다. 여기에 한 분 하나님의 비밀이 압축되어 있다.
4. 예수님은 왜 단 한 번도 "나는 아버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여기서 하나를 물어보자.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나타나셔서, 또는 성경 어디에서 "내가 아버지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맞는가 틀린가. 틀렸다. 그것은 삼일체 하나님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확히 알아야 한다.
성경은 단 한 번도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다"라고 말씀하신 기록이 없다. 지금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버지다, 절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아버지는 저기 계신다고 하신다. 왜 그런가. 그 답을 정확히 붙들어야 한 분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은 상대적 개념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라 불린다. 아들은 아버지가 있어야 아들이라 불린다. 둘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 낱말 자체를 쓸 수 없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은 한 분이셨다. 한 분이셨는데, 그 한 분으로부터 아들이 나오셨다. 그 아들이 이 땅에 도달하셨다. 그러자 이제는 신성만 가지신 아버지와, 나타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게 되었다. 둘이 되신 것이다. 그러니 아들이 나는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다. 아버지는 저기 계시기 때문이다.
이 나오심의 실상을 요한복음 8장이 정확히 밝혀 준다. 유대인들과의 논쟁 가운데 예수님이 자신이 어디에서 오셨는지를 말씀하신다(요8:42).
요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한글 성경은 이 구절의 힘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원문에는 두 동사가 나란히 있다. 먼저 "나와서"에 해당하는 말이 있다. 헬라어로 에르코마이다. 이는 어디에서부터 나왔다는 뜻이다. 그다음 "왔음이라"에 해당하는 말이 있다. 헬라어로 헤코다. 이는 도착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정확히 옮기면 이렇다. 나는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이 땅에 도착했다. 있던 분이 그냥 온 것이 아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던 분이 나와서, 곧 나오셔서 이 땅에 도착하신 것이다.
이 나오심이 곧 나타나심이다. 요한복음 1장 18절이 그것을 증언한다(요1:18).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만세 전부터 따로 활동하던 아들이 온 것이 아니다. 만세 전에는 아버지의 품 안에 계셨다. 그 품속의 독생하신 하나님이 드디어 나타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실 때 나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라고 정의하지 않으신다. 이미 아버지의 품에서 나와 따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이라 하시는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다(요10:30).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나는 아버지다라고 하지 않으신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다. 둘이면서 하나다. 그러나 어차피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속에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이렇게 흐른다. 아버지와 나를 분리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둘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알아들어야 한 분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들어야 삼위일체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5. 구약의 '여호와'는 아버지의 이름인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인가?
여기서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 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다. 많은 사람이 여호와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안다. 그러나 원래 여호와는 아버지라는 뜻이 아니다. 여호와는 아버지가 아니다.
정리하면 이렇다. 구약에는 한 분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여호와라 하셨다. 신약에 들어와서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예수라 하셨다. 그러니 구약의 여호와는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다. 예수는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나타나신 이름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여호와인 것이 아니다. 사실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인 것이다.
이 한 분 하나님이 자기 속에 감추어 두셨던 아버지의 독생하신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그래서 아들로 오셨다. 그러자 둘로 존재하게 되셨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신약에 들어와서야 여호와가 아버지로 불리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그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의 뿌리를 성경이 차례로 밝혀 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를 이렇게 계시하셨다(출3:14).
출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스스로 있는 자, 곧 여호와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사무엘상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사무엘상부터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구약으로 친다면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다.
그런데 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장차 아기와 아들로 보낼 자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이유는 하나다. 그것이 하나님 한 분이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나뉘어 다투는 것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아기이자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곧 그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디모데전서가 다시 못 박는다(딤전6:15).
딤전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구약의 하나님이 쓰시던 이름이다.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도 이 이름을 쓰신다. 같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말씀이 더 결정적이다(딤전6:16).
딤전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고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분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 나타나신 그분이 누구신가. 아들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보여 주실 수밖에 없었다. 피 흘려 돌아가셔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되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피가 없으시다(요4:24).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은 살과 피가 없다. 그러므로 한 분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그 여호와께서 아들로 나타나 예수라 하셨다. 이름의 계보를 붙들면 한 분 하나님이 선명해진다.
여기서 사람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 있다. 하나님을 형상으로 그리려는 것이다. 천주교의 그림을 보라. 삼위일체를 그린다면서 아버지는 흰 수염을 늘어뜨린 늙은 할아버지로 그린다. 아들은 조금 젊은 모습에 십자가를 든 형상으로 그린다. 위에는 비둘기를 얹어 성령이라 한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아들을 똑같이 그려 놓아 누가 누구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틀리게 그리면 틀렸다 할까 봐 똑같이 그린 것이다. 나름대로 의미를 담아 열심히 만들었으나 결국 잘못 만든 것이다. 어떤 그림은 창세기 18장에서 여호와와 두 천사가 아브라함을 찾아온 장면을 그려 놓고, 하나님에게까지 날개를 달아 놓았다. 잘못 그린 것이다. 제대로 그린 사람이 없다. 하나님은 천국에 계시고, 앉아 계신 그분은 늙은 할아버지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이 자신을 그런 노년의 모습으로 표현하실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가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뵐 때는 예수님을 뵙는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뵙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면 무엇이라 하시겠는가. 내가 만군의 여호와니라 하신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지, 아버지만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만군의 여호와인 것을 왜 모르느냐 하신다. 이름의 실상을 붙들면 이 대답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
6.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는 삼위의 회의인가, 천사와의 어전 회의인가?
이제 가장 뜨거운 본문으로 들어간다. 창세기 1장 26절이다(창1:26).
창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 우리라는 말이 나온다. 주된 해석은 이렇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협의하여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셋이 회의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셋이 회의하여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급 적용이다.
왜 소급 적용인가. 만세 전부터 아들이 나와 있었고 성령이 나와 있어서 셋이 회의를 했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품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 사실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있다. 사탄 마귀다. 가장 먼저 지음받았다고 추정되는 사탄 마귀는 하나님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탄이 무엇이라 했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나는 들어 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데, 어디 증명해 보라고 했다. 이 시험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가. 사탄이 아들을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만세 전에 셋이 회의를 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사탄이 아들을 몰랐을 리 없다. 셋이 회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의 우리는 무엇인가. 이것을 가장 완벽하게 풀어 주는 본문이 이사야 6장이다. 먼저 이사야가 본 환상을 보자(사6:1).
사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이 죽던 해는 대략 주전 740년경으로 잡는다. 정확히는 주전 739년에 죽는다. 여기서 붙들 것이 있다. 보좌가 단수라는 것이다. 높이 들린 보좌 하나에 주께서 앉으셨다. 셋이 앉은 것이 아니다. 실제로 천국의 보좌는 광장 앞에 있으며 놀랍도록 높이 들려 있다. 그 보좌에 그분이 앉으셨다. 이어서 스랍들이 등장한다(사6:2).
사6: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스랍은 천사의 한 종류다. 각기 여섯 날개가 있다. 여섯 날개는 가장 높은 계급을 뜻한다. 참고로 사탄 마귀는 네 날개였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으니 믿지 않아도 된다. 다만 실상을 확인하고 전하는 것이니 참고만 하면 된다. 높은 계급일수록 날개가 많다. 그 스랍들이 외친다(사6:3).
사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여기서 다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울린다.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리고 만군이라는 말을 붙들어야 한다. 만군은 히브리어 차바의 복수형이다. 차바는 군대를 뜻한다. 이 하늘의 군대는 두 가지를 가리킨다. 하나는 천사들이다. 다른 하나는 별들이다. 구약은 천사를 별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는 모든 천사와 하늘의 군대를 거느리신 하나님이시다.
이 하늘의 군대에는 순서가 있다. 처음에는 천사만 있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이 나올 때 2차로 인간 군대가 나온다. 그것이 곧 마지막 전쟁의 전사들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두 무리의 군대가 온다. 이것이 마하나임, 곧 두 무리의 군대다. 천사의 군대는 귀신을 치러 온다. 인간을 치는 것은 이미 천국에 들어간 인간이 온다. 그렇게 함께 와서 아마겟돈 전쟁을 끝낸다. 이것이 하나님의 군대가 움직이는 실상이다.
이제 8절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온다(사6:8).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 한 절 안에 답이 다 들어 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겠느냐 하신다. 내가는 1인칭 단수다. 혼자시다. 그런데 곧바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신다. 우리라고 하신다. 이 우리가 누구인가. 지금 어전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곧 하늘의 군대, 천사들이다. 스랍들이 앞에서 이 장면을 정확히 해석해 준다. 보좌에 앉으신 한 분 하나님, 그 앞에 시립한 천사들의 무리다. 그러니 우리는 삼위의 회의가 아니다. 한 분 하나님과 그를 모신 천사들의 어전 회의다.
욥기가 이 어전 회의를 그림처럼 보여 준다. 욥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 물으신다. 사탄이 땅을 두루 돌아다니다 왔다고 답한다. 어전에 참석한 존재가 있다는 뜻이다.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에스겔을 읽어도 이 어전 회의가 나온다. 그 어전에 참석한 천사들 가운데 높은 계급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계획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은 아들을 자기 안에 감추어 두셨다. 천사도 아들을 구경한 적이 없다. 사탄 마귀도 아들을 구경한 적이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미리 다 공개하지 않으신 것이다.
왜 감추셨는가. 아들로 내려가 사탄을 박살 내시려고 감추셨다. 비천한 사람이 천사를 무너뜨려 비참하게 만들도록 감추셨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는 삼위의 회의가 아니라 천사와의 어전 회의다. 이사야 6장이 그 열쇠다.
7.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는 고백은 왜 양태론 이단과 다른가?
한 분 하나님을 붙들면 반드시 마주치는 이단이 있다. 양태론이다. 양태론은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는 이 말은 맞으면서 틀리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가 말하는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백 퍼센트 맞다.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태론자들이 말하는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는 것은 우리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양태론은 아버지가 아들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으니 이제 아버지는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아들이 되어 버렸으므로 하늘은 공석 상태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땅에 아들만 위태롭게 남는다. 아들로 오셔서 죽어 버리면 천지 만물을 다스릴 존재가 없어진다. 그래서 위태로운 것이다. 그러니 양태론은 이단이다.
우리가 붙든 진리는 다르다. 하나님이 한 분이셨는데 그분이 아들로 오심으로 동시에 존재하게 되셨다. 하늘에 계신 분은 아버지라 불리고, 동시에 땅에서 육체를 입으신 그분은 아들이라 불린다. 동시 존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다. 아버지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다. 땅에 아들이 계신다.
양태론은 여기서 더 굴러떨어진다. 성부 고난설로 간다. 아버지가 고난받았다고까지 말한다. 아버지가 아들로 다 옮겨 갔으니 결국 아버지가 십자가에서 고난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고난받으신 것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이 고난받으신 것이다. 고난받으시려고 사람이 되신 것이다.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 이미 분리되어 다른 존재로 계신다. 그러니 성부 고난설은 이단이다.
양태론자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도 우습게 처리한다.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는 장면이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다. 양태론은 이렇게 설명한다. 밑에 있을 때는 아들이 되어 기도하고, 다시 위로 올라가면 아버지가 되어 그 기도를 듣는다는 것이다. 한 존재가 아래위로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단이다. 겟세마네에서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한 것은, 이미 분리되어 동시에 존재하는 두 분 사이의 실제 기도다. 왔다 갔다 하는 연기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존에 배운 삼위일체 교리도 다시 짚어야 한다. 그 교리가 조금 잘못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이렇게 가르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은 조심해야 할 표현이다. 물론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미 분리되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는 성자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해 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 이사야 9장 6절에서 그 아기이자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아니라고 잘라 버리면 그 예언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렇다고 아들이 곧 아버지라고 말할 수도 없다. 구약에는 한 분이셨는데 이제 분리되어 나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확히 말해야 한다. 아들은 아버지라고 정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니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릴 수는 있다. 예수님도 나는 하나님이다 말할 수 있고, 성부도 나는 하나님이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들이 나는 아버지다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이 미세한 차이를 붙들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헷갈린다.
그래서 구약 성경도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정확히 표현했다. 그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그분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를 것이라 하셨다. 그분이 아버지다라고 정의하지 않으셨다. 부를 것이라고 하셨다. 어차피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니 아버지라 불릴 수는 있다. 그러나 아들이 나는 아버지다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이미 분리되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다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차피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니,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속에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이치는 성령을 보내실 때도 똑같이 나타난다(요14:16).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여기 또 다른이라는 말이 있다. 이 다른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헬라어로 헤테로스가 아니라 알로스다. 헤테로스는 콩과 팥처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알로스는 같은 종류의 다른 것이다. 곧 같은 하나님이신데 아들로도 나타나시고 성령으로도 나타나셔서 동시 존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보혜사라 하셨다. 그 보혜사가 예수님과 전혀 딴판인 것이 아니다. 바로 뒤 말씀이 이를 증명한다(요14:18).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제자들이 두려워한다. 내가 떠나면 죽는 줄 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다. 내가 다시 오겠다 하신다. 성령으로 오시겠다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지만, 내가 성령으로 올 것이니 나를 다시 볼 것이라 하신다. 그래서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같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양태론과 갈라지는 자리다. 양태론은 아버지를 없애 버린다. 우리는 아버지가 하늘에 계심을 붙든다.
8. 한 분 하나님은 왜 아기이자 아들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한 분 하나님이 왜 굳이 아기이자 아들로 오셨는가.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탄을 멸하실 능력이 없어서 이 어려운 방법을 쓰신 것이 아니다. 말씀 한마디면 끝난다. 그런데도 아기이자 아들로 오셨다. 그 이유는 셋이다.
첫째,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히9:22).
히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죄를 속하는 것은 피다. 피가 죄를 덮는다. 여기 속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파르다. 카파르는 덮는다는 뜻이다. 덮어서 화해에 이르고 용서에 이른다. 피가 죄를 덮어야 우리를 의롭다 하실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라 피가 없으시다. 흘릴 피가 없으시다. 그래서 사람이 되려고 아기이자 아들로 오셨다. 피를 흘려 우리 죄를 덮으시려고 오셨다. 죄를 덮어 우리를 죄 없다 하시려고 오셨다.
둘째, 사탄을 비참하게 만드시려고 오셨다(히2:6).
히2: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히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 못한다. 배가 고프고 힘들고 지친다. 그래서 잠깐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다. 그러나 나중에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다. 여기 관은 스테파노스, 곧 승리관이다.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승리관을 쓰신다. 하나님은 고난받으실 수 없고 죽으실 수 없다. 그런데 고난의 끝은 죽음이다. 그래서 잔과 세례라 하신 것이다. 잔은 고난의 잔이요, 세례는 죽음의 세례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며 내 세례를 받겠느냐 하신 것이 그것이다. 이 죽음의 목적이 있다(히2:14).
히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히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시려고 혈과 육을 입으셨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한평생 종노릇 하던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죽으셨다. 왜 이 방법을 쓰셨는가. 사탄을 인간에게 패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탄의 패배를 더 수치스럽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사탄은 자기가 인간보다 낫다고 늘 생각한다. 자기가 더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탄을 인간에게 지게 하셔서 박살 내신다.
그래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 이름을 정확히 믿고 회개하여 귀신을 쫓아내면, 주님의 영광의 나라가 드러난다. 여기에 회개와 축사의 실상이 있다. 회개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예수님의 피가 들어온다. 그 피가 악한 영을 몸에서 떼어 낸다. 이격시킨다. 그리고 녹인다. 그다음 성령의 은사가 임한다. 성령의 불이 그것을 태운다. 성령의 칼이 그것을 자른다. 피가 이격시키고 녹이는 일과, 불과 칼이 태우고 자르는 일은 다른 일이다.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이렇게 귀신이 쫓겨 나간다. 차원이 다른 세계에 사는 천사가, 비천한 인간 앞에서 꼼짝 못 한다. 이것이 사탄을 수치스럽게 하시려던 하나님의 작전이다.
셋째, 기업 무를 자가 되시려고 오셨다. 룻기가 이것을 보여 준다(룻3:12).
룻3: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나보다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있으니
기업 무를 자를 히브리어로 고엘이라 한다. 고엘은 그냥 구속자가 아니다. 친족 구속자다. 이것이 정확한 뜻이다. 친족이어야 대신 값을 물어 되사 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친족이 되려고 오셨다. 사람이 되어 우리의 친족이 되셨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셔서 피조물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 되신 이유는 우리 때문이다.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까지 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성찬식을 세우셨다. 내가 너희 생명을 주려고, 너희를 위해 죽으려고 이 땅에 왔다 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약 성경에서 단 한 번도 나는 아버지다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 하셨다.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 하셨다. 한 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아들로 오셨음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 영생의 정의가 여기 있다(요17:3).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왜 여기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붙이셨는가. 그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음을 알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아버지의 말씀이다. 아버지가 그 속에 계셨기 때문이다. 신성은 같으시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하셨다. 아버지가 안에 계시니 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눈물이 터진다. 벌레만도 못한 죄인을 위하여 창조주가 친히 죽으러 오셨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지금까지 우리는 이사야서에 나타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한 분 하나님의 실상을 일곱 가지 질문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 한 분이라는 사실이 왜 근본인지 살펴보았다. 이사야 9장에서 그 아기이자 아들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른 이가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이 왜 나는 아버지다 하지 않으시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하셨는지 살펴보았다. 여호와가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이름임을 살펴보았다. 창세기 1장의 우리가 삼위의 회의가 아니라 천사와의 어전 회의임을 살펴보았다. 아버지가 아들로 오셨다는 고백이 왜 양태론과 갈라지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이 왜 아기이자 아들로 오셔야만 했는지 그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 진리 앞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신학자들이 한 분 하나님을 잘못 정리해 놓았다. 그래서 하나님을 한 분으로도 두 분으로도 헷갈리게 만들었다. 아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심지어 어머니 하나님까지 만들어 냈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어머니까지 세웠다. 피조물을 신격화하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이 어리석음에서 돌이켜야 한다. 한 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정확히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구약의 여호와가 곧 신약의 예수이심을 붙들어야 한다. 여호와가 아들로 나타나셨음을 붙들어야 한다. 아버지가 아들로 오심으로 동시에 존재하게 되신 신비를 붙들어야 한다. 아들은 아버지다라고 말할 수 없으나, 그분이 곧 한 분 하나님이심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를 볼 수 없으니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천국에 가서 보좌에 앉으신 그분을 뵐 때, 그분이 곧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왜 한 분 하나님이 아기이자 아들로 오셨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피가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 죄를 덮으시려고 피를 얻으러 사람이 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탄을 인간에게 패하게 하여 박살 내시려고 낮아지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친족 구속자, 곧 고엘이 되시려고 피조물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예수 이름을 정확히 믿고 회개하여 악한 영을 쫓아내는 자리에 서야 한다. 회개할 때 들어오는 예수님의 피가 악한 영을 이격시키고 녹이며, 성령의 불과 칼이 그것을 태우고 자른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한 분 하나님이 오직 우리를 위하여 아기이자 아들로 오셨음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고, 예수님께 감사하며 예수님만 경배하고 예수님만 찬양하며 예수님만 높여 드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7월 14일(화)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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