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45)] 이사야의 예언(05) “왜 죄없는 그분이 고난받고 죽으셔야 했는가?”(사52:13~53:1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A03afI8iabo
왜 죄 없는 그분이 고난받고 죽으셔야 했는가?
1. 들어가며
이사야 52장 13절부터 53장 12절까지는 구약성경 가운데 메시야의 고난을 가장 구체적으로 예언한 본문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단순히 죽는 분으로만 묘사하지 않았다. 그는 멸시와 천대를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질고를 짊어지고, 채찍에 맞고, 찔리고, 상하며, 마침내 죽임당하는 종으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분에게 고난받을 만한 죄가 전혀 없었다는 데 있다.
사람이 죄를 지은 뒤 그 대가로 질병과 가난과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면, 그것은 의로운 고난이라고 할 수 없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벧전 2:20). 죄로 인한 고난은 응당 받아야 할 징계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전혀 다르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고, 거짓도 없으셨으며, 고난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셨다.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단순히 죽기만 하지 않고 채찍에 맞고, 멸시와 조롱을 당하며, 헐벗고 목마르고, 온몸이 찢기는 고난까지 받으셔야 했는가? 죄의 삯이 사망이라면 죽음만 담당하셔도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죄가 사람에게 가져온 결과가 사망 하나만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죄는 하늘에서 행위책에 기록되어 둘째 사망의 근거가 되며, 동시에 이 땅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 안에 침입하여 육체와 정신과 삶을 억압하는 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죽음의 문제만을 해결한 사건이 아니다. 그분의 죽음은 죄의 삯인 사망을 담당하였고, 그분의 채찍과 멸시와 질고는 죄로 인해 사람에게 들어온 저주와 질병과 영적 억압을 담당하였다. 예수님의 피 역시 죄를 덮어 의롭다 하시는 속죄의 기능과, 죄를 자백하는 자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는 성결의 기능을 함께 가진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죄 때문에 받는 고난과 의를 위한 고난은 어떻게 다른지, 예수님의 고난은 왜 대속적이며 자발적인지, 그분은 왜 죽기만 하지 않고 채찍과 멸시까지 받으셨는지, 죄를 지으면 왜 죽음과 악한 영들의 침입이라는 두 결과가 생기는지, 이사야 53장의 질고와 채찍은 질병 치유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예수님의 피는 속죄와 성결을 어떻게 다르게 이루는지, 그리고 왜 믿음의 선포만으로는 질병과 악한 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죄 때문에 받는 고난과 의를 위한 고난은 어떻게 다른가?
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모두 같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지어 그 대가를 받는 고난과 선을 행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고난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죄 때문에 매를 맞으면서 오래 참는다고 해서 그 인내가 천국에서 상이나 면류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는 데에는 아무 칭찬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벧전 2:20).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은 응당한 고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결과가 삶에 나타난다. 질병과 가난과 실패와 정신적 억압과 자녀의 고통이 찾아올 수 있다. 신명기 28장은 불순종이 가져오는 저주를 질병, 가난, 정신 이상, 자녀의 상실, 수고의 열매를 빼앗김 등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런 고난을 받으면서 자신을 의로운 고난의 사람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은 다르다.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선포하며 악한 영의 일을 드러내다가 사람들의 미움과 박해를 받는다면, 그것은 적극적인 고난이다. 악한 영들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을 통하여 복음 전파자를 공격한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죽이려 했던 것도 같은 원리다. 예수님이 그들의 명예와 종교 권력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성도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면 먼저 회개해야 한다. 반면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박해라면 끝까지 견뎌야 한다. 이 두 고난을 혼동하면 죄의 문제를 덮어 둔 채 자신을 순교자처럼 생각하게 되고, 실제로 제거해야 할 저주와 악한 영의 문제는 그대로 남게 된다.
고난의 가치는 고통의 강도나 기간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고난을 받는가가 중요하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고통만 견디면 마음이 완고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병상이라도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계기로 삼는다면 그 고난은 돌이킴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고난 자체가 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태도가 열매를 만든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받은 고난은 죄값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으며 죽임당했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해서 매를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받은 것을 기뻐하였다. 이것이 적극적인 고난이다. 죄를 숨기며 받는 고난과 진리를 전하다가 받는 고난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된다.
3. 왜 예수님의 고난은 대속적이며 자발적인가?
예수님의 고난은 응당한 고난이 아니다. 그분은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채찍과 멸시와 죽음이 임할 이유가 없었다. 예수님의 고난은 다른 사람의 죄값을 대신 담당한 대속적 고난이며,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선택하신 자발적 고난이다.
이사야는 메시야가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한다고 예언하였다. 사람들은 그분이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께 징벌받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한 것이었다(사 53:4-5).
사 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서 핵심은 반복되는 ‘우리’라는 말이다.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우리가 받을 징계, 우리가 받아야 할 채찍이었다. 예수님의 몸에 일어난 모든 고난은 그분 자신의 죄와 상관이 없었다. 그분은 우리 대신 그 고난을 받으셨다.
또한 예수님은 이 고난을 피할 권리가 있으셨다. 그분은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를 불러 자신을 보호하게 할 수도 있었고,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양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것처럼 입을 열지 않으셨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않으셨다(벧전 2:22-23).
벧전 2:22-23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은 대속적이면서 자발적이다. 대속적이라는 말은 우리 대신 받으셨다는 뜻이고, 자발적이라는 말은 사랑으로 기꺼이 선택하셨다는 뜻이다. 이 두 요소가 함께 있어야 십자가의 사랑이 온전히 드러난다.
대속이라는 말은 값을 대신 지불한다는 뜻이다. 죄인은 자기 죄의 값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의 자리로 들어가 그 값을 대신 치르셨다. 이사야 53장에는 ‘그가’와 ‘우리’가 반복해서 대조된다. 그가 찔렸으나 원인은 우리의 허물이었고, 그가 상했으나 원인은 우리의 죄악이었다. 그가 징계를 받았지만 평화는 우리가 누렸고, 그가 채찍에 맞았지만 나음은 우리가 받았다. 이것이 1:1로 대응되는 대속의 구조다.
예수님의 자발성은 십자가 직전의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그분은 자신에게 닥칠 일을 모두 아셨고, 잡으러 온 자들 앞에 스스로 나아가셨다. 목숨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힘없는 희생자의 비극이 아니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창조주께서 선택하신 사랑의 행동이다. 강요받은 죽음이었다면 그 사랑의 완전성이 드러날 수 없지만,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셨기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낸다.
4. 예수님은 왜 죽기만 하지 않고 채찍과 멸시를 받으셨는가?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다(창 2:17).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죄값을 담당하기 위해 죽기만 하셔도 될 것처럼 보인다. 유월절 어린양도 죽임당하면 되지, 채찍에 맞거나 조롱당할 필요는 없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죽지 않으셨다. 그분은 침 뱉음을 당하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맞고, 가시관을 쓰고, 옷 벗김을 당하고, 조롱받고, 채찍에 맞고, 목마름을 겪으셨다. 이것은 죄의 결과가 사망 하나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는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에게서 분리할 뿐 아니라, 육체와 정신과 생활에 저주와 질병과 억압을 가져온다.
죽음은 죄의 궁극적 결과다. 그러나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죄를 통하여 악한 영들이 들어와 육체와 정신과 환경을 괴롭힌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음으로 둘째 사망의 값을 지불하셨고, 채찍과 멸시와 헐벗음과 목마름으로 이 땅에서 사람이 받아야 할 육체적·정신적 저주의 값을 담당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다고 말한 뒤, 곧바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다”고 선언한다(벧전 2:24). 이는 십자가가 죄의 용서뿐 아니라 질병과 저주에서 벗어날 근거도 마련했다는 뜻이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에는 두 층위가 있다. 하나는 죽음의 고난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에 이르기 전의 육체적·정신적 고난이다. 죽음은 사망의 값을 담당한 것이고, 채찍과 멸시와 질고는 죄로 인해 사람에게 임한 저주와 질병과 영적 억압을 담당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정신적 고난과 육체적 고난도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멸시와 조롱과 침 뱉음과 버림받음은 인간의 정신과 감정이 죄로 인해 겪는 수치와 상처를 담당한 것이다. 채찍과 가시관과 못 박힘과 갈증은 육체가 죄로 인해 받는 고통을 담당한 것이다. 예수님은 영혼과 몸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저주를 대신 경험하셨다.
그분은 부유한 왕의 모습으로 편안하게 죽지 않으셨다. 옷이 벗겨지고, 가진 것이 나뉘고, 목마름 속에 죽으셨다. 이는 가난과 결핍과 수치의 저주까지 담당하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사망의 형벌만을 해결한 최소한의 사건이 아니라, 타락 이후 인간이 겪어 온 저주의 전체 영역을 짊어진 충만한 대속이다.
또한 예수님의 고난은 사탄과 악한 영들에게 법적 패배를 안겨 주었다. 악한 영들은 죄를 근거로 사람을 공격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죄와 저주의 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그들의 권리를 무효화할 근거가 생겼다. 성도가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를 적용할 때 악한 영들은 더 이상 합법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
5. 죄를 지으면 왜 죽음과 악한 영들의 침입이라는 두 결과가 생기는가?
죄를 지으면 두 가지 결과가 생긴다. 첫째는 하늘의 문제다. 죄가 행위책에 기록되어 심판의 근거가 된다. 둘째는 이 땅의 문제다. 죄를 통하여 악한 영들이 사람 안에 들어와 육체와 정신과 삶을 억압한다. 창세기 2장은 죽음의 문제를 말하고, 창세기 3장은 뱀의 침입과 저주의 문제를 보여 준다.
하나님은 뱀에게 평생 흙을 먹으라고 명하셨다(창 3:14). 여기서 흙은 단순한 땅을 뜻하는 ‘에레츠’가 아니라, 사람의 육체를 만든 재료를 가리키는 ‘아파르’와 연결된다. 하나님은 땅의 흙, 곧 ‘아파르’로 사람의 육체를 지으셨다(창 2:7). 그러므로 뱀이 흙을 먹는다는 말은 뱀이 사람의 육체를 먹잇감으로 삼는 영적 실상을 포함한다.
창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죄는 악한 영이 들어오는 문을 연다. 우상숭배를 하면 우상숭배의 영이 들어오고, 혈기와 분노를 반복하면 혈기와 분노의 영이 들어오며,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품으면 그 성향을 강화하는 영들이 들어온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고 죽인 사건은 죄가 마음속 욕망으로만 머물지 않고 악한 영의 작용과 결합하여 살인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악한 영들은 사람의 육체와 신경과 혈관과 정신을 억압한다. 그 결과 피곤함과 통증과 불면과 우울과 불안과 공포와 정신적 혼란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시덤불과 엉겅퀴 같은 방해가 일어나 수고의 열매를 충분히 얻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죄가 이 땅에서 가져오는 두 번째 결과다.
그러므로 구원은 행위책의 죄만 덮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늘의 기록이 예수님의 피로 덮여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함께, 이 땅에서 죄를 통하여 들어온 악한 영들을 회개와 자백으로 내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죽음의 문제와 악한 영들의 침입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온전한 구원이 삶에 적용된다.
하늘의 기록과 이 땅의 침입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행위책은 마지막 심판과 관련된다.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으로 품은 것이 기록되어 하나님 앞에 증거가 된다. 예수님의 피가 그 죄를 덮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받는다. 이것이 죽음과 둘째 사망의 문제다.
그러나 악한 영의 침입은 현재의 삶과 관련된다. 죄를 짓는 순간 악한 영은 그 죄를 발판으로 삼아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육체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 번의 죄가 반복되면 통로가 넓어지고, 악한 성향은 습관과 중독과 질병으로 굳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만 알고 죄를 통하여 들어온 영적 존재를 방치하면,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동일한 혈기와 음란과 우울과 질병에 계속 묶여 살 수 있다.
조상들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도 같은 원리다. 후손이 조상의 행위를 직접 하지 않았더라도, 가문 안에서 반복된 우상숭배와 무속과 음행과 폭력은 악한 영들이 머무는 통로를 형성한다. 후손이 그 죄를 인정하고 끊어 내지 않으면 같은 성향과 질병과 실패가 반복될 수 있다. 이것이 조상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 이유다. 조상을 대신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근거로 붙어 있는 악한 영의 권리를 끊는 것이다.
6. 이사야 53장의 질고와 채찍은 질병 치유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사야 53장 4절은 메시야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질고는 단순히 마음의 슬픔만이 아니라 육체의 질병과 연약함을 포함한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신 사건을 이사야 53장 4절의 성취로 해석하였다(마 8:16-17).
마 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셨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 본문은 질병과 귀신의 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다.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열병이 떠났다고 기록한 것도 질병 뒤에 인격적인 악한 영의 작용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병이 발이 달려 떠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병을 일으킨 영적 세력이 떠났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육체의 징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함이었다. 그분의 등과 온몸이 찢긴 것은 단순한 로마 형벌의 잔혹성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죄로 인해 육체에 들어온 질병과 저주의 권세를 무너뜨릴 법적 근거를 마련한 사건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으므로 나는 이미 나았다”라고 선포하는 것만으로 모든 질병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속의 근거는 이미 마련되었지만, 그 효력이 개인의 삶에 적용되려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죄를 통하여 들어온 악한 영들을 실제로 내보내야 한다. 십자가의 객관적 성취와 개인의 주관적 적용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믿음의 선포는 필요하다. 그러나 선포는 회개와 축사를 대신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채찍은 치유의 근거이고, 회개와 자백은 그 근거를 내 삶에 적용하는 통로다. 성도는 질병을 단지 육체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죄와 악한 영의 침입 여부를 함께 살펴야 한다.
마태복음 8장은 이사야의 예언을 예수님의 실제 치유 사역에 연결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병을 말로만 위로하지 않으셨다. 손을 대어 고치시고,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으셨다. 이것은 이사야 53장의 질고 담당이 단지 영적인 비유가 아니라 실제 육체의 회복을 포함한다는 성경적 증거다.
다만 모든 질병을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과로와 영양 부족과 사고로 생긴 질병도 있고, 죄와 악한 영의 공격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질병도 있다. 육체적 원인이 있다면 충분한 휴식과 치료가 필요하다. 동시에 반복되는 질병이나 의학적으로 원인을 찾기 어려운 고통이 있다면 영적 통로도 살펴야 한다. 성경적 치유는 의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원인과 보이지 않는 원인을 함께 다루는 것이다.
예수님의 채찍은 치유의 가능성을 여는 근거다. 그러나 그 근거를 실제로 누리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악한 영의 권리를 끊고, 몸을 다시 죄의 도구로 내주지 않아야 한다. 치유받은 뒤 같은 죄로 돌아가면 더 악한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예수님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
7. 예수님의 피는 속죄와 성결을 어떻게 다르게 이루는가?
예수님의 피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역사하지 않는다. 그 피는 하늘에서 죄를 덮어 의롭다 하시는 속죄의 기능을 가지며, 동시에 이 땅에서 사람을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는 성결의 기능을 가진다. 요한일서 1장 7절과 9절은 이 두 기능을 구별하여 보여 준다.
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속죄는 죄의 기록을 덮는 일이다. 죄인은 본래 의롭지 않지만, 예수님의 피가 죄를 덮음으로 하나님께서 죄 없는 자처럼 여겨 주신다. 이것이 칭의다. 칭의는 사람이 실제로 완전히 깨끗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법적으로 의롭다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과 육체에는 죄를 통하여 들어온 더러운 영들과 악한 성향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결이 필요하다. 성결은 죄를 구체적으로 자백하고, 예수님의 피를 적용하여 악한 영을 몸과 혼에서 떼어 내고 깨끗하게 하는 과정이다.
속죄는 믿음으로 받지만, 성결은 자백과 회개를 요구한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백하지 않으면, 하늘의 행위책은 피로 덮일 수 있어도 이 땅에서 악한 영들이 주는 억압은 계속될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 기도는 주문이 아니라, 자신과 조상들이 지은 죄를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악한 영들의 권리를 제거하는 영적 행위다.
예수님의 피가 죄를 덮는 것과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역이 아니다. 하나는 하늘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속죄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결이다. 이 두 사역이 함께 적용될 때 성도는 죄 사함뿐 아니라 실제적인 자유와 치유를 누리게 된다.
구약의 제사에서도 속죄와 정결은 구별되었다. 속죄 제사를 드려 죄 사함을 받은 뒤에도 부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결의 절차가 필요했다. 죄책의 제거와 실제 더러움의 제거가 동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피는 죄를 용서할 뿐 아니라 양심과 삶을 깨끗하게 한다.
칭의만 강조하고 성결을 무시하면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더러움을 방치하게 된다. 반대로 성결만 강조하고 속죄를 잊으면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깨끗해지려다가 정죄와 율법주의에 빠진다. 먼저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하고, 그 은혜를 근거로 계속 죄를 자백하며 내면과 육체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회개 기도문은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죄의 항목을 알려 주는 안내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단어를 반복한다고 자동으로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죄와 조상의 죄를 실제 죄로 인정하고 마음으로 돌이키며, 그 죄와 연결된 악한 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보내야 한다. 자백과 믿음과 결단이 함께 있어야 한다.
8. 왜 믿음의 선포만으로는 질병과 악한 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가?
많은 성도가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으므로 나는 나았다”고 반복하여 선포한다. 이 고백 자체는 성경적이다. 그러나 선포를 백 번, 천 번 반복해도 몸속에 들어온 악한 영을 하나도 내보내지 않는다면 실제 질병은 그대로 남을 수 있다. 대속의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질병과 영적 억압이 죄를 통하여 들어왔다면 먼저 죄를 찾아 회개해야 한다. 자신의 죄뿐 아니라 조상들의 우상숭배와 음행과 폭력과 혈기와 살인과 무속 행위 등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죄를 자백해야 한다. 출애굽기 20장은 우상숭배의 죄악을 삼사 대까지 갚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죄와 무관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회개할 때 예수님의 피가 역사한다. 그 피는 악한 영을 사람에게서 이격시키고, 죄의 권리를 녹여 버린다. 그다음 성령의 불과 성령의 칼이 악한 영을 태우고 잘라 낸다. 피가 이격시키고 녹이는 일과, 불과 칼이 태우고 자르는 일은 구별된다. 회개와 축사는 이 두 사역을 실제로 경험하게 한다.
성도는 질병을 단지 약과 운동과 긍정적 사고만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좋은 약을 먹어도 몸에 영적 거머리들이 붙어 생명력을 빨아먹고 있다면 온전한 회복이 어렵다. 육체의 치료와 함께 죄의 문을 닫고 악한 영을 내보내는 영적 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
또한 신기가 있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 열심히 봉사하고 집사와 권사가 되어도, 악한 영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면 다시 무속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교회가 이 문제를 가르치지 않으면 성도는 해결받을 길을 찾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의 대속적 고난이 악한 영의 권세를 무너뜨릴 근거까지 마련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믿음의 선포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회개와 자백과 악한 영의 축출이 뒤따라야 한다. 그때 예수님의 채찍과 피의 효력이 실제 몸과 정신과 삶에 나타난다. 성도는 예수님의 대속을 단지 교리로 고백하는 데 머물지 말고, 그 대속의 혜택을 실제로 적용받아야 한다.
선포는 진리를 입으로 동의하는 행위지만, 회개는 죄의 방향에서 실제로 돌아서는 행위다. 입으로는 나았다고 말하면서 동일한 죄를 계속 짓는다면 악한 영의 통로는 닫히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름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죄가 만든 법적 권리를 제거할 수 없다. 먼저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축사 역시 큰 소리나 특별한 동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피와 이름의 권세, 정확한 회개, 성령의 은사가 함께 역사해야 한다. 악한 영의 종류와 들어온 통로를 분별하고, 그 권리를 취소하며, 떠나가도록 명령해야 한다. 이후에는 말씀과 기도와 거룩한 생활로 빈자리를 성령으로 채워야 한다.
성도는 자동적인 구원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사실은 참이지만, 그 은혜를 적용받는 과정에는 믿음과 회개와 순종이 필요하다. 약속은 이미 주어졌지만, 약속을 붙잡고 실제로 죄를 끊으며 악한 영을 대적하는 사람이 그 열매를 누리게 된다.
9. 나오며
이번 시간에는 죄 없는 예수님께서 왜 고난받고 죽으셔야 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죄 때문에 받는 응당한 고난과 복음을 위하여 받는 적극적인 고난이 다르다는 것을 살펴보았고,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 대신 기꺼이 받으신 대속적이며 자발적인 고난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단지 죽기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채찍과 멸시와 조롱과 헐벗음과 목마름을 담당하셨다. 이는 죄의 결과가 사망 하나만이 아니라, 악한 영들의 침입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환경적 저주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죽음은 둘째 사망의 값을 지불하였고, 그분의 채찍과 질고는 질병과 저주의 권세를 무너뜨릴 근거를 마련하였다.
또한 죄를 지으면 하늘에서는 행위책에 기록되고, 이 땅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 안에 침입한다는 두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늘의 죄 기록이 덮이는 칭의와, 사람 안의 악한 영이 제거되는 성결을 함께 포함해야 한다.
예수님의 피는 죄를 덮어 의롭다 하시는 속죄의 피이며, 죄를 자백하는 자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는 성결의 피다. 믿음으로 속죄를 받아야 하고, 구체적인 자백과 회개를 통하여 성결을 이루어야 한다. 선포만 반복하면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악한 영을 내보내지 않는다면 질병과 억압은 계속될 수 있다.
성도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을 정직하게 분별해야 한다. 죄로 인한 고난이라면 의로운 고난인 것처럼 포장하지 말고 회개해야 한다. 악한 영이 들어온 통로를 찾아 닫아야 하며, 예수님의 피와 성령의 능력으로 그 영들을 내보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육체와 정신을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또한 성도는 자신의 육체가 있을 때 복음을 위하여 수고해야 한다. 죄로 인한 쓸데없는 고난에 묶여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악한 영의 억압에서 벗어나 복음 전파를 위하여 받는 적극적인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그 고난은 천국에서 상과 면류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죄 없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자발적으로 고난받고 죽으심으로 마련하신 속죄와 성결과 치유와 자유를 실제로 누리며, 자신의 몸을 의의 도구로 드려 복음을 위하여 충성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정보배 목사
[설교요약]
이 설교는 이사야서의 예언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지닌 대속적 성격과 그 구체적인 효력을 깊이 있게 고찰합니다. 저자 정보배 목사는 성도가 겪는 고난을 죄에 따른 당연한 결과인 응당적 고난과 복음을 위한 적극적 고난으로 구분하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질병과 저주를 끊기 위해 자발적 고난을 택하셨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죄의 결과가 영원한 사망뿐만 아니라 육체와 정신을 장악하는 악한 영들의 침투라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남을 지적하며, 십자가의 보혈이 하늘의 행위록을 덮는 속죄를 넘어 우리 내부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성결의 근거가 됨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회개와 자백을 통해 내면의 어둠을 몰아내고, 무의미한 고통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한 의의 병기로 거듭날 것을 촉구하는 것이 이 글의 핵심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