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독교인들은 매주일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이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지 안 받으시는지 어떻게 알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이 보이는 분이요, 즉각적으로 음성으로 대답해 주신다면 자신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는지 알 수 있을텐데, 하나님을 보이지도 않고 직접 귀에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물론 직접 말씀하실 때도 있기도 하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고 무엇인가를 알려주실 뿐 직접 음성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만약 오늘날에도 직접 내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다면 그것의 십중팔구는 귀신들이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그분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여정에 있었던 두 번의 절기예배를 통해 참된 예배와 거짓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자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1. 들어가며
모든 성도들이 교회에 나가게 되면 반드시 해야 하는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예배드리는 일이다. 난생 처음 교회에 나가는 경우 십중팔구는 주일낮예배시간에 초청을 받아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교회에 등록하게 되면, 이제 그는 이 세상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자신이 드리는 예배를 정말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예배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실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셨는지 안 받으셨는지를 우리의 육안으로 확인해볼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에 기록들을 통하여,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도 하고 받지 않으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이야기다(창4장).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두 번의 절기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가 과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도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사탄마귀가 가장 크게 원하는 일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는 하나님 이외에도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존재가 또 있다. 그들은 사탄마귀와 귀신들이다. 이들은 원래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지음받은 천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하늘에서 쫓겨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는 음부에 자리를 펴놓고 사탄마귀가 귀신들의 왕노릇을 하고 있다. 귀신들은 지금도 지구와 연결된 음부의 문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왔다갔다 하면서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영혼을 사냥하여 지옥으로 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육신을 벗기 전까지 이러한 영물을 볼 수 없기에, 지금도 귀신들에게 속아 그들을 섬기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귀신을 섬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쫓겨난 귀신들의 우두머리인 사탄마귀가 가장 바라고 소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마태복음 4장에 나타나 있다. 사탄마귀는 오늘도 그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까지도 주겠다고 제안할 정도다(마4:8~9).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에게 경배하고(절하고) 찬양하는 것을 그는 갈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사탄마귀가 가장 흠모하고 사모하는 것이 예배라는 것을 알고 이에 적절히 잘 대처해야 한다. 사람들이 자기를 경배하고 자기에게 제물을 바치며 춤추며 노래하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사탄마귀에게 예배하지 않고, 참된 하나님에게만 예배할 수 있을까?
3.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하나님이 받으셨던 첫번째 예배(절기)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이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2번의 절기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아니하시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 2번에 걸쳐 절기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번은 홍해를 건넌 후 에담광야(수르광야)에서 드렸으며, 또 하나는 시내산 아래에 있는 시내광야에서 드렸던 것이다. 첫번째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나 안타깝게도 두번째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셨다. 더욱이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대체 이 두 예배는 어떤 차이가 있었길래 결과가 그토록 달랐던 것일까?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 이 두 번의 절기예배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인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데리고 나온 목적대로 지켜진 절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3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하나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출7:16). 또 하나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사하기(희생제물을 바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출3:18).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출5:1). 그런데 여기에서 "절기"를 지킨다는 뜻은 어떤 특별한 일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해마다 그날이 되어서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한 일을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그들이 광야에서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이러한 뜻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절기를 지킨다는 뜻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이 가르쳐주는데, 그것은 "춤을 추며 즐거워한다"라는 뜻이다. 즉 절기를 지킨다는 뜻은 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나와 두 번에 걸쳐 절기를 지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첫번째로 지켰던 절기는 홍해를 건너후였다. 그들은 홍해를 건넌 후에 하나님을 섬겼으니 그들은 홍해를 건너자마자 애굽군대가 바다에 죽은 것을 보면서 해방의 기쁨을 춤을 추면서 즐거워하였다. 물론 그때 하나님께서 바쳐진 희생제물은 애굽군대였다. 그리고 두번째 절기는 시내산아래에서였다. 이때도 그들은 노래를 하면서 춤을 추면서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번제와 화목제물로 동물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 절기준수를 형식상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문제 없는 제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제사는 열납되는 제사였고 하나의 제사는 분노하는 제사가 되고 말았다.
4. 하나님께서는 어떤 예배를 받으시는가?
우리 모든 성도들은 매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해야만이 홍해를 건넌후 이스라엘 백성이 드렸던 예배를 우리도 드릴 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수가성여인에게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실 때에 들려주신 말씀 속에 나와 있다. 그것은 3가지였다. 첫째는 영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며(요4:24), 둘째는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며(요4:24), 마지막으로 셋째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요4:23~24).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첫번째 예배는 이 3가지 조건을 충족시켰다. 하지만 두번째 예배는 이 3가지 요소중 단 한 가지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절기축제예배가 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던 가짜 예배가 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참된 예배는 "영 안에서" 드린 예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번째 예배는 영 안에 드리는 참된 경배가 되었지만, 두번째 예배는 육체로 드린 형식적인 경배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이다. 사실 홍해를 건넌 후 에담광야에서 드렸던 절기예배는 영안에서 드린 경배행위였다. 그들은 자기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출한 뒤,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주셨고, 이제는 홍해를 건너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노예로 부리던 애굽군대를 수장시킴으로서 자유민이 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경배를 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물건이나 대상 앞에 했던 경배행위가 아니었다. 그들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드린 경배행위였던 것이다. 하지만 두번째 시내산아래에서의 경배행위는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직접 자신의 몸을 굽혀 경배를 드린 육적 경배 행위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절대 하지 말라고 한 첫째계명과 둘째계명을 정면으로 어긴 것으로 참담한 우상숭배행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출20:22~24). 그랬다. 그때 그들은 송아지형상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만들어놓고는, 그것 앞에 자신의 몸을 직접 굽혀 경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러한 가증한 경배행위를 받지 않으신 것이다.
둘째, 참된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린 예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번째 예배는 자기를 구출해주신 여호와께서 누군지를 정확히 알고 드린는 경배행위였다. 그분은 홀로 존재하시는 분이지만 전능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해내신 구원자이시며, 애굽군대와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시는 심판주라는 사실을 정확이 알고서 그러한 실제 사실에 근거하여 예배를 드린 것이다. 하지만 두번째 예배는 달랐다. 모세가 율법의 두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 없었기에 불안해진 그들은 송아지우상을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하나님이라고 만들어놓고는 위안을 삼고자 금덩어리 앞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덩어리를 경배한들 금덩어리가 그들에게 복을 주고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것은 금덩어리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는 물건인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도 어리석은 짓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금귀고리를 녹여서 그리고 그것을 깎아서 송아지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더러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하나님이라고 정하고고는 그것을 섬겼던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우상에게 경배를 드린 것이다(사2:8~9, 시115:4~8). 그러니 두번째 경배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셋째, 참된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여" 드린 예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절기예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만족을 위해 드린 예배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 나니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고 소고를 치며 춤을 추지 아니할 수가 없었기에 감사의 절기를 지켰던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절기는 달랐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기에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우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더러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그 신은 황소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황소를 바라보며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날뛰며 광란의 춤을 춘 것이다. 자기가 술먹고 자기의 흥에 겨워 황소신을 만들어놓고 그것에게 경배하고 술을 먹고 춤을 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지금 이러한 행위는 누구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행하는 행동인가? 다 자기의 기분 때문에,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행하고 있는 행동들이 아닌가? 그러니 이것은 예배가 아니었다. 자기도취요 자기만족을 위한 광란의 행동이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5. 시내산 아래에서 저지른 우상숭배행위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첫번째 절기예배는 정말 영 안에서 그리고 실제로 그들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셨던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감사했다. 하지만 시내산 아래에서 지켰던 두번째 절기예배는 그렇지 않았다. 보이는 신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자신의 허리를 굽혀 경배했다. 그리고 그 신이 어떤 신이든 상관이 없이 자기가 직접 눈으로 보고 절할 수 있고 빌 수 있는 대상이면 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행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자 만들어낸 광란의 춤사위였다. 그러니 하나님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미 그들에게 십계명으로 당부했고 또한 한 번 더 언급하고 그렇게 당부하고 당부했건만 그들은 거짓된 경배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결국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 광경을 보고서 가지고 온 십계명의 두 돌판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송아지우상을 빻아서 물에 타서 그들이 먹게 하였고,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하여 칼을 차고 자기백성을 죽였으니 그날 무려 3천명이나 처참하게 죽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했다. 천사가 안내해줄 것이니 그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땅에 들어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당신은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했다. 같이 동행했다가는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고 하셨다. 얼마나 민망하든지, 이 이야기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몸에 치장했던 모든 장신구(귀고리, 코고리, 손목고리, 목걸이 등)을 떼어내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생명을 건 기도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 몰살당하지 아니했지만 그들의 우상숭배행위는 그 뒤로로 그치지 않았다. 결국 우상숭배에 참여했던 출애굽 1세대들은 거의가 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예배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예배를 잘못 드린 결과는 이처럼 참담하기만 했던 것이다.
6. 나오며
이 세상의 종교들은 다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신을 숭배한다. 이슬람도 알라신을 향하여 성지방향으로 몸을 돌려 굽혀 절한다. 불교도 불상에게 절을 한다. 그리고 유교인들도 자기의 조상들에게 절을 하며 제사한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육체를 사용해 절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예배는 영으로 행하는 경배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대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행하시고 있는 그분을 예배한다. 그리고 나의 만족과 위안을 위해 나 자신이 신을 섬기는 방법을 만들어서 경배하는 법이 없다. 만약 그렇게 행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경배해야 한다. 그것이 오직 살아있는 분에 대한 참된 예배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10월 14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