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한국교회를 향하여 이 세대에 가장 늦게 복음을 받았다고 얕볼 수가 있을까? 한국교회는 가장 늦게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유사 이래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루었고 가장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백성이 되었다. 그러니 오늘날의 영적인 세계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영적인 주도권을 한국교회에게 맡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도 이 놀라운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큰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촛대를 어떻게 하시겠는가? 여기,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들려주는 놀라운 영적 사명의 세계로 여러분을 안내하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경륜상 어느 시대쯤 되는 것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란 이미 시작되었다(요일2:18). 그런데 정말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일보직전의 순간은 대체 언제일까? 주님께서는 어느날 제자들에게 당신이 재림할 때의 징조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그것은 무화과나무에서 싹이 날 때면 인자가 문 앞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24:32~33). 여기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이것을 대부분 '이스라엘'로 본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에서 싹이 나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날이 1948년 5월 14일이었으니, 74년이나 지난 셈이다. 그러니 그 때가 가까웠다. 그런데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 복음이 들어온지 약 130년이 지났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영성이 예사롭지 않다. 몇 십년전만해도 우리는 미국의 영성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24장로들이 누구며, 144,000명의 자리에 누가 앉아있는지를 보고올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도 미쳐 간과하고 말았던 회개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어 천국에 입성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주어진 한국교회의 과제는 무엇이며, 주어진 과제를 우리는 어떻게 완성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이것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께서 들려주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왜 누구에게 들려주신 것인가?
예수께서는 이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여러가지 천국비유를 말씀해주셨다. 그것들 중에서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천국비유가 있다. 그것은 마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다(마20:1~16). 이 비유는 예수께서 왜 누구에게 들려주신 비유인가? 이 비유의 시작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9장에서 말씀하고 있던 어떤 이야기의 이유를 설명하고자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보좌에 앉아 왕노릇하실 때에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제자들도 12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 외에도 자기의 집이나 형제자매, 부모나 자식, 전토를 버린 자들도 역시 100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받지 못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처음의 사람들이 맨나중의 사람들로 있을 것이고, 맨 나중의 사람들이 처음의 사람들로 있을 자도 많을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처음의 사람들이 맨나중이 되고, 맨나중의 사람들이 처음이 되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당신의 제자들에게 비유로 설명해주셨다. 이것이 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라는 것이다.
3.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포도 수확철에 어느 포도원 주인에게 고용된 품꾼들이 일을 마치고 품삯을 받는 것에 대한 비유다. 그런데 품삯에 대해서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른 아침(오전6시)에 고용되어 하루 종일 일을 했던 품꾼(일꾼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포도원 주인과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합의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였다. 그리고 오후6시가 되어 일을 마쳤는데, 그들에게도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주자 그가 강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늦게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했던 다른 네 부류의 품꾼들(오전9시, 12시, 오후3시, 오후5시)에게도 주인이 동일한 한 데나리온으로 품삯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른 아침에 온 자들의 한 품꾼이 따지며 말했다. "맨나중의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했는데도 어찌 당신은 그들을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뎠던 우리와 같게 하셨나이까?(마20:12)" 그렇다면, 이 품꾼의 주장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주인은 정말 불공평한 사람인가? 그런데 이 비유의 끝에 결론적으로 들려주신 말씀은 이 품꾼의 불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준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맨나중(마지막)의 사람들이 처음의 사람들이 될 것이며 처음의 사람들이 맨나중의 사람들이 될 것이다"(마20:16).
4. 주인은 맨나중에 들어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했던 품꾼들까지 왜 다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인가?
우리는 이 포도원의 주인이 다른 주인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자기의 포도원에 들어와 일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부다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오전6시)에 고용한 사람에게는 하루치의 일당 곧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들여보냈었다. 그리고 오전9시나 12시, 오후3시에 들여보낸 자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고, 다만 상당하게(정당하게, 합당하게, 의롭게) 준다고만 말했었다. 그리고 이제 한 시간밖에 일할 시간이 없었을 때에 고용된 자들에게는 그냥 자기의 포도원에 들어가거 일하라고만 말했었다. 또 하나는 오후6시가 되어 품삯을 줄 때에 먼저 들어온 자부터 품삯을 준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온 자(오후5시에 들어온 자)부터 품삯을 주게 했다는 것이다. 만약 일반적으로 먼저 온 자부터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친다면, 이른 아침에 와서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아간 자들은 주인에게 전혀 불평하지 않고 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혹시 주인이 자신들이 시간때우기식으로 일하였던 부분을 놓치지 않고 말하면서 한 데나리온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주인이 그들이 어떻게 일했는지에 관하여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정확히 한 데나리온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떠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이 품삯을 거꾸로 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것은 주인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간 것임을 짐직할 수 있다. 그럼 왜 주인은 청지기에게 맨나중에 온 자들부터 품삯을 주게 했던 것일까?
5. 주인은 아침 일찍 들어온 품꾼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인가?
주인이 분명 맨나중에 온 자들로부터 품삯을 주되 처음 온 자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은 의도적이었다. 그것은 처음 온 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인의 마음과 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악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첫째, 처음 온 자들은 자기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자들이었던 것이지 자기에게 한 데나리온만을 준다고 불평해서는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이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지 그들의 노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아침에 시장에 나가 그들을 고용했을 때에 주인은 그들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한 상태에서 그들을 데리고 왔었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들이 비록 적당히 일하고 때로는 시간 때우기식으로 일하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일을 대충대충하고 있던 대로 그들에게 품삯을 줄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이른 아침에 온 자들을 둘로 나누어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일한 사람에게는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지만, 대충대충 농땡이하면서 일한 사람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음날 그 주인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은 적당히 때우는 자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 데나리온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인은 당신의 신실성에 근거하여 그들에게도 다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자기들이 신실하지 않았음에도 한 데나리온을 준 주인에게 감사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받은 돈을 내동댕이 쳐버리고는(14절) 주인에게 따지듯 말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맨나중에 들어온 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주인을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고 칭찬하고 높였어야 했다. 왜냐하면 주인은 매우 긍휼이 풍성한 주인이었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한 것이었으며, 또한 자기들이 맨나중에 선택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가정해본다면 응당 그렇게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6.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깨우쳐주고 싶은 것이었는가?
이 비유는 사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3가지를 말씀하시려고 들려주신 비유다.
첫째는 주인되신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심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만약 이 주인이 긍휼이 많은 주인이 아니었다면 주인은 결단코 나중에 들어온 자들에게 하루 일당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은 긍휼이 많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우하려고 하는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인의 눈에는 모두가 다 주인이 고용해주지 않으면 저녁에 빈털털이로 집에 돌아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포도원을 위해 필요한 일꾼으로 먼저 뽑혔느냐 아니면 아니면 나중에 뽑혔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3과 6절에 나와 있다. 여기에 보면 나중에 들어온 일꾼들이 처음 뽑힌 자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뽑힌 자들은 처음 뽑힌 자들보다 힘이 없거나 어딘가 보기에 모자라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헬라어원문에 보면 나온다. 여기에 '다른'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때 '다른'은 '전혀 종류가 다른'이라는 단어('헤테로스')가 쓰이지 않았고,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단어('알로스')가 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날 이른 아침 먼저 고용된 사람은 그가 잘나고 힘있고 건강해보여서 먼저 뽑힌 것이 아니었다. 단지 주인에게 먼저 뽑힌 것 뿐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그날 거기 시장 10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치자, 주인이 필요로 하는 인원은 총 10명이었는데, 이른 아침에 뽑힌 그 10명은 단지 그 10명 안에 우선 들어갔던 것 뿐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주인의 일을 맡아 수고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자신이 가장 먼저 선택을 받았든지 아니면 맨 나중에 받았든지, 주인이 자신을 불러서 일을 맡겨주신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이 먼저 부름받았으니 자신은 특별한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인은 매우 공평하신 분이어서 오후 늦게까지 주인의 선택을 받지 못해 서성이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이른 아침에 뽑힌 자가 거꾸로 그날 주인으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해 오후5시까지 거기에 서성이고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오후5시에 온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처음 왔던 자들이 맨나중에 들어와서 일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은 얼마나 게으르고 나태했는지를 깨닫고, 더욱더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자신을 선택해준 주인에게 감사하고, 그나마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더욱 충성하라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오후5시에 들어온 자들에게 왜 주인은 하루의 1/12밖에 일하지 않았음에도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오후5시에 들어온 자들은 정말 주인이 자신들을 불러주신 것만해도 감사했을 것이다. 만약 그들도 그날 아침부터 뽑혀서 일을 하게 되었다면 그는 아마도 쌀 한 포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중에 주인이 일하게 해 주어서 집에 돌아갈 때에는 쌀 한 됫박이라고 들고갈 수 있게 되었기에 그들도 역시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니 다음 번에는 주인에게 이른 아침부터 선택받을 수 있도록 그날에 그들은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들은 주인이 그날 자기를 늦게나마 선택해주신 것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비록 이른 아침부터 선택을 받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을 만나게 되면 열심히 일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자신을 불러준 주인을 만났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더 열심히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주인이 그들의 열심을 보고는 그들에게 하루 품삯의 1/12의 데나리온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열심을 보고서 처음 온 자들과 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을 것이다.
7. 이 마지막 시대에 주어진 한국교회의 사명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이 시대에 맨 마지막으로 불러 쓰시는 주님의 사명자로서, 복음사역자의 마지막 주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많은 은혜를 한국교회에서 부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사실 1~2대만 위로 올라가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지도 모른채, 온갖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던 저주받은 백성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이 땅에 선교사를 보내주셨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그렇게 해서 받은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이전에 그렇게 찾고 싶었던 신(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참으로 열심이었다. 다른 민족은 전혀 하지 않는 일들을 감당해왔다. 매일 새벽마다 새벽기도회를 가졌고,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날짜를 정하여 기도하는 백성이 되었다. 그리고 주일에도 하루에 두 번씩이나 예배드리는 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늦게 믿었어도 전세계에서 선교사를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오후5시에 부름받은 한국백성을 보시고 매우 기특해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영적인 최고의 거성들이 한국에 많이 있다. 그리고 회개와 천국복음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산출해내는 교회들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교회의 사명은 매우 막중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토록 놀라운 영적인 비밀과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일찍 포도원에 들어왔다가 적당히 시간만 때우다 갔던 품꾼들처럼 뜨뜻미지근하게 사명을 감당하면 되겠는가? 우리 민족이 늦게 부름받은 만큼 세상 어떤 교회도 감당하지 못했던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늦게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하염 없는 긍휼과 은총을 베풀어주신 주님께 우리는 진실로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을 듣고서도 게을러 적당히 안주하려는 성도가 있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처음 주님이 선택했던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께서 버리셨는데, 나중에 잠깐 일하게 하려고 부른 이방민족이 만약 게으르거나 적당하게 일을 하면 얼마나 더 토해버리실 것인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심을 내자.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보자.
8. 나오며
포도원 품꾼(일꾼)의 비유가 이토록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주는 비유였는지를 이전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에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을 무슨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자신이 특별대우를 받아야 할 사람처럼 착각하게 된다면, 그는 이 비유를 통해서 겸손해져야 한다. 먼저 믿었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리고 신앙을 가진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무조건 그에게 더 좋은 지위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늦게 믿은 자들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는 은혜를 주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주님의 눈에는 처음 믿는 자나 나중에 늦게 믿은 자나 그들의 충성도를 보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오후5시에 들어온 자들이었지만 적당히 한 시간만 때우고 갔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주인은 긍휼이 풍성하셔서 그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먼저 선택받은 것이나 나중에 선택받은 것이나 그것은 주인의 소관에 따른 것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불렀다고 해서 응당 큰 복을 받게 되고, 나중에 불렀다고 작은 복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언제 어느 때에 부르셨든지 관계 없이 우리는 주인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불러 쓰신 것에 감사하면서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기뻐하시고 예상 외로 놀라운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런 성도가 죽는 날에는 주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의 문까지 직접 마중을 나오시고, 또한 영광의 혼인잔치에 데리고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늦게 믿었다고 해서 무조건 특별 혜택을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늦게 믿을수록 더욱더 분발하여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 한국교회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22년 02월 06일(주일)
정병진목사
누가 한국 교회를 향하여 이 세대에 가장 늦게 복음을 받았다고 얕볼 수가 있을까? 한국 교회는 가장 늦게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유사 이래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루었고 가장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백성이 되었다. 그러니 오늘날의 영적인 세계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영적인 주도권을 한국 교회에게 맡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도 이 놀라운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큰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촛대를 어떻게 하시겠는가? 여기,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들려주는 놀라운 영적 사명의 세계로 여러분을 안내하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경륜상 어느 시대쯤 되는 것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란 이미 시작되었다(요일2:18). 그런데 정말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일보 직전의 순간은 대체 언제일까? 주님께서는 어느 날 제자들에게 당신이 재림할 때의 징조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무화과나무에서 싹이 날 때면 인자가 문 앞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24:32~33). 여기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이것을 대부분 '이스라엘'로 본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에서 싹이 나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날이 1948년 5월 14일이었으니, 74년이나 지난 셈이다. 그러니 그 때가 가까웠다. 그런데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 복음이 들어온 지 약 130년이 지났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영성이 예사롭지 않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미국의 영성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24장로들이 누구며, 144,000명의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를 보고 올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 개혁자들도 간과하고 말았던 회개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어 천국에 입성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주어진 한국 교회의 과제는 무엇이며, 주어진 과제를 우리는 어떻게 완성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이것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께서 들려주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왜 누구에게 들려주신 것인가?
예수께서는 이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여러가지 천국 비유를 말씀해 주셨다. 그것들 중에서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천국 비유가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다(마20:1~16). 이 비유는 예수께서 왜 누구에게 들려주신 비유인가? 이 비유의 시작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9장에서 말씀하고 있던 어떤 이야기의 이유를 설명하고자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보좌에 앉아 왕 노릇하실 때에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제자들도 12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 외에도 자기의 집이나 형제자매, 부모나 자식, 전토를 버린 자들도 역시 100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받지 못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처음의 사람들이 맨 나중의 사람들로 있을 것이고, 맨 나중의 사람들이 처음의 사람들로 있을 자도 많을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처음의 사람들이 맨 나중이 되고, 맨 나중의 사람들이 처음이 되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당신의 제자들에게 비유로 설명해 주셨다. 이것이 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라는 것이다.
3.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포도 수확철에 어느 포도원 주인에게 고용된 품꾼들이 일을 마치고 품삯을 받는 것에 대한 비유다. 그런데 품삯에 대해서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른 아침(오전6시)에 고용되어 하루 종일 일을 했던 품꾼(일꾼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포도원 주인과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합의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였다. 그리고 오후6시가 되어 일을 마쳤는데, 그들에게도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주자 강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보다 늦게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했던 다른 네 부류의 품꾼들(오전9시, 12시, 오후3시, 오후5시)에게도 주인이 동일한 한 데나리온으로 품삯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른 아침에 온 자들 중의 한 품꾼이 따지며 말했다. "맨 나중의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했는데도 어찌 당신은 그들을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뎠던 우리와 같게 하셨나이까?(마20:12)" 그렇다면, 이 품꾼의 주장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주인은 정말 불공평한 사람인가? 그런데 이 비유의 끝에 결론적으로 들려주신 말씀은 이 품꾼의 불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 준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맨 나중(마지막)의 사람들이 처음의 사람들이 될 것이며 처음의 사람들이 맨 나중의 사람들이 될 것이다(마20:16)".
4. 주인은 맨 나중에 들어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했던 품꾼들까지 왜 다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인가?
우리는 이 포도원의 주인이 다른 주인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자기의 포도원에 들어와 일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부다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오전6시)에 고용한 사람에게는 하루치의 일당 곧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들여보냈었다. 그리고 오전9시나 12시, 오후3시에 들여보낸 자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고, 다만 상당하게(정당하게, 합당하게, 의롭게) 준다고만 말했었다. 그리고 이제 한 시간밖에 일할 시간이 없었을 때에 고용된 자들에게는 그냥 자기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만 말했었다. 또 하나는 오후6시가 되어 품삯을 줄 때에 먼저 들어온 자부터 품삯을 준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온 자(오후5시에 들어온 자)부터 품삯을 주게 했다는 것이다. 만약 일반적으로 먼저 온 자부터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친다면, 이른 아침에 와서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아간 자들은 주인에게 전혀 불평하지 않고 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혹시 주인이 자신들이 시간 때우기식으로 일하였던 부분을 놓치지 않고 말하면서 한 데나리온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주인이 그들이 어떻게 일했는지에 관하여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확히 한 데나리온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떠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이 품삯을 거꾸로 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것은 주인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간 것임을 짐직할 수 있다. 그럼 왜 주인은 청지기에게 맨 나중에 온 자들부터 품삯을 주게 했던 것일까?
5. 주인은 아침 일찍 들어온 품꾼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인가?
주인이 분명 맨 나중에 온 자들로부터 품삯을 주되 처음 온 자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은 의도적이었다. 그것은 처음 온 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인의 마음과 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악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첫째, 처음 온 자들은 자기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자들이었던 것이지 자기에게 한 데나리온만을 준다고 불평해서는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이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주인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지 그들의 노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아침에 시장에 나가 그들을 고용했을 때에 주인은 그들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한 상태에서 그들을 데리고 왔었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들이 비록 적당히 일하고 때로는 시간 때우기식으로 일하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일을 대충대충하고 있던 대로 그들에게 품삯을 줄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이른 아침에 온 자들을 둘로 나누어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일한 사람에게는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지만, 대충대충 농땡이를 치면서 일한 사람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음 날 그 주인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은 적당히 때우는 자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 데나리온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인은 당신의 신실성에 근거하여 그들에게도 다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자기들이 신실하지 않았음에도 한 데나리온을 준 주인에게 감사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받은 돈을 내동댕이 쳐버리고는(14절) 주인에게 따지듯 말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맨 나중에 들어온 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주인을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고 칭찬하고 높였어야 했다. 왜냐하면 주인은 매우 긍휼이 풍성한 주인이었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한 것이었으며, 또한 자기들이 맨 나중에 선택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가정해 본다면 응당 그렇게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6.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고 싶은 것이었는가?
이 비유는 사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3가지를 말씀하시려고 들려주신 비유다.
첫째는 주인되신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심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만약 이 주인이 긍휼이 많은 주인이 아니었다면 주인은 결단코 나중에 들어온 자들에게 하루 일당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은 긍휼이 많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우하려고 하는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인의 눈에는 모두가 다 주인이 고용해 주지 않으면 저녁에 빈털터리로 집에 돌아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포도원을 위해 필요한 일꾼으로 먼저 뽑혔느냐 아니면 나중에 뽑혔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3절과 6절에 나와 있다. 여기에 보면 나중에 들어온 일꾼들이 처음 뽑힌 자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뽑힌 자들은 처음 뽑힌 자들보다 힘이 없거나 어딘가 보기에 모자라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헬라어 원문을 보면 나온다. 여기에 '다른'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때 '다른'은 '전혀 종류가 다른'이라는 단어('헤테로스')가 쓰이지 않았고,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단어('알로스')가 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날 이른 아침 먼저 고용된 사람은 그가 잘나고 힘있고 건강해 보여서 먼저 뽑힌 것이 아니었다. 단지 주인에게 먼저 뽑힌 것 뿐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그날 거기 시장에 10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치자, 주인이 필요로 하는 인원은 총 10명이었는데, 이른 아침에 뽑힌 그 10명은 단지 그 10명 안에 우선 들어갔던 것 뿐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주인의 일을 맡아 수고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자신이 가장 먼저 선택을 받았든지 아니면 맨 나중에 선택을 받았든지, 주인이 자신을 불러서 일을 맡겨주신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이 먼저 부름받았으니 자신은 특별한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인은 매우 공평하신 분이어서 오후 늦게까지 주인의 선택을 받지 못해 서성이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이른 아침에 뽑힌 자가 거꾸로 그날 주인으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해 오후5시까지 거기에 서성이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오후5시에 온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처음 왔던 자들이 맨 나중에 들어와서 일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은 얼마나 게으르고 나태했는지를 깨닫고, 더욱더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자신을 선택해 준 주인에게 감사하고, 그나마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더욱 충성하라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오후5시에 들어온 자들에게 왜 주인은 하루의 1/12밖에 일하지 않았음에도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오후5시에 들어온 자들은 정말 주인이 자신들을 불러 주신 것만 해도 감사했을 것이다. 만약 그들도 그날 아침부터 뽑혀서 일을 하게 되었다면 그는 아마도 쌀 한 포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중에 주인이 일하게 해 주어서 집에 돌아갈 때에는 쌀 한 됫박이라도 들고 갈 수 있게 되었기에 그들도 역시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니 다음 번에는 주인에게 이른 아침부터 선택받을 수 있도록 그날에 그들은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들은 주인이 그날 자기를 늦게나마 선택해 주신 것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비록 이른 아침부터 선택을 받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을 만나게 되면 열심히 일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자신을 불러 준 주인을 만났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더 열심히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주인이 그들의 열심을 보고는 그들에게 하루 품삯의 1/12의 데나리온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열심을 보고서 처음 온 자들과 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을 것이다.
7. 이 마지막 시대에 주어진 한국 교회의 사명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지금 한국 교회는 이 시대에 맨 마지막으로 불러 쓰시는 주님의 사명자로서, 복음 사역자의 마지막 주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많은 은혜를 한국 교회에 부어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사실 1~2대만 위로 올라가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지도 모른 채, 온갖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던 저주받은 백성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이 땅에 선교사를 보내 주셨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그렇게 해서 받은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이전에 그렇게 찾고 싶었던 신(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참으로 열심이었다. 다른 민족은 전혀 하지 않는 일들을 감당해 왔다. 매일 새벽마다 새벽 기도회를 가졌고,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날짜를 정하여 기도하는 백성이 되었다. 그리고 주일에도 하루에 두 번씩이나 예배드리는 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늦게 믿었어도 전 세계에서 선교사를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오후5시에 부름받은 한국 백성을 보시고 매우 기특해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영적인 최고의 거성들이 한국에 많이 있다. 그리고 회개와 천국 복음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산출해 내는 교회들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 교회의 사명은 매우 막중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토록 놀라운 영적인 비밀과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일찍 포도원에 들어왔다가 적당히 시간만 때우다 갔던 품꾼들처럼 뜨뜻미지근하게 사명을 감당하면 되겠는가? 우리 민족이 늦게 부름받은 만큼 세상 어떤 교회도 감당하지 못했던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늦게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하염없는 긍휼과 은총을 베풀어 주신 주님께 우리는 진실로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을 듣고서도 게을러 적당히 안주하려는 성도가 있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처음 주님이 선택했던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께서 버리셨는데, 나중에 잠깐 일하게 하려고 부른 이방 민족이 만약 게으르거나 적당하게 일을 하면 얼마나 더 토해버리실 것인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심을 내자.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 보자.
8. 나오며
포도원 품꾼(일꾼)의 비유가 이토록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 주는 비유였는지를 이전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에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을 무슨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할 사람처럼 착각하게 된다면, 그는 이 비유를 통해서 겸손해져야 한다. 먼저 믿었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리고 신앙을 가진 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무조건 그에게 더 좋은 지위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늦게 믿은 자들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는 은혜를 주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주님의 눈에는 처음 믿는 자나 나중에 늦게 믿은 자나 그들의 충성도를 보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오후5시에 들어온 자들이었지만 적당히 한 시간만 때우고 갔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도 주인은 긍휼이 풍성하셔서 그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먼저 선택받은 것이나 나중에 선택받은 것이나 그것은 주인의 소관에 따른 것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불렀다고 해서 응당 큰 복을 받게 되고, 나중에 불렀다고 작은 복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언제 어느 때에 부르셨든지 관계없이 우리는 주인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불러 쓰신 것에 감사하면서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기뻐하시고 예상외로 놀라운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런 성도가 죽는 날에는 주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의 문까지 직접 마중을 나오시고, 또한 영광의 혼인 잔치에 데리고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늦게 믿었다고 해서 무조건 특별 혜택을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늦게 믿을수록 더욱더 분발하여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 한국 교회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22년 02월 06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