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2가지다. 그것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미 예정된 자를 사명자로 부르시는 경우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어떤 부르심으로 부름을 받았든지 그에게는 이미 하늘에 상이 준비된 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늘의 부르심에 반응하느냐에 따라 원래 예정된 상보다 더 큰 상을 받을 수도 있고, 그것보다 못한 상을 받을 수도 있으며, 아니 그 상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럼 대체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여기 주님의 놀라운 말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불러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과연 어떻게 부르시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과연 어떤 사람을 불러 사용하시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 부르심에 응하는 자에게 주께서 주실 축복은 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오늘은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첫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시어 일하게 하시는데, 그 모습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부르심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축복을 찾아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어떤 부르심으로 불러내시는가?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쓰시고자 하는 사람을 특별히 불러 당신의 종으로 사용하시는 부르심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한 마디로 '사명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위하여 아예 어떤 사람을 지명하여 불러서 사용하시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의 형제이다. 사실 예수님의 12제자 치고 스스로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한 제자는 하나도 없었다. 다 예수님께서 지명하여 불러서 제자가 된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부르실 때에는 직접 부르시거나 아니면 간접적인 방식으로 불러내시기도 한다. 그런데 또 하나의 부르심이 있다. 그것은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자들로 부르시는 부르심이 있다. 하늘의 부르심의 분깃에 동참하여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예는 히브리서 3장에 나온다.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거룩한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들 대부분이 두 번째 부르심에 동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히3:1).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를 사명자로 부르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게 하는 방식으로 또한 우리를 불러내시는 것이다.
3. 나는 어떤 부르심으로 부름을 받았을까?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아니면 하늘의 부르심에 동참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스스로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살아생전에 그 사람에게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은 우리가 결정할 소관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와 같으신 분이다(롬9:21). 그래서 토기장이인 그분이 우리를 어떤 그릇으로 쓰실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러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신이 어떤 부르심으로 부름을 받았든지 2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주님께서 어떤 그릇으로 사용하시든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딤후2:20~21).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그렇게 하는 자에게 하늘에서 이미 예비된 채 있는 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명자로 쓰시기 위해 부르시는 자는 대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대부분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를 불러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자를 주님께서는 사명자로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날 때에 육체는 자신의 부모로부터 유전자가 새로 조합된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부모의 특성들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사람은 육체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 영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영은 어떻게 그 사람 속에 들어가게 되는가? 영안을 열어서 보면, 사람은 엄마의 뱃속에서 약 2~3개월 정도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영을 그 아이에게 집어넣어 주신다. 그런데 이때 보내시는 영은 천국의 낙원에 있는 영혼을 보내신다. 그래서 천국에서 자라고 있던 영혼이 엄마의 태중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는 갓난아이부터 시작하여 약 15~16세된 정도의 영혼이 들어간다. 만약 그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명자로 이 땅에 보내어졌다면, 그는 적어도 영의 나이가 7~8세는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이끌고 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영적으로 성숙한 나이였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그가 가진 삶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영적으로 아주 어린아이는 늘 투정부리고 짜증내고 환경에 따라 마음과 신앙이 요동을 친다. 하지만 영적으로 성숙해서 이 땅에 보내어진 자는 결코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간다. 누가 시켜서 일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끝까지 충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죽는 것을 사명으로 안다. 참고로, 사람의 영의 나이는 보통 20년에 1살 정도가 올라가며, 일평생에 1살도 못 먹고 죽는 사람도 있으며, 개중에는 1년에 두 살까지 먹는 사람도 있다.
5.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을 불러내시며 또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자로 쓰시는가?
주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을 불러내어 사용하시며 또한 누구에게 하늘의 부르심에 동참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우를 보니, 2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를 불러내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게으른 자를 당신의 사명자로 사용하시지 않는다. 먼저 베드로와 안드레의 경우를 보라. 그들은 열심히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에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를 보라.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배에서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그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래도 게으른 자보다는 부지런한 자,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를 불러서 사용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을 보라. 기드온은 타작마당에서 타작하고 있을 때,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에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마태는 세관에 앉아 일하고 있을 때에 부름을 받았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예정하시어 이 땅에 보내신 자를 불러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우연히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신 것이 아니며, 우연히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내신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사용하시기 위해 어느 집에 어느 자궁에 태어나게 하시었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들을 찾아가서 불러내신 것이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쓰실 때 이렇게 예정되고 준비된 영혼을 불러서 사용하셨다는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왕정 시대의 최초의 왕으로 세우신 사울왕 때를 보자. 그가 그만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의 길로 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집에 장차 왕으로서 이스라엘 나라를 반듯하게 세울 영혼을 보내셨다. 그는 바로 '다윗'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윗이 15세 정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서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 처음에는 이새의 첫째 아들이 바로 그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중심'이란 '영'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을 선택하여 그에게 준비된 영을 집어넣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때가 되자 불러내신 것이다. 이러한 예는 사무엘 선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엘리 제사장 가문이 타락하여 더 이상 그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장차 사사 시대를 끝내고 왕정 시대를 이끌어 갈 사람에게 기름붓게 하기 위하여 선지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자 했다. 누구에게 그 영혼을 보내실까 생각하실 때에 성막에 나와 부르짖어 기도하는 한 여인을 보셨다. 아들을 낳지 못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었다. 만약 아들을 주시면 그를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여인의 태에 그 영을 보내셨다. 그가 바로 '사무엘'이다. 엄마의 기도는 영이 훌륭한 사람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6. 주님이 부르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느 날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즉시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적미적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때가 찼기 때문에 그때 그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가 아직 차기 전인데 그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일을 통하여, 다른 주님의 종들을 통하여, 듣고 있는 설교 말씀을 통하여,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므로 그때가 되었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뒤로 미뤄서는 아니 된다. 즉시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랬으며,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다(마4:20,22).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는 어떤 이유를 대면서 그 부르심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영혼과 미래에 손해가 될 뿐이다. 우리는 즉시 응답해야 한다. 예를 들어,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떤 상황에서 부르심을 받았는가? 베드로는 이제 그 집안의 가장이었다. 결혼도 했고 장모님과도 함께 살고 있었다. 부양할 가족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손에 그 집안의 생계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시더니 자기와 자기의 동생 안드레를 쓰시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대답했겠는가? 아마 이랬을 것이다. "주님, 저는 한 가족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시려면 저만 불러서 사용하시든지, 아니면 제 동생만 부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둘이 다 주님을 따라간다면 누가 제 가족을 부양합니까? 그리고 저와 제 동생은 어부가 평생 직업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사용하시려면 좀 배운 자를 사용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정식으로 학교도 다니지 않았고 율법 교육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습니다. 좀 학식있고 율법을 잘 아는 자를 불러서 사용하시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즉시 자신의 생업을 버린 채 주님을 따라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어떠했는가? 그들에게는 늙으신 아버지가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와 배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가정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신가? 그건 아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을 불러내신 것은 가족을 책임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은 없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불러 사용하시려는 것은 하늘에 속한 특별한 뜻으로서 우리가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사역이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르시는가?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부르시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하늘나라의 귀한 사역을 위해 특별히 쓰실 일이 있어서 부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목적으로 우리를 이 땅에 내려보내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지어서 이 땅의 어느 시대에, 어느 가정에, 어떤 은사와 달란트를 주어서 보낼 것인지를 그분이 결정하셔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계획과 목적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그분이 부르실 때에 즉시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늘에서 우리가 누릴 최고의 복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자신의 가족을 내팽개치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에 따라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러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위한 새로운 길을 마련해 놓으시고 또한 책임도 져 주심을 믿으라. 그럼, 베드로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를 불렀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다(마4:19). 이는 결국 천국복음을 전파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불러내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예수께서 먼저 시범을 보이셨다. 그분이 먼저 갈릴리에 다니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외치셨던 것이다(마4:17). 그리고 첫 네 명의 제자들을 차례대로 불러내시고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들에게 영혼을 낚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그것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되 두 가지 것을 병행하는 방식이었다(마4:23). 하나는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사역이었다. 다시 말해 천국의 중요성과 회개의 중요성을 모르는 자에게 그것을 말씀으로 풀어주는 일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병든 자를 치료하고 귀신들린 자로부터 귀신을 제거해 주시는 일을 하셨다. 사실 불신자들에게 천국은 그리 큰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어 가난과 질병과 저주로부터 사람들을 건져주셨다. 그러자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이 예수님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입을 열어 그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국을 소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첫 제자를 불러내신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사역을 잇게 하시기 위함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동탄명성교회에게 회개와 천국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인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탄명성교회는 지금까지 약 9년 동안 회개와 천국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여 왔으며, 함께 회개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료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계속 지속해 온 것이다.
8. 하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그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마19:27~29). 우리는 그동안 여러 시간을 통하여 천국에서 성도들이 누리게 될 지위와 영광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은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 중에 왕 노릇하고 다스리는 자가 있으며, 또한 섬기는 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주님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왕 노릇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사명자일수록 강도 높은 수준의 순종을 요구하신다. 특히 주님의 특별한 사명자일수록 그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오도록 요구하신다. 그리고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주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마16:24~25).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만큼 천국에서 누릴 영광과 지위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니 그럴 목적으로 이 땅에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몸소 먼저 실천해 보이셨다(마16:21). 그분은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고생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고난도 받으셨으며 목숨까지 다 내어놓으셨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사역자들 또한 다 그 길을 걸어갔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사도 바울은 말한다. 사람들이 앞으로 나의 앞길에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받은 사명 곧 주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행20:22~24). 그런데 지금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천국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70줄의 144,000명의 이기는 자들 중에 각각 제1번 줄의 보좌에 앉아 있으며, 신구약 성도들을 대표하는 24장로들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갔던 12제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베드로는 70줄 가운데 제1번 줄에 들어갔고 24장로에도 들어갔다. 그리고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왕 노릇하는 3~6번 줄에 들어갔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예정하심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12제자들 중에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성밖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적어도 3명의 제자들(OOO와 OOOO와 OOO)은 6번 줄에 들지 못했다. 그것은 자유 의지를 가진 우리의 몫인 것이다. 주님은 분명 12명의 제자들을 다 왕 노릇하는 자로 예정하셔서 이 땅에 보내셨지만, 그중에 한 명은 더 높은 반열에 들어갔고, 2명은 왕 노릇하는 반열에서 밀려났으며, 1명은 아예 성밖으로 내어 쫓겨났으며, 1명은 제자의 반열에 새로이 들어왔다.
9. 나오며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든지 아니면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하늘의 분깃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충성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미 하늘에 예정된 채 있는 우리가 받을 복을 받는 비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의 때에 우리를 찾아 불러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이 된다면 그때 가서 순종하겠다고 응답하지 말라. 그 자리와 복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지금 이 메시지를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마도 하늘에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 자가 틀림없다. 최소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나 이러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의 예로,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다가 세웠던 빌립보 교회에서 자신의 선교 사역을 도와 헌신했던 두 여인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두 여인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빌4:3). 그런데 그 여인들은 바울이 편지를 쓸 무렵에는 한 마음이 되지 못한 채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한 마음으로 합하라고 권면하고 있었다. 심지어 둘이 싸우고 있는 자일진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회개를 실천하고 있고 천국복음을 증거하는데 자신의 삶을 바치는 자가 어찌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겠는가? 물론 끝까지 싸운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음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2022년 04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