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그분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대체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만 예루살렘 입성 대열에 자신도 합류할 수 있는가?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아 그동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만을 연상해왔다. 그러나 오늘은 그 옆에 있는 제자들과 무리들까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대체 이들은 어떤 이유로 예루살렘에 예수님과 함께 입성하는 영예를 안은 것인가? 그리고 이들은 장차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성도들의 어떤 예표가 되는 것인가?
1. 들어가며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다. 이유인즉 하늘의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마16:1~3).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우리는 과연 분별하고 살고 있는가? 지금 우리 시대 가운데에 커다란 2가지의 사건이 진행 중에 있다. 하나는 2020년 2월부터 코로나 전염병 사태가 터진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끝나지 않고 있다.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국가에서 경제 활동에 제제를 가하고 예배 행위를 통제함으로서, 정부가 허락한 인원수만큼 예배해야 하는 전대미문의 교회 제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에 의한 매매 행위 통제 시스템의 예행 연습 같이 보이며, 교회적으로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시험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2월 24일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전쟁을 일으켰는데, 벌써 47일째 진행 중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나 경제 제재를 위한 전쟁은 아니다. 에스겔 38~39장과 요한계시록 20:7~10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의 서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시간대의 끝부분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가 지나가면 성도들이 핍박을 당해 순교자를 배출하는 시기로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종려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오실 주님을 어떻게 준비하고 예비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자들은 곧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들의 예표가 되기 때문이다.
2. 초림의 예수께서는 과연 누구와 함께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셨는가?
그렇다면 초림의 예수께서는 과연 누구와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는가? 당시 예수께서 누구와 함께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는지는 공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다 나온다. 그러므로 그때의 그 모습을 보다 더 생생하고 자세하게 알 수가 있다. 종합해 보면, 그때 예루살렘 성 안에 예수님과 더불어 들어간 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볼 수 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의 제자들' 그룹이다.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명령을 받아 수행하고 주님을 따라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들'의 그룹이다. 이 그룹은 또다시 두 그룹로 나눠진다. 한 그룹은 저 멀리 갈릴리에서부터 그리고 예수께서 현재 계시는 벳바게에 오기 직전까지 따라온 자들이다. 특히 이들은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을 목도하여 따라온 그룹이다. 이들은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을 통해 예수께서 확실히 메시야인 것을 믿고 따라온 자들이다. 그리고 또 한 그룹이 있는데, 이들은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왔으나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무려 3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감람산의 벳바게까지 마중 나온 무리들의 그룹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그룹의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3. 왜 우리는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예수님의 동행자들을 눈여겨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루살렘 입성 기록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는 당시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에 대한 반응 기사가 하나 더 나오는 거기에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때 예수님을 환영하러 나온 무리들 중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걱정해서 말하는 장면이 있다. "선생님, 당신의 제자들을 엄히 꾸짖으소서(눅19:39)" 그럼 왜 그랬겠는가? 예수님의 주변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일들이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곧 제자들이 어린 나귀를 준비하여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깔고 예수님을 앉게 하였고, 무리들 역시 자기들의 겉옷을 예수께서 가시는 길 위에 깔아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밭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전에 올라가는 메시야의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는 예루살렘에 주둔해 있는 로마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예수님의 길을 막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이 사람들이 이때에 잠잠한다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눅19:40)" 그렇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들의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제지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들이 하는 행동을 마땅하다고 두둔하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기뻐하셨고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4. 초림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재림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초림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나 재림의 예수님의 새 예루살렘 입성은 한 가지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성에 들어가실 때에는 그 성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들만을 데리고 들어가신다는 것이다. 초림에는 자기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 제자들 및 자신을 환영하는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먼저 악의 무리들을 처단하실 것이다. 그러고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실 것이다. 그런데 이때도 역시 주님께서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이들만을 데리고 들어가실 것이다. 그런데 초림 당시에도 예수께서 성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사람들은 소수였다. 왜냐하면 당시 예루살렘 성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약 12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재림 때에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누구든지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말씀처럼 말이다. 그리고 자기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한 자들도 역시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두 사건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성 입성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다. 초림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때 데리고 들어간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지켜보고 훗날 증인이 되라고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신 후에 천국에 들어가실 때에는 그분은 이제 인류의 구원 사역을 마친 상태이기 때문에, 그분은 이제 영원히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악의 무리들을 처단한 후에, 당신을 믿고 따랐던 신실한 이들에게 상주시기 위해서 데리고 들어가실 것이다. 즉 그러한 자들이 천국에서 영원히 살도록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며, 또한 그들이 어떻게 행하였느냐에 따라 상급을 주시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시는 것이다.
5. 장차 누가 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장차 주님이 재림하셔서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사람은 대체 누군가? 그들은 바로 당시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간 자들이 예표가 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처럼 여기에 등장하는 이들이 그들과 똑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제자들 그룹이 거기에 들어갈 것이다. 이 그룹은 주님이 특별히 쓰시는 '사명자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당신이 지명하여 뽑으셨기 때문이며 순간순간마다 그들에게 특별 사명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이때 주님의 명령은 이렇다. 벳바게 건너편 마을로 가서 사거리 위 바깥쪽 문 바로 앞에 매여 있는 나귀, 그것도 아직 한 번도 사람이 타지 않았던 어린 나귀를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가는 첫 번째 그룹이다. 이들은 주님의 명령을 받고 이 땅에 파송된, 주의 종들의 그룹을 가리킨다. 이들은 그러한 일을 하도록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직 한 번도 사람을 태운 일이 없는 나귀를 찾아내어서 주님께 붙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들을 발견해 내어 주님의 새 예루살렘 입성시 가장 가까이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을 태워 드린 나귀는 때묻지 않은 신부 그룹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결한 영혼을 지켜 온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오직 그날 예수님을 당신의 등허리에 태우기 위해 준비해 온 자들이고 그날을 기다려 온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께 자신을 드리기 위해 흠없이 자신을 간수해 온 자들이다.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순결한 영혼들을 찾아내고 데려와서 주님이 다시 오실 길을 예비케 하는 것이 그 사명인 것이다.
둘째는 자기의 겉옷을 바친 그룹이 그 성에 들어갈 것이다. 이 그룹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린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주님이 가시려는 길 위에 자신의 귀한 겉옷을 기꺼이 깔아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신부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준비한 옷을 입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이라고 하셨다(계19:7~8). 그렇다. 이렇게 자기의 겉옷을 바친 그룹은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자기들의 귀로 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믿게 되었고 받아들였기에, 스스로 예수님을 선택한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위해서는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렇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의 예표는 이미 열왕기상 1장에도 등장한다. 그때 유대인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은 제일 순위는 역시 솔로몬이었다. 그런데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할 때에도 그가 왕의 노새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이야말로 다윗의 자손이었던 것이다.
셋째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노래 부르던 그룹이 그 성에 들어갈 것이다. 이 그룹에 속한 자들은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으나 드릴 것이 없던 자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들은 거기에서 그냥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던 자들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너무 늦게 예수님을 믿어서 주님을 위해서 행함의 열매들을 맺기에는 턱없이 시간이 짧았던 자들이거나, 아니면 너무 늦게 깨닫게 되어서 주님이 오실 때에 미처 자신의 행위를 드릴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이 그 순간에 주님을 환영하고 기뻐하며, 그분의 오심을 축하하고 싶어했던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길가의 밭에 있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주님을 환영한 것이다. 그것이라도 흔들며 주님을 환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밭에 있는 야생 종려나무 가지를 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려나무는 그 세기가 거의 단단한 돌과 같기 때문이다. 이 나무는 사실 도끼로 내리쳐도 도끼가 튕겨져 나가고야 마는 나무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시 어떤 연장이 없었어도 돌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잘라 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서는 손에서 피도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님 향한 환호의 마음을 아무도 식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손에도 역시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입술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즉 메시야를 환영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시편 118:25~26절의 말씀이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라고 부르면서 그들은 줄곧 3Km를 따라가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자들이 될 것이다.
6. 나오며
결국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것이 일종의 예수님의 '개선 행진'과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가 도시에 입성할 때에도 도시의 시민들이 자신의 겉옷을 깔아 장군의 전쟁 승리 소식에 기뻐하면서 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대대적으로 환영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 도시의 시민들이야 일종의 의무감에서 그렇게 한 것이며 또한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이 찬송하는 것을 결코 막지 않으셨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 그러한 자들이 결국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는 사명에 순종함으로써 그날을 잘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땅에서 주님께 자신의 순결한 영혼을 바치려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사람들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이런 자들도 역시 천국에서는 예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배하고, 또한 보좌 가까운 곳에서 더 가까이 자기의 집을 짓고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서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준비한 자들 역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거룩한 천국 예배에 참석할 것이다(계15:2). 그리고 미처 주님께 드릴 만한 행위의 열매들을 준비하지 못했어도, 자신의 온 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높여 드린 자들도 역시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사실 그날이 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그룹들 중에 과연 어떤 그룹에 속해 있는가? 이제는 이것을 자신에게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떻게 그날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물어보라.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할 일을 성령으로 가르쳐주실 때에 그 명령에 순복하자. 오, 영광스런 그날이 우리에게도 올 것이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입성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되면 우리는 자신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곧 그날이 우리에게 올 테니까...
2022년 04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