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주님께서는 왜 바울을 부르셔야 했는가?(행9:3~9)_2022-05-15(주일)
https://youtu.be/pXXxIP-g2Kc [혹은 https://tv.naver.com/v/26825920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는가? 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했는가? 그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세우셔야 했는가? 이 모든 질문의 중심에는 '천국복음'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천국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을 셋째 하늘에 있는 천국에서 살게 하시려는 계획 안에서 이 모든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인생은 '꽝'인 것이다. 인생은 의미 없음인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눅4:43). 그리고 그렇게 천국을 전하셨다(마9:35). 그리고 그 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마10:5~8). 그리고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면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하셨다(마24:14). 그런데 주님께서는 12제자들 외에 또 한 사람을 특별히 사도로 불러내셨다. 그는 바로 '사울'(장차 '바울'이라고 불리움)이라는 청년이다. 주님은 아직도 일하고 있는 12제자들 이외에 왜 또 한 사람을 불러내셔야 했던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하여 오늘날 왜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지를 면밀히 살펴보고, 이 시대에 주어진 막중한 사명을 위해 달려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사울'이라는 청년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약 4년이 지난 어느날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다메섹 도상을 걷고 있는 사울에게 찾아오셨다. 그러자 해보다 더 강력한 빛 때문에 사울일행 모두는 그만 길바닦에 넘어지고 만다. 그때 그 빛이 너무나 강렬했든지 사울은 그만 눈이 멀어버리고 만다. 대체 '사울'이라는 청년이 누구길래 주님께서는 직접 사울을 찾아오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사울'이라는 청년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 12명의 사도들이 다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부탁할 일이 있었다면 주님은 그들에게 부탁하시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왜 주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일부러 찾아가서 그에게 일을 맡기신 것인가? 그리고 그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님과 동시대의 사람이다. 아마도 예수님과 나이가 비슷하게 보인다. 처음에 그의 이름은 '사울'이라고 불려졌지만(행7:58),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는 그의 이름이 '바울'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사울'이나 '바울'은 그의 동일한 이름이지만, '사울'은 히브리식의 그의 이름이며, 바울은 헬라식 내지는 로마식의 그의 이름이다.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곧 헬라파 유대인이었다. 그의 부모는 로마의 속주인 '길리기아'의 도시 '다소'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이다(행22:3). 그리고 어릴 적에, 아마도 8~10살 무렵에 예루살렘으로 유학 보내어진 것 같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결혼한 자기의 누나가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누나 집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그가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예수믿는 사람을 매우 싫어했다. 그런 나머지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그리고 그러한 자들을 색출하여 회당에서 채찍질하는 혈기등등한 자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돌로 쳐서 죽이는 데에 가편투표를 하면서까지 열정적으로 교회를 박해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하였던 이유가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부활하지도 않은 예수를 부활했다고 믿는 이들을 가만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출세를 위하여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가만 놔두지 않았다. A.D.34년경에 그랬다.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도시에 있는 자들까지 색출하여 감옥에 넣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 사법의결기구인 산헤드린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하여 다메섹에 있는 형제들을 잡아오려고 그리로 가고 있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약 220km나 떨어진 있는 곳이었다. 얼마나 갔었을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
3. 왜 사울의 부르심은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서 사울을 부르셨는지를 그 기사를 접할 수 있다. 그것도 사도행전에 세 번씩이나 나온다(행9장,22장,26장). 첫 번째의 실제 사건을 기록한 것이고, 다음 두 번은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회고한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사울을 만난 장면이 아주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주님께서 직접 오셔서 사울을 만나셨다는 것이다(행9:3~6).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을 만나실 때에는 보통 투영체로 만나신다. 본체는 하늘에 있으면서 투영체로 오셔서 사람을 만나 대화하시고 자신을 보여주시기도 하시고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존재가 가능한 하나님으로서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의 사울을 만나실 때에는 투영체로 만나신 것이 아니었다. 직접 본체가 오셔서 만나셨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도 여호와께서 직접 본체가 오셔서 만나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그러한 경우를 보면 아브라함과 모세와 사무엘 등이다. 그러자 사울은 빛 중의 빛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의 눈이 그만 멀어버렸다. 하나님이 직접 오셨는데 육신이 그 앞에 온전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후 예수님께서 보내신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자기의 눈 속에서 [용]비늘이 벗겨지면서 시력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해 그를 왜 불러내셨는지를 알게 된다. 다메섹 도상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그가 핍박하고 있는 예수라고 그에게 말씀해 주셨고, 성 안으로 들어가면 그가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9:5~6).
그리고 또 하나의 그에게 부여하신 사명이 다른 이들보다 컸다는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다메섹 도성에서 살고 있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주님의 제자더러 그시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는 사울을 만나게 하신다. 그리고 그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를 알려주라고 하신다. 그러자 아나니아는 직가(곧은길)라는 거리에 위치한 유다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를 만나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운반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행9:15)" 그랬다. 그는 처음부터 사명 자체가 달랐다. 사명은 큰 것이다. 그는 한 부류가 아니라, 무려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리 정해진 채 이 땅에 보내어진 특별한 그릇이었기 때문이다(갈1:15~16). 그렇다. 우리 믿는 이들 중에는 어떤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는 자들이 더러 있다. 그들은 이 땅에 보내어지기 전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그를 불러내어서 당신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사울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큰 그릇으로 이 땅에 보낸 사람이었던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이미 어린양의 12사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바울을 불러서 사용하려고 하신 것인가?
우리는 사울 곧 바울에 대한 특별한 부르심에 주목해야 한다. 그 이유를 알면 우리들도 과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불러서 쓰시는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실 사울을 불러내실 때에 이 땅에는 이미 12명의 사도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도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제쳐두고 사울을 불러서 그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다. 그럼, 왜 주님은 어린양의 12사도들 외에 굳이 바울을 불러 사용했는가?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째, 바울은 유대인이라는 혈통적 그리고 태생적 한계에 갇혀 있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비록 정통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꺼리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주님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기쁨으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12사도들의 대표였던 베드로는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주님은 당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들을 주셨다(마16:19).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사는 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방인에게만큼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꺼려했다. 하지만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그는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해주었다. 이 일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보자기 환상에 잘 나온다. 그러다가 그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이자 바울이 목회자로 있던 안디옥교회에 갔을 때에, 그의 혈통적이고도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예루살렘에서 보낸 할례자들이 안디옥에 도착했다고 하자, 그만 이방인들과의 만남을 슬쩍 피해버린 것이다(갈1:12).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그는 이방인이 사는 지역에서 탄생하였기에 헬라 문화에 익숙해 있었으며, 헬라어와 로마어(라틴어)를 잘 구사할 수 있어서 이방인들과의 만남이 서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면서 이미 아버지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받았기에 어디든 여행도 자유로웠으며, 자기에 대한 송사가 발생했을 때에 로마의 황제에게 탄원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방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기에 매우 용이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배경에서 그가 태어나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또한 그는 어릴 적에 예루살렘으로 유학 가서 예루살렘에서 초등교육을 마쳤으며, 15세가 되었을 때에는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배우는 바리새파 교육을 받았다. 그때 가말리엘은 율법 해석에 있어서 유연성을 가진 힐렐 학파의 거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두 거대 학파의 흐름을 따르고 있었다. 하나는 샴마이 학파요 또 하나는 힐렐 학파였다. 샴마이 학파는 율법을 자구적으로 해석하여 문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힐렐 학파는 달랐다. 율법의 근본적인 의도와 뜻을 읽고 율법을 해석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소가 구덩이에 빠진 것을 두고, 샴마이 학파는 그냥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율법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힐렐 학파는 율법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주신 것이므로 구덩이에 빠진 소를 건져내야 한다고 해석했다. 이는 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나도 샴마이 학파에서는 안식일이니까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정말 안식일에 전쟁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말았다. 그때 힐렐 학파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도 필요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전쟁이 나더라도 무기를 들 수 있어야 한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방어용으로 무기를 들 수 있는 결과를 얻어 내었다. 그러니 힐렐 학파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대해서 보다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배경에서 바울도 율법 교육을 받았으니 보다 더 이방인 전도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바울은 혈통적 태생적 한계를 잘 극복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계시적인 한계도 역시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말씀의 전공자였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율법의 한계를 정확히 깨우치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비로소 계시의 완전함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보다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던 진정한 계시를 금방 수용할 수 있었다. 그가 주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그는 유연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베드로가 할례자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는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갈2:8). 그러므로 그는 이방인 선교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그의 선교대상이었던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고 안식일을 지킬 필요도 없었으며, 613가지의 율법규정도 따를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믿음을 통하여 언약백성이 될 수 있다고만 가르치면 되었다. 믿음을 가지면 죄사함도 받고 구원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도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바울의 선교관도 나중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갱신될 수 있었다. 즉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맞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믿음만이 아니라 회개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3차전도여행을 마친 후 빌리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부탁할 때에는 자신이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가르쳤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르쳤다고 회고하였던 것이다(행20:21). 그리고 그가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헤롯 아그립바2세(A.D.50~70,재위) 앞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할 때에는 이렇게 말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행26:19-20)" 그랬다. 그는 처음에는 이방인들에게 믿음을 강조했지만 나중에는 회개가 반드시 필요하며, 누구든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그의 선교 초기에는 임박한 주의 재림을 전파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역시 살아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전하였다(고전15:51~52, 살전4:16~17). 그러므로 선교초기에 그는 처녀들을 시집보내지 않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했다(고전7:25~26). 그렇지만 주님의 재림은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말년에는 주님의 우주적인 재림을 고대하고 기다라는 것보다, 개인이 언제라도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쳤다(딤후4:18). 그의 종말신앙도 이렇듯 진전된 계시의 말씀을 따라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구원관은 또 어떠한가? 그가 처음에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순간적인 구원을 전했다.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순간에 구원을 받는다고 전했던 것이다. 그 말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점차로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의 긴 여정(노정)이자 경주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전9:24~25, 빌3:13~14). 그것 중에서 '믿음'이란 구원여정의 첫 출발인 셈이고 그러한 구원의 여정을 끝까지 잘 마쳐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딤후4:7~8). 더욱이 자신이 걸어가는 구원의 여정이야말로 곧 천국에서 상을 받기 위한 과정이라는것도 알게 되었다. 즉 그는 나중에 구원과 상급을 별개의 단위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처음 주님을 영접한 직후에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만 전했다(행20,22). 그러나 그의 선교 중반기에 접어드는 시점에 썼던 로마서를 보면 그는 예수님을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자 "세세에 찬양을 받으신 하나님(정관사 없음)"이라고 전했다(롬9:3~4). 그런데 그가 말년에 기록한 디모데전서에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분이라고 전파하게 된다(딤전3:16). 그렇다. 그가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도 점점 더 진전된 계시를 수용하고 따라간 것이다. 이처럼 계시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도 그는 고정화되거나 화석화되지 아니하였다. 때를 따라 알려주시고 고쳐주시는 주님의 계시를 수용하였고 그것을 전파한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그릇으로서 주께서 쓰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12사도들 외에 따로 그를 불러 들어 쓰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각 지 교회를 향한 주님의 소명은 무엇인가?
그렇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이 있고 교회가 있다. 이러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 바로 그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며 또한 그 교회 구성원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받을 상을 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탄명성교회의 사명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그것도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좋은 지위와 신분을 얻는 자 곧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로 만드는 사역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이들은 회개가 시작이다. 회개가 없이는 이 모든 것의 시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에 관한 진전된 계시가 없으면 이 사역을 계속 진행하기가 불가능하다. 사실 어느 교회가 천국에 차등상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전하는가? 그러한 교회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말씀은 공관복음서에도 나오고 요한계시록에도 나오고 있다. 다만 지금 와서 주님께서 깨우쳐주셔서 아는 것이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 가운데 지금처럼 천국입성에 관한 확실한 말씀이 증거된 것은 흔하지 않았다. 그것은 회개가 관건이며 또한 상급이 관건인 것이다. 이제는 이것이 전파되어야 한다. 회개와 천국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동탄명성교회와 성도들이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도 단지 개교회의 성도들을 먹여살리는 정도가 아니라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거룩한 신부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주어져 있다. 그것의 시작이 바로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예배의 개방이 아닌가 싶다. 코로나로 인하여 현장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가운데 비로소 참된 천국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길이 열려졌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의 성도는 자기들의 섬기는 교회가 있다. 그 교회에서 충성할 일이 있고 해야 할 사역이 있다. 하지만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 모든 성도는 천국에 꼭 입성하는 성도로 준비되어야 하며, 천국에서 왕노릇할 수 있는 성도로 준비되어야 한다. 동탄명성교회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 일을 행할 것이다.
6. 나오며
모든 사람이 다 소명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특별한 사명이 주어질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성도가 천국에서 훌륭한 지위와 신분을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를 대접하는 자에게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0:40~42).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복음전파 사명을 알고 그것에 충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온 천지만물을 창조한 목적이 이것에 있기 때문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이 일을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특별히 불러내신 사도들에게도 이 일을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일을 하는 자를 악한 영들이 가만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일을 감당하려는 교회는 악한 영들과 싸움을 필연적으로 겪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러므로 영의 세계를 알고 귀신을 몰아내며 병든 자를 고치는 사역은 이 일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하는 방식도 모르고 성령의 은사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는 이 일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 일을 하려고 한다 할지라도, 영적 세계를 모르고 영적 권세도 갖고 있지 않는데 이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준비시켜 보낸 일꾼을 통하여 그 일을 하시는 것이다. 앞으로 동탄명성교회를 통하여 어떤 일까지 하게 하실른지는 잘 모르지만, 다만 주님의 현재적인 부르심에 충성을 다할 뿐이다. 그 부르심을 알고 오늘도 함께 하는 동탄명성 교회 성도들과 온라인 성도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미 하늘에 준비된 상이 기다리고 있기에, 다시 눈을 뜨게 되는 날이 오면 영광의 광장에 나아가 기쁨의 춤을 추게 될 것이다.
2022년 05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는가? 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했는가? 그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세우셔야 했는가? 이 모든 질문의 중심에는 '천국복음'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천국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을 셋째 하늘에 있는 천국에서 살게 하시려는 계획 안에서 이 모든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인생은 '꽝'인 것이다. 인생은 의미 없음인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눅4:43). 그리고 그렇게 천국을 전하셨다(마9:35). 그리고 그 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마10:5~8). 그리고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면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하셨다(마24:14). 그런데 주님께서는 12제자들 외에 또 한 사람을 특별히 사도로 불러내셨다. 그는 바로 '사울'(장차 '바울'이라고 불리움)이라는 청년이다. 주님은 아직도 일하고 있는 12제자들 이외에 왜 또 한 사람을 불러내셔야 했던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하여 오늘날 왜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지를 면밀히 살펴보고, 이 시대에 주어진 막중한 사명을 위해 달려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사울'이라는 청년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약 4년이 지난 어느 날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다메섹 도상을 걷고 있는 사울에게 찾아오셨다. 그러자 해보다 더 강력한 빛 때문에 사울 일행 모두는 그만 길바닥에 넘어지고 만다. 그때 그 빛이 얼마나 강렬했든지 사울은 그만 눈이 멀어 버리고 만다. 대체 '사울'이라는 청년이 누구길래 주님께서는 직접 사울을 찾아오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사울'이라는 청년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 12명의 사도들이 다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부탁할 일이 있었다면 주님은 그들에게 부탁하시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왜 주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일부러 찾아가서 그에게 일을 맡기신 것인가? 그리고 그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님과 동시대의 사람이다. 아마도 예수님과 나이가 비슷하게 보인다. 처음에 그의 이름은 '사울'이라고 불려졌지만(행7:58),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는 그의 이름이 '바울'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사울'이나 '바울'은 그의 동일한 이름이지만, '사울'은 히브리식의 그의 이름이며, 바울은 헬라식 내지는 로마식의 그의 이름이다.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곧 헬라파 유대인이었다. 그의 부모는 로마의 속주인 '길리기아'의 도시 '다소'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이다(행22:3). 그리고 어릴 적에, 아마도 8~10살 무렵에 예루살렘으로 유학 보내어진 것 같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결혼한 자기의 누나가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누나 집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그가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매우 싫어했다. 그런 나머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그리고 그러한 자들을 색출하여 회당에서 채찍질하는 혈기등등한 자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돌로 쳐서 죽이는 데에 가편투표를 하면서까지 열정적으로 교회를 박해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하였던 이유가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부활하지도 않은 예수를 부활했다고 믿는 이들을 가만 두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출세를 위하여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가만 놔두지 않았다. A.D.34년경에 그랬다.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도시에 있는 자들까지 색출하여 감옥에 넣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 사법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하여 다메섹에 있는 형제들을 잡아오려고 그리로 가고 있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약 220km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얼마나 갔었을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
3. 왜 사울의 부르심은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서 사울을 부르셨는지를 그 기사를 접할 수 있다. 그것도 사도행전에 세 번씩이나 나온다(행9장, 22장, 26장). 첫 번째는 실제 사건을 기록한 것이고, 다음 두 번은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회고한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사울을 만난 장면이 아주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주님께서 직접 오셔서 사울을 만나셨다는 것이다(행9:3~6).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을 만나실 때에는 보통 투영체로 만나신다. 본체는 하늘에 있으면서 투영체로 오셔서 사람을 만나 대화하시고 자신을 보여 주시기도 하시고 음성을 들려 주시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 존재가 가능한 하나님으로서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의 사울을 만나실 때에는 투영체로 만나신 것이 아니었다. 직접 본체가 오셔서 만나셨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도 여호와께서 직접 본체가 오셔서 만나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그러한 경우를 보면 아브라함과 모세와 사무엘 등이다. 그러자 사울은 빛 중의 빛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의 눈이 그만 멀어 버렸다. 하나님이 직접 오셨는데 육신이 그 앞에 온전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후 예수님께서 보내신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자기의 눈 속에서 [용]비늘이 벗겨지면서 시력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해 그를 왜 불러내셨는지를 알게 된다. 다메섹 도상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그가 핍박하고 있는 예수라고 그에게 말씀해 주셨고, 성 안으로 들어가면 그가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9:5~6).
그리고 그에게 부여하신 또 하나의 사명이 다른 이들보다 컸다는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다메섹 도성에서 살고 있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주님의 제자더러 그 시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는 사울을 만나게 하신다. 그리고 그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를 알려 주라고 하신다. 그러자 아나니아는 직가(곧은 길)라는 거리에 위치한 유다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를 만나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운반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행9:15)" 그랬다. 그는 처음부터 사명 자체가 달랐다. 사명은 큰 것이다. 그는 한 부류가 아니라, 무려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리 정해진 채 이 땅에 보내어진 특별한 그릇이었기 때문이다(갈1:15~16). 그렇다. 우리 믿는 이들 중에는 어떤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는 자들이 더러 있다. 그들은 이 땅에 보내어지기 전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주님께서 그를 불러내어서 당신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사울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큰 그릇으로 이 땅에 보낸 사람이었던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이미 어린양의 12사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바울을 불러서 사용하려고 하신 것인가?
우리는 사울 곧 바울에 대한 특별한 부르심에 주목해야 한다. 그 이유를 알면 우리들도 과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불러서 쓰시는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실 사울을 불러내실 때에 이 땅에는 이미 12명의 사도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도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제쳐 두고 사울을 불러서 그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다. 그럼, 왜 주님은 어린양의 12사도들 외에 굳이 바울을 불러 사용했는가?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째, 바울은 유대인이라는 혈통적 그리고 태생적 한계에 갇혀 있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비록 정통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꺼리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주님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기쁨으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12사도들의 대표였던 베드로는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주님은 당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들을 주셨다(마16:19).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사는 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방인에게만큼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꺼려했다. 하지만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그는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해 주었다. 이 일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보자기 환상에 잘 나온다. 그러다가 그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이자 바울이 목회자로 있던 안디옥 교회에 갔을 때에, 그의 혈통적이고도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예루살렘에서 보낸 할례자들이 안디옥에 도착했다고 하자, 그만 이방인들과의 만남을 슬쩍 피해 버린 것이다(갈1:12).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그는 이방인이 사는 지역에서 탄생하였기에 헬라 문화에 익숙해 있었으며, 헬라어와 로마어(라틴어)를 잘 구사할 수 있어서 이방인들과의 만남이 서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면서 이미 아버지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받았기에 어디든 여행도 자유로웠으며, 자기에 대한 송사가 발생했을 때에 로마의 황제에게 탄원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방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기에 매우 용이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배경에서 그가 태어나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또한 그는 어릴 적에 예루살렘으로 유학 가서 예루살렘에서 초등 교육을 마쳤으며, 15세가 되었을 때에는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배우는 바리새파 교육을 받았다. 그때 가말리엘은 율법 해석에 있어서 유연성을 가진 힐렐 학파의 거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두 거대 학파의 흐름을 따르고 있었다. 하나는 샴마이 학파요 또 하나는 힐렐 학파였다. 샴마이 학파는 율법을 자구적으로 해석하여 문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힐렐 학파는 달랐다. 율법의 근본적인 의도와 뜻을 읽고 율법을 해석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소가 구덩이에 빠진 것을 두고, 샴마이 학파는 그냥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율법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힐렐 학파는 율법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주신 것이므로 구덩이에 빠진 소를 건져내야 한다고 해석했다. 이는 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나도 샴마이 학파에서는 안식일이니까 도망쳐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정말 안식일에 전쟁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말았다. 그때 힐렐 학파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도 필요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전쟁이 나더라도 무기를 들 수 있어야 한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방어용으로 무기를 들 수 있는 결과를 얻어 내었다. 그러니 힐렐 학파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대해서 보다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배경에서 바울도 율법 교육을 받았으니 보다 더 이방인 전도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바울은 혈통적 태생적 한계를 잘 극복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계시적인 한계도 역시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 말씀의 전공자였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율법의 한계를 정확히 깨우치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비로소 계시의 완전함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보다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진정한 계시를 금방 수용할 수 있었다. 그가 주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그는 유연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베드로가 할례자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는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갈2:8). 그러므로 그는 이방인 선교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그의 선교 대상이었던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고 안식일을 지킬 필요도 없었으며, 613가지의 율법 규정도 따를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믿음을 통하여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다고만 가르치면 되었다. 믿음을 가지면 죄사함도 받고 구원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도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바울의 선교관도 나중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갱신될 수 있었다. 즉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맞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믿음만이 아니라 회개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3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부탁할 때에는 자신이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가르쳤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르쳤다고 회고하였던 것이다(행20:21). 그리고 그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헤롯 아그립바2세(A.D.50~70,재위) 앞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할 때에는 이렇게 말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행26:19~20)" 그랬다. 그는 처음에는 이방인들에게 믿음을 강조했지만 나중에는 회개가 반드시 필요하며, 누구든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그의 선교 초기에는 임박한 주의 재림을 전파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역시 살아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전하였다(고전15:51~52, 살전4:16~17). 그러므로 선교 초기에 그는 처녀들을 시집보내지 않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했다(고전7:25~26). 그렇지만 주님의 재림은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말년에는 주님의 우주적인 재림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것보다, 개인이 언제라도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쳤다(딤후4:18). 그의 종말 신앙도 이렇듯 진전된 계시의 말씀을 따라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구원관은 또 어떠한가? 그가 처음에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순간적인 구원을 전했다.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순간에 구원을 받는다고 전했던 것이다. 그 말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점차로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의 긴 여정(노정)이자 경주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전9:24~25, 빌3:13~14). 그것 중에서 '믿음'이란 구원 여정의 첫 출발인 셈이고 그러한 구원의 여정을 끝까지 잘 마쳐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딤후4:7~8). 더욱이 자신이 걸어가는 구원의 여정이야말로 곧 천국에서 상을 받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즉 그는 나중에 구원과 상급을 별개의 단위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처음 주님을 영접한 직후에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만 전했다(행20,22). 그러나 그의 선교 중반기에 접어드는 시점에 썼던 로마서를 보면 그는 예수님을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자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정관사 없음)'이라고 전했다(롬9:5). 그런데 그가 말년에 기록한 디모데전서에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분이라고 전파하게 된다(딤전3:16). 그렇다. 그가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도 점점 더 진전된 계시를 수용하고 따라간 것이다. 이처럼 계시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도 그는 고정화되거나 화석화되지 아니하였다. 때를 따라 알려 주시고 고쳐 주시는 주님의 계시를 수용하였고 그것을 전파한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그릇으로서 주께서 쓰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12사도들 외에 따로 그를 불러 들어 쓰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각 지 교회를 향한 주님의 소명은 무엇인가?
그렇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이 있고 교회가 있다. 이러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 바로 그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며 또한 그 교회 구성원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상을 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탄명성교회의 사명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그것도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좋은 지위와 신분을 얻는 자 곧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로 만드는 사역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회개가 시작이다. 회개가 없이는 이 모든 것의 시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에 관한 진전된 계시가 없으면 이 사역을 계속 진행하기가 불가능하다. 사실 어느 교회가 천국에 차등 상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전하는가? 그러한 교회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말씀은 공관복음서에도 나오고 요한계시록에도 나오고 있다. 다만 지금 와서 주님께서 깨우쳐 주셔서 아는 것이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 가운데 지금처럼 천국 입성에 관한 확실한 말씀이 증거된 것은 흔하지 않았다. 그것은 회개가 관건이며 또한 상급이 관건인 것이다. 이제는 이것이 전파되어야 한다. 회개와 천국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동탄명성교회와 성도들이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도 단지 개교회의 성도들을 먹여 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거룩한 신부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주어져 있다. 그것의 시작이 바로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 예배의 개방이 아닌가 싶다. 코로나로 인하여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가운데 비로소 참된 천국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길이 열려졌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의 성도는 자기들의 섬기는 교회가 있다. 그 교회에서 충성할 일이 있고 해야 할 사역이 있다. 하지만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 모든 성도는 천국에 꼭 입성하는 성도로 준비되어야 하며, 천국에서 왕 노릇할 수 있는 성도로 준비되어야 한다. 동탄명성교회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 일을 행할 것이다.
6. 나오며
모든 사람이 다 소명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특별한 사명이 주어질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성도가 천국에서 훌륭한 지위와 신분을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를 대접하는 자에게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0:40~42).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복음 전파 사명을 알고 그것에 충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한 목적이 이것에 있기 때문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이 일을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특별히 불러내신 사도들에게도 이 일을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일을 하는 자를 악한 영들이 가만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일을 감당하려는 교회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을 필연적으로 겪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러므로 영의 세계를 알고 귀신을 몰아내며 병든 자를 고치는 사역은 이 일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하는 방식도 모르고 성령의 은사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는 이 일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 일을 하려고 한다 할지라도, 영적 세계를 모르고 영적 권세도 갖고 있지 않는데 이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준비시켜 보낸 일꾼을 통하여 그 일을 하시는 것이다. 앞으로 동탄명성교회를 통하여 어떤 일까지 하게 하실른지는 잘 모르지만, 다만 주님의 현재적인 부르심에 충성을 다할 뿐이다. 그 부르심을 알고 오늘도 함께 하는 동탄명성교회 성도들과 온라인 성도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미 하늘에 준비된 상이 기다리고 있기에, 다시 눈을 뜨게 되는 날이 오면 영광의 광장에 나아가 기쁨의 춤을 추게 될 것이다.
2022년 05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