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들은 과연 어떻게 회개해야 그것이 진짜 회개다운 회개이며 그것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회개가 되는 것일까?
우리 믿는 자들의 보통 생각으로는 회개라 하면 자신이 지은 죄를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않겠다고 의지적으로 결단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회개가 아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의 예복이 입혀지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눅15:11-24)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잃었다가 되찾은 것에 대한 3가지 비유 중에 맨 나중에 나오는 비유이다.
먼저 살펴볼 것은 둘째아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가 하는 점이다. 하여튼 둘째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와서는 자신의 입으로 죄를 지은 것이라고 시인했다(눅15:18~19). 다시 말해 그가 아버지의 재산 중 자신에게 해당된 분깃을 달라고 한 것과 아버지의 곁을 멀리 떠나 외국에 가서 아버지의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린 것이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범한 것이었음을 시인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한 것이 그렇게 죄가 되는가? 그리고 한 번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았으면 그것은 더 이상 아버지의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일진데 그것을 좀 써버렸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죄가 되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가 본문을 헬라어 원전으로 살펴보면 그것이 죄인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아버지로부터 구한 재산은 재산(property)이 아니라 '우시아(substance: 본질, 생명 그 자체)'였기 때문이요, 아버지가 그에게 떼어준 살림은 살림살이가 아니라 '비오스(life: 육체의 생명, 삶)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그에게 준 것은 아버지의 생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명은 아직 완숙되지 않은 상태의 생명이었다. 그것을 그냥 떼어서 가져간다면 그 생명은 틀림없이 죽게 될 것임을 아버지도 알고 있었고 아들도 알고 있었다(눅15:24). 특히 둘째아들이 그 '우시아(아버지의 생명)'를 허랑방탕하여 허비했다고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허랑방탕하다'는 단어는 '아소토스(dissolutely: 구원에 합당치 않은)'는 그가 구원받은 것에 대한 합당치 않은 삶이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당시 둘째아들은 아직까지 아버지에게 붙어 있어야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아버지의 생명으로 끊어내어 분리시키려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간섭을 받기를 싫어했고, 자기 맘대로 세상이 주는 쾌락을 즐겨보고자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그것이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인 것을 시인한 것이다.
두번째로, 사람은 언제 회개하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이 끝나가는 어느 시점에서 회개했다. 아버지의 생명이 꺼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세번째로, 사람은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이다. 그렇다면 둘째아들은 어떻게 회개했는가? 어떻게 회개했길래 그는 아버지로부터 용서를 받고 용서의 예복을 입을 수 있게 되는가?
첫째, 그는 철저히 자기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반성했다(18절). 그는 자신의 삶이 곧 하나님을 향하여 죄를 짓는 것이었고 아버지에게 불효였으며, 그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원과 생명을 잃게 만드는 요인이었음을 시인하고 반성한 것이다.
둘째, 그는 철저히 자기자신을 낮추었다. 그가 비록 아버지의 품에 돌아왔어도 그는 더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리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그는 더이상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셋째, 그는 철저히 아버지의 처분을 달게 받으려 했다. 그는 비록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처분이나 벌까지 사면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집안의 품꾼으로 하나로 쳐준다해도 달게 받겠다고 결정하고 아버지에게 나아갔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들이 행하는 회개는 잘못 되었다. 전부 다 회개 후에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비가 무엇인지 알고 응당 그러한 자비를 달라고 하면서 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회개하면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제일가는 옷을 입혀주시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시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줄 것을 기대하면서 회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회개하면 그러한 처우를 해 달라고 생각하고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처우를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판단대로 할 일이다. 우리는 다만 그 처우를 그대로 받아들일 따름이다.
잘못 되었다. 그분이 나를 아들로 다시 맞아주지 않는 처분을 내린다해도 우리를 그 처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단지 내 생명이 보존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지덕지해야 한다. 그것이 회개다. 이렇게 회개해야 회개다운 회개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회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