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도 슬픈 부활절이 또 있을까?
지금 전국적으로는 슬픔이 가득하다. 꽃다운 우리의 아이들이 저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지 벌써 나흘이 되었지만 240여명의 소식이 캄캄하기 때문이다. 지난 수요일 476년의 탑승객을 태운 6천톤급 세월호가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던 중 그만 좌초되어 2시간여만에 바다에 뒤엎어진 상태로 수면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 안에서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324명이 수학여행을 위해 승선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학생은 고작 78명뿐이다. 나머지 학생은 죽었거나 아직도 배밑에 들어가 있어 생사를 가늠할 수 없다. 거기서 과연 숨을 쉴 수나 있을까? 에어포켓 공간으로 들어간다면 살아남을 수가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러한 공간까지 그들이 갈 수는 있는 것일까? 전기가 나간 어둑컴컴한 곳공간을 수영을 해서 찾아갈 수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각방은 서로 막힌 상태에 있는데.. 또한 순식간에 배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점점 물이 차 올라왔었는데 과연 지금까지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을까?
놀라운 사실은 지도자의 무책임함이다. 세월호의 선장 이석준(69세)씨는 사고 직후 채 30분이 되기도 전에 배의 기관사들 및 몇몇 직원들과 함께 배를 빠져나와 버렸다. 단지 알바생에서 "배가 위험하니 선실에서 대기하라"는 명령만을 남긴채... 배 안에 한 사람이라도 생존자가 있으면 그 배를 떠나지 말아야 할 선장이 맨 처음 살겠다고 뛰쳐나오고 만 것이다. 탑승객들을 선실 안에 그대로 가두어놓고 말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이 사건을 접하면서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이 사건이 적나나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한국교회라는 배는 좌초되기 일보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회지도자들의 타락은 극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무책임하게도 자신들의 잘못을 성도들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결국 그 목회자를 따라가는 교인들의 생사는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러한 교회의 지도자를 따라가서 과연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사람의 영혼만큼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생명에 부활을 입어야 한다고 사도바울은 말한다(빌3:10-11). 그리고 사도바울은 자신도 그 부활에 이르기를 힘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그 부활에 이르기를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홀연히 부활체를 입고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하지만 과연 그들이 죽은 다음에 (생명의) 부활체를 입을 수 있을까? 정말 부활체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일까? 아니다. 예수님도 그러지 않았으며, 사도바울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만큼은 자신의 부활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마치 방안에 대기하고 있으면 누군가가 자신을 구원하러 올 줄로 믿고 있었던 240여명의 단원고 학생들처럼 말이다. 지금 배가 비상상황에 들어갔는데도 비스듬히 기운 배의 벽면에 발을 대고 그냥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렇다가 죽겠어?" 하면서 안전불감증에 걸인 사람처럼 그 방에 1시간 30분이상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아무리 방송에서 선실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이 내렸어도 무슨 영문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며 앞으로 어떤 과정으로 비상탈출이 이뤄지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일찍 알아보았다면 그 배 안에는 선장이 도망간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상탈출을 시도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건장한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우리 주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분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려 드렸다. 아들이지만 고난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다. 왜냐하면 그분도 부활을 통해 두번째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롬1:3-4).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했기 때문이다(눅1:35).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께서 이땅에 보내어진 목적을 이룰 상태가 되기까지 그를 나사렛에 숨겨두셨다. 그러다가 제사장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나이, 30세가 되자,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통해 그분을 세상에 드러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공식적으로 선포해 주셨다(마3:17).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후의 삶을 자기 마음대로 산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성부분이 부활체를 입기까지 자신의 달려갈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것이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다. 고난의 쓴 잔도 받아마셨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려드렸다.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던 것이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분은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셨다. 십자가 상에서 외친 그분의 음성을 들어보라. "다 이루었다(요19:30)" 그래서 예수님도 부활을 통해 두번째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 부활은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부활체를 입어 구원에 들어가는 것은 백화점에 있는 에스컬레이터처럼 그냥 스스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 공식적으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이제는 두번째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을 때까지 나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야 한다. 정 그렇게 달려가다가 안 되면 회개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생명의 부활을 입을 수 없다. 생명의 부활은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구원의 여정에 들어선 것뿐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한 말씀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빌3:12). 이를 위해서는 날마다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려야 한다. 정욕을 따라 행하고 우상숭배를 하며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살던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한 것이다(벧전4:2-3). 죄에게 우리 자신을 쉽게 내어주지 말아야 한다(롬6:16). 죄에게 우리 자신을 스스로 방임한 것에 대한 책임을 주님이 처리해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다.
무려 9시반부터 11시까지 1시간3 0분이나 시간이 주어져 있는데도, 선장의 지시라고 선실에 남아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무책임한 선장의 말에 자신을 그냥 내어 맡겨서는 아니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선장의 지시라 할지라도 그것이 비상관리 매뉴얼에 합한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날 자신의 목회자가 들려주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자신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냥 있어서 되겠는가? 그것은 성도의 바른 삶이 아니다. 목회자의 말이라도 기록된 성경말씀에 비춰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합당한 방향에 서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받아들인다해도 분별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목회자의 말인데, 무슨 일 없겠지" 하면서 스스로 안위하지 말라. 목회자의 말이라도 주님이 들려주신 말씀과 배치된다면 그것을 듣고 있는 자신은 안전할거라 생각지 말라. 그것은 위험은 순종임을 알라. 선한 싸움을 싸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고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믿음의 지조를 지키라. 죄에게 자신을 내주지 말라. 그래야 한다. 그래서 믿음의 경주에서 살아남으라. 아니 그 경주에서 승리하라. 안되면 회개라도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