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열린 새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나아갈 수 있는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의 문에 천사들이 경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갈 성에 왜 천사들이 그 성의 문을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문은 보석들로 만들어진 문이 아니라 진주로 만들어진 문들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죽는 날, 그 성 문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열 처녀의 비유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1. 들어가며
문은 보통 출입구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천국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마25:1~13)를 보면, 문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참여여부를 결정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문이 성 안에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문이지만, 성밖에 버려진 자들에게는 심판의 문으로 쓰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문'은 대체 어떠한 문이며, 이 문은 과연 두 종류의 처녀들 곧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에게게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문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열 처녀의 비유에 등장하는 '문(門)'은 대체 어떤 문인가?
마25장 1~13절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우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문을 통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갔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그냥 문 밖에 버려짐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門)은 대체 어떤 문인가? 본문에 등장하는 '문(門)'은 혼인잔치를 치르게 될 신랑집의 문을 가리킨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문은 신부집의 문이라고 생각해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집 안에 대기하고 있는 신부를 위하여, 신랑을 맞으러 나가도록 신부의 들러리 10명이 집 밖으로 마중 나갔던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하지만 성경을 정확히 보니, 그게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집이 신부집이었다고 한다면, 신부를 대신하여 들러리를 나갔던 모든 처녀들은 그간 수고했다고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을 제공받아야 마땅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랑이 문 밖으로 나와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데리고 들어간 후에 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뒤늦게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외치는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신랑은 그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만약 그 집이 신부집의 문이었다면 문을 열어주고 안 열어주고 할 수 있는 권한은 신부에게 있거나 신부의 아버지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부를 위해 그동안 고생한 들러리를 집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이 집은 신랑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집이 신랑 집이었기에 신랑이 그 집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랑 집의 이 문(門)은 영적으로 볼 때 어떤 문(門)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신랑이 누구냐에 따라 그 문의 성격도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는데, 결론적으로 이 문은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 등장하는 '신랑'은 종말의 때 곧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당사자이시다. 왜냐하면 신랑은 종말의 때에 우주적인 교회에게 혼인잔치를 하려고 이 땅으로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신랑은 교회의 영원한 신랑이 되실 우리 주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집은 신랑의 집이기기 때문에 예수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집은 과연 어떻게 불리게 되는가? 그것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불라게 된다. 그러므로 열 처녀의 비유에 등장하는 '문(門)'이란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누가 문(門)을 통과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가?
누가 문을 통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 예식에 참여하게 되는가? 그것은 그날 신랑의 신부가 될 자들이다. 일명, '이기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계21:7),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택함을 받은 자들(계21:2,9)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오늘의 비유에서는 열 처녀들 중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 해당한다. 이들은 어린양의 피에 자신의 더럽혀진 옷을 깨끗히 빨았던 자들이요(계7:14), 자기 자신 안에 더이상 죄가 남아있지 않는 자들이다. 왜냐햐면 날마다 어린양의 피에 자기 자신의 옷을 빨고 있었기 때문이다(현재분사형)(계22:14). 그러므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또렷히 있는 자들이다(계21:27).
4.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어떤 문인가?
그렇다면, 장차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치러질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문은 대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간 신부의 자격에 관한 말씀이 나오는데(계21:27), 그때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가지, 어린양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자라야 한다고 했다. 고로 이 문의 역할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을 안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최종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그가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면 그의 영광은 한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만일 그 성 문 앞에서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아서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성 밖에 남겨지거나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빨을 갈든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 그는 결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성 밖에 버려진 존재, 성밖에서 형벌을 받는 존재,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존재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어린양의 신부가 되도록 그토록 많은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한편,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이 성의 문에 관한 좀 더 많은 정보가 있다.
첫째, 이 성의 문은 동서남북에 한 개씩만 있는 문이 아니라, 각 방향마다 3개씩 있어서 동서남북의 문들을 각각 합치면 총 12개나 된다는 것이다(계21:13). 그러므로 이 성의 문은 누구든지 동서남북에서 다 오더라도록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그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주님의 우주적인 오심(파루시아)의 때에 우리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이다(마8:11~12).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에는 이방인이 그 잔치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될 것이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 잔치에 못 참여하게 될 것이다. 둘째, 이 문들 위에서 12명의 천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계21:12). 왜 그런가? 천국에 악한 영들 곧 귀신들이라도 몰래 쳐들어오거나 공격하기 때문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문은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인 전투천사들이 방어할 것기 때문이다. 귀신들과 싸우는 대상은 전투천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12천사들은 어떤 천사들인가? 그들은 바로 천국의 경비담당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을 지키고 있는 천사는 경비담당 천사들로서 출입을 통제하는 천사들인 것이다. 그럼 왜 12천사들이 이 성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문을 두루도는 화염검을 가진 천사가 경비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이 천사들은 사람이 못 들어오게금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지 외부에서 침입하는 귀신들과 싸우기 위해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누군가가 그 성 안으로 못 들어가도록 막는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이 문은 진주 문이라고 되어 있다(계21:21). 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진주 문인가? 왜 그 문은 금으로 된 문도 아니고, 은으로 된 문도 아니며, 12가지 보석으로 만들어진 문도 아닌가? 왜 그 문은 진주로 만들어진 것인가? 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진주는 사실 자신의 연한 살결에 모래 알이 들어와 상처를 낼 때에 그것에 반응하는 조개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상처와 고통과 아픔의 결과물이 바로 진주인 것이다.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이 땅에 고통받고 외면당하고 핍박 당하는 성도들의 눈물이 모여 진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준비한 기름이다. 진주는 사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통당하고 핍박하고 심지어 죽임당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을 시인했던 증거가 바로 진주문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 성의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자는 대체 누구인가? 좀 전에서 언급했지만 그들은 한 마디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라고 하겠다(계21:27). 그러므로 경비 천사들은 사람들이 그 성의 문으로 나아올 때에 성 안으로 들여보내주거나 그렇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한다. 물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심과 허락하심 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천국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천국에서 천사나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종)로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혹 인간이 천사보다 한 단계 더 낮은 지위를 갖고 있다면, 천국이라고 해도 그 천사를 함부로 부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자신의 권한 하에 주어진 천사들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천사들이나 인간들은 천국에서 서로 공손한 말을 한다. 물론 이 땅에 보내어진 천사들을 구원얻을 후사들(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어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어 있다. 혹시 천국에 가브리엘이나 미가엘 천사장을 보았다면 그들은 상당히 높은 계급을 가진 천사들로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자가 이리 오라 저리 가라고 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5. 이 성의 문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고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검사를 맡는 장소는 바로 새 예루살렘 성 문 앞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기는 자 곧 거룩한 신부들만이 그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서 살 자이자 어린양의 신부가 될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천사장의 호령에 이어, 신랑되신 예수께서 밖으로 나와서(재림하시어) 그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때 슬기로운 자들에게 이 문은 영원한 "구원의 문"이 될 것이다(마25:10, 눅13:23~25). 왜냐하면 이 문은 그들에게 영원히 걱정 근심 슬픔 눈물, 아픔과 사망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완전한 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이 어떤 자들에게는 "심판의 문"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이 문을 앞에서 저지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미려한 다섯 처녀들에게 이 문을 심판의 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9). 그러므로 그날 미련한 처녀들에게 이 문은 심판의 문이 될 것이다. 영원히 주님과 교제가 단절되는 것을 알려주는 문이 될 것이요, 걱정 근심 슬픔 눈물 그리고 아픔과 사망이 없는 새 예루살렘 성이 어떤 곳인지를 뼈져리게 알게 해 주는 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그날이 우리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주님은 이미 문 앞에 와 계신다고 하셨다(마24:33). 여기서의 문은 어떤 문인가? 이전에는 몰랐지만 이 문이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인 것이다(계21:9, 22:14~15). 보좌에서 내려오시어,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과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지상으로 재림하시기 위해 그분이 지금 새 예루살렘 성 문 앞에 서 계시다는 뜻이다. 고로 우리 중에는 가까운 미래에 주님의 재림을 목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른지도 모른다. 그날 그 문은 우리에게 어떤 문이 될 것인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니 그 문은 "열린 문"이라고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열려있었기 때문이다(계3:8). 왜냐하면 그 교회 성도는 적은 능력을 지녔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그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은 자는 기본적으로 그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고(계3:20),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도 역시 그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며,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못한 자,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도 그 문은 닫힌 문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 본문처럼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그 문은 영원한 닫힌 문이 될 것이다. 그렇다. 지금부터라도 기름등불을 잘 준비하자.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고 활활 타오르고 있는 등불을 지녀 어둠을 뚫고 신랑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보자. 건투를 빈다.
2021년 09월 03일(금)
정병진목사
누가 열린 새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하여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나아갈 수 있는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의 문에 천사들이 경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미 구원 받은 자들이 들어갈 성에 왜 천사들이 그 성의 문을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문은 보석들로 만들어진 문이 아니라 진주로 만들어진 문들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죽는 날, 그 성 문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열 처녀의 비유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1. 들어가며
문은 보통 출입구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천국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마25:1~13)를 보면, 문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참여 여부를 결정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문이 성 안에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문이지만, 성 밖에 버려진 자들에게는 심판의 문으로 쓰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문'은 대체 어떠한 문이며, 이 문은 과연 두 종류의 처녀들 곧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에게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문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열 처녀의 비유에 등장하는 '문(門)'은 대체 어떤 문인가?
마태복음 25장 1~13절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우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문을 통하여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갔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그냥 문 밖에 버려짐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門)은 대체 어떤 문인가? 본문에 등장하는 '문(門)'은 혼인 잔치를 치르게 될 신랑집의 문을 가리킨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문은 신부집의 문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집 안에 대기하고 있는 신부를 위하여, 신랑을 맞으러 나가도록 신부의 들러리 10명이 집 밖으로 마중 나갔던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하지만 성경을 정확히 보니, 그게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집이 신부집이었다고 한다면, 신부를 대신하여 들러리를 나갔던 모든 처녀들은 그간 수고했다고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을 제공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랑이 문 밖으로 나와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데리고 들어간 후에 문을 닫아 버린다. 그리고 뒤늦게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외치는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신랑은 그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만약 그 집이 신부집의 문이었다면 문을 열어 주고 안 열어 주고 할 수 있는 권한은 신부에게 있거나 신부의 아버지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부를 위해 그동안 고생한 들러리를 집 안으로 들어 오도록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이 집은 신랑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집이 신랑집이었기에 신랑이 그 집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랑집의 이 문(門)은 영적으로 볼 때 어떤 문(門)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신랑이 누구냐에 따라 그 문의 성격도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는데, 결론적으로 이 문은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 등장하는 '신랑'은 종말의 때 곧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당사자이시다. 왜냐하면 신랑은 종말의 때에 우주적인 교회와 혼인 잔치를 하려고 이 땅으로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신랑은 교회의 영원한 신랑이 되실 우리 주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집은 신랑의 집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집은 과연 어떻게 불리게 되는가? 그것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므로 열 처녀의 비유에 등장하는 '문(門)'이란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누가 문(門)을 통과하여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가?
누가 문을 통하여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예식에 참여하게 되는가? 그것은 그날 신랑의 신부가 될 자들이다. 일명, '이기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계21:7),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택함을 받은 자들(계21:2,9)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오늘의 비유에서는 열 처녀들 중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 해당한다. 이들은 어린 양의 피에 자신의 더럽혀진 옷을 깨끗이 빨았던 자들이요(계7:14), 자기 자신 안에 더 이상 죄가 남아 있지 않는 자들이다. 왜냐햐면 날마다 어린 양의 피에 자기 자신의 옷을 빨고 있었기 때문이다(현재 분사형)(계22:14). 그러므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또렷이 기록되어 있는 자들이다(계21:27).
4.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어떤 문인가?
그렇다면, 장차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치뤄질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문은 대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간 신부의 자격에 관한 말씀이 나오는데(계21:27), 그때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가지, 어린 양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자라야 한다고 했다. 고로 이 문의 역할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을 안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최종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그가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면 그의 영광은 한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만일 그 성 문 앞에서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아서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성 밖에 남겨지거나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빨을 갈든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 그는 결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성 밖에 버려진 존재, 성 밖에서 형벌을 받는 존재,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존재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어린 양의 신부가 되도록 그토록 많은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한편,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이 성의 문에 관한 좀 더 많은 정보가 있다.
첫째, 이 성의 문은 동서남북에 한 개씩만 있는 문이 아니라, 각 방향마다 3개씩 있어서 동서남북의 문들을 각각 합치면 총 12개나 된다는 것이다(계21:13). 그러므로 이 성의 문은 누구든지 동서남북에서 다 오더라도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그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주님의 우주적인 오심(파루시아)의 때에 우리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이다(마8:11~12).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에는 이방인이 그 잔치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될 것이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둘째, 이 문들 위에서 12명의 천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계21:12). 왜 그런가? 천국에 악한 영들 곧 귀신들이라도 몰래 쳐들어오거나 공격하기 때문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문은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인 전투 천사들이 방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귀신들과 싸우는 대상은 전투 천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12천사들은 어떤 천사들인가? 그들은 바로 천국의 경비 담당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을 지키고 있는 천사는 경비 담당 천사들로서 출입을 통제하는 천사들인 것이다. 그럼 왜 12천사들이 이 성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문을 두루도는 화염검을 가진 천사가 경비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이 천사들은 사람이 못 들어오게끔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지 외부에서 침입하는 귀신들과 싸우기 위해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누군가가 그 성 안으로 못 들어가도록 막는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이 문은 진주 문이라고 되어 있다(계21:21). 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진주 문인가? 왜 그 문은 금으로 된 문도 아니고, 은으로 된 문도 아니며, 12가지 보석으로 만들어진 문도 아닌가? 왜 그 문은 진주로 만들어진 것인가? 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진주는 사실 자신의 연한 살결에 모래 알이 들어와 상처를 낼 때에 그것에 반응하는 조개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상처와 고통과 아픔의 결과물이 바로 진주인 것이다.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이 땅에 고통 받고 외면 당하고 핍박 당하는 성도들의 눈물이 모여 진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준비한 기름이다. 진주는 사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말해 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통 당하고 핍박 당하며 심지어 죽임 당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을 시인했던 증거가 바로 진주문이 되어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 성의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자는 대체 누구인가? 좀 전에 언급했지만 그들은 한 마디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라고 하겠다(계21:27). 그러므로 경비 천사들은 사람들이 그 성의 문으로 나아올 때에 성 안으로 들여보내 주거나 그렇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한다. 물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심과 허락하심 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천국에 가 보시면 알겠지만, 천국에서 천사나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종)로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혹 인간이 천사보다 한 단계 더 낮은 지위를 갖고 있다면, 천국이라고 해도 그 천사를 함부로 부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자신의 권한하에 주어진 천사들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천사들이나 인간들은 천국에서 서로 공손한 말을 한다. 물론 이 땅에 보내어진 천사들은 구원 얻을 후사들(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어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어 있다. 혹시 천국에서 가브리엘이나 미가엘 천사장을 보았다면 그들은 상당히 높은 계급을 가진 천사들로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자가 이리 오라 저리 가라고 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5. 이 성의 문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고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검사를 받는 장소는 바로 새 예루살렘 성 문 앞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기는 자 곧 거룩한 신부들만이 그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서 살 자이자 어린 양의 신부가 될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천사장의 호령에 이어, 신랑되신 예수께서 밖으로 나와서(재림하시어) 그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때 슬기로운 자들에게 이 문은 영원한 '구원의 문'이 될 것이다(마25:10, 눅13:23~25). 왜냐하면 이 문은 그들에게 영원히 걱정 근심 슬픔 눈물 아픔과 사망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완전한 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이 어떤 자들에게는 '심판의 문'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이 문 앞에서 저지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미려한 다섯 처녀들에게 이 문을 심판의 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9). 그러므로 그날 미련한 처녀들에게 이 문은 심판의 문이 될 것이다. 영원히 주님과 교제가 단절되는 것을 알려 주는 문이 될 것이요, 걱정 근심 슬픔 눈물 그리고 아픔과 사망이 없는 새 예루살렘 성이 어떤 곳인지를 뼈져리게 알게 해 주는 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그날이 우리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주님은 이미 문 앞에 와 계신다고 하셨다(마24:33). 여기서의 문은 어떤 문인가? 이전에는 몰랐지만 이 문이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인 것이다(계21:9, 22:14~15). 보좌에서 내려오시어,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과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지상으로 재림하시기 위해 그분이 지금 새 예루살렘 성 문 앞에 서 계시다는 뜻이다. 고로 우리 중에는 가까운 미래에 주님의 재림을 목도할 사람들이 있을른지도 모른다. 그날 그 문은 우리에게 어떤 문이 될 것인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니 그 문은 '열린 문'이라고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계3:8). 왜냐하면 그 교회 성도는 적은 능력을 지녔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그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은 자는 기본적으로 그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고(계3:20),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도 역시 그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며,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못한 자,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도 그 문은 닫힌 문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 본문처럼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그 문은 영원한 닫힌 문이 될 것이다. 그렇다. 지금부터라도 기름 등불을 잘 준비하자.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고 활활 타오르고 있는 등불을 지녀 어둠을 뚫고 신랑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보자. 건투를 빈다.
2021년 09월 03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