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이스라엘의 미래는 어떠할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이스라엘사람들은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고, 다시 옛날의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의 경륜은 거꾸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미 메시야가 왔고 구속사역은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성전(히에론)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으므로 파괴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구약시대처럼 다시 동물의 희생제사를 드리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실까?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현대의 이스라엘백성이라 할지라도 이미 오신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성전을 지어 피의 희생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메시야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이미 오셨던 메시야를 영접하면 되기 때문이다. 단 하나 그들에게 걸림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제거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삼신론적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 서서히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셨던 여호와인 것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으로 알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믿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되면 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는다. 혹시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바는 자신의 골육친척인 이스라엘사람들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롬9:1~3).
그렇다면 이러한 바울의 바램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경륜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바울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바램이었던 것일까?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민족적으로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을 하나님의 변치 아니할 구원경륜으로 잘못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고고 하더라도 구원은 일대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누구라도 개인이 자신의 죄인인 것을 회개하고 메시야를 믿을 때에 그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선민이라고 해서 구원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선민으로서 특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먼저 제공받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한 이후에는 이러한 특별한 권한은 사라져고 없다. 이미 촛대는 옮겨가버고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원은 남은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메시야이심과 한 분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들만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많지는 아니할 것이다. 몇몇 소수의 남은 자들만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사도바울이고 또 하나는 엘리야시대에 남겨진 칠천명이다. 사도바울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전혀 모른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변화되어 예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시대와 같이 우상숭배가 만연하여 구원받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구원받을 사람 칠천명을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칠천명이란 숫자적인 칠천명은 아닐 것이다. 북이스라엘에도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숫자다. 7일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가리키고, 1,000이라는 숫자는 충만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가 아무리 선민으로 택함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개인의 구원을 의미하지 않으며, 혹시 중간이라도 예수님 믿는 것을 배척하고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2가지 역할을 하게 된다. 하나는 모퉁이의 버릿돌 곧 반석이 되시기도 하고, 반대로 또 하나는 바위아 올무나 덫이나 거치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한다.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를 얻으려 했던 유대인들은 오히려 의를 얻지 못하고, 의가 없기에 100% 믿음으로 나아갔던 이방인들은 칭의를 받아서 구원의 여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들이 멸망받도록 실족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바톤이 넘어간 것 뿐이다. 그렇게 되면 원조격인 유대인들은 원래 믿음이 자기조상들의 것임을 입증하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되면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멸심해야 할 것은 이방인들은 원래 돌감람나무로서 그냥 놔두면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나무에 불과하지만, 이방인들의 가지가 꺾어져 참감람나무가 되살아나 접붙힘을 받으면, 얼마나 더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 아닌가하는 사도바울의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은 믿음의 경륜을 무시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 이방인들은 기꺼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이요 하나님이심과 그분이야말로 구원자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여 구원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방인들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교만하거나 자긍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께서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꺾어버리셨는데,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잘못행하면 버림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때 빨리 그 안으로 들어와아야지 고집만 피우다가는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대 앞에 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은 늘 감사해야 한다. 먼저 이방인에게까지 구원하기로 작정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유대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자신의 태를 통해 메시야를 낳기 위해 몸부림을 쳤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방인들이여!! 우리도 청신을 차리고 우리 이방인에게 알려주신 구원역사의 과정을 잘 전달하여 그들도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하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