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성경에서 칭의(稱義)와 구원(救援)을 구분할 수 있는가? 그리고 화해(和解)와 화목(和睦)을 구분할 수 있는가? 이들의 개념은 사실 비슷한 것 같으나 실상은 다른 것들이다. 또한 특이하게도 이 둘은 다른 한 개가 다른 한 개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사실 화해와 화목은 형제간이며 그리고 칭의와 구원도 형제간이다. 하지만 또한 둘 다 하나의 결과물들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칭의와 구원 그리고 칭의의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로마서를 전반적으로 정리해보자.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한 부분은 교리에 관한 부분이요 또 한 부분은 성도의 생활에 관한 부분이다. 앞부분은 롬1:~11장에 해당하며, 뒷부분은 롬12~16에 해당한다. 그런데 로마서 앞부분(1~11장)은 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부분(1~8장)은 구원교리를 말하고 있고, 뒷부분(9~11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말하고 있다. 특히 롬1~8장은 또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일 앞부분(1:18~3:20)은 '정죄'에 관하여 다루고 있고, 중간부분(3:21~5:11)은 '칭의'에 관하여 다루고 있으며, 뒷부분(5:12~8:39)은 '성화'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중간부분(3:21~5:11)은 또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3:21~31)은 칭의의 정의와 그리고 그 근거에 대해 다루고 있고, 중간부분(4장)은 칭의의 대표적인 예인 아브라함과 그리고 다윗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뒷부분(5:1~11)은 칭의의 결과에 대해 다루고 있다.
오늘 우리가 다룰 롬5:1~11의 부분은 칭의의 결과에 관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지는 칭의는 어떤 결과를 안겨다준다. 그것에 대한 대표적인 것으로는 화해요 그리고 화목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고 하나님과 '화해(힐라스모스)'를 한다. 이 화해를 통해서 죄인들이라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고 또한 하나님과 '화목(카탈라게)'하게 된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원수관계를 청산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화해제물'인가 '화목제물'인가? 한글성경에서는 '화해제물'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단지 '화목제물'이라는 말만 나온다(롬3:25, 요일2:2, 4:10). 하지만 헬라어원문을 보면, 그것은 '화목제물'(카랄라소)이 아니라 '화해제물'(힐라스모스)이라고 번역해야 바른 번역이다. 그리고 롬3:25에 나오는 단어(힐라스테리온)도 '화목제물'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되고, '화목의 장소' 곧 '속죄소' 내지는 '시은좌'라고 번역해야 한다. 번역상의 아쉬움이 참 많은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해제물이 되셨으며 또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이다. 먼저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제물이 되시어, 인간의 죄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화해할 수 있게 되었고 화평을 가지게 되었다(롬5:1).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시어,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관계를 청산해주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부자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칭의의 결과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칭의는 무엇을 근거로 주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구속 혹은 속량(아포뤼트로시스)이란 구약적인 의미(카파르)로는 '덮다. 가리우다'의 뜻이며, 신약적인 의미(뤼트로)로는 '댓가를 지불하다, 속전(뤼트론)을 주고 되사다'는 뜻이다. 물론 이 두 단어는 둘 다 나중에는 '용서하다'는 뜻으로 귀결되었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의 죄가 덮어지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가 지은 죄들의 댓가가 지불되었다. 그리하여 믿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의(義)가 전가되는 것이다. 이렇게 전가된 의로 옷입은 사람을 우리는 의롭다고 칭한다. 이름하여 칭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구속 곧 그리스도의 피흘림에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누구도 칭의인이 된 것에 대해 자랑할 수 없다(롬26~27, 엡2:8~9). 칭의를 위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친히 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일방적인 은혜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그 은혜를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의를 전가받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칭의를 얻은 자는 과연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일까? 크게 2가지 혜택을 얻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고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정리해 보자. 우리가 범죄했을 때 우리는 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그런데 화해제물(힐라스모스)로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심으로 죄들의 문제를 해결하셨다(요일2:2, 4:10, 힐라스모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었으며,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화해라는 것이 주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면, 화목(카탈라게)이라는 것은 죄는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것까지 청산해준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인의 상태였기에 하나님과 화해할 필요가 있었고, 원수된 상태였기에 하나님과 화목할(카탈랏소) 필요가 있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해제물(힐라스모스)이 되시어 죄문제를 해결해주셨으며, 더불어 화목제물(카탈라게)이 되심으로 원수관계도 청산해주셨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화해나 화목이나 둘 다 그리스도의 구속(아포뤼트로시스)에 근거하고 있으며(롬5:10~11), 하나님의 칭의(디카이오쉬네)를 거쳐서 우리에게 전가되는 혜택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되고 화목된 자는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는 근처도 갈 수 없었던 우리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롬5:2). 이것을 우리는 '믿는이들의 소망'이라고 부른다.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환난도 기쁘게 감당한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롬5:3~4).
문제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받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 로마서를 잘못 이해한 사람들에 의해 칭의가 곧 구원인 것처럼 말했왔던 때가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 다만 믿으면 그것도 계속해서 믿을 때에 "구원을 받는다(현재형)"라고 되어있든지 아니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미래형)"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성경은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처럼 번역된 부분들이 있다(엡2:8, 요5:24). 엡2:8에 보면 한글개역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지만 이 구절은 헬라어원문에 따르면 완료형구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기 때문이니(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인칭, 복수), 이것은 너희로부터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다. 이 말씀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진술이지, 결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영어성경이나 한글성경은 거의 대부분이 다 이 구절을 현재완료로 번역해놓았다. 아니다. 구원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 가서 받을 것이다.
또 한 구절을 보자. 요5:24의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이 구절도 헬라어원문을 따라 번역해 보면 현재완료구문이 아니라 현재구문인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계속해서) 듣고 있고(동사, 분사, 현재, 능동태), 또 나 보내신 이를 (계속해서) 믿고 있는(동사, 분사, 현재, 능동태) 자는 영생을 가지며, 심판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동사, 직설법, 현재, 중간태)..." 그렇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한 번 믿음으로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성경구절은 없다. 구원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형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이미 칭의를 받은 자라도 구원에서 떨어질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구원의 여정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칭의를 받은 것은 구원을 이미 받은 것이 아니다. 다만 구원 안으로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과 같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가? 아니다. 당시 출애굽했던 자라도 광야에 엎드려져 죽은 자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구원도 그렇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안으로 들어온 자라도 광야인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구원은 갈릴 수가 있는 것이다. 혹 어떤 이가 광야에서 죽어버렸다면 그는 일차적인 구원은 받았어도 최종적인 구원은 받지 못한 사람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미 칭의를 받은 자라도 앞으로 미래의 어느날에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했던 것이다(롬5:9~10). 롬5:9~10을 읽어보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동사, 분사, 과거,수동태)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동사, 직설법, 과거,수동태)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그렇다. 칭의를 받은 자라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구원은 아직 아니이기 때문이다. 칭의는 받았으나 구원의 완성은 아직도 멀었기 때문이다. 구원은 우리가 죽는 그 날 혹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받는 것일까? 그것은 롬5:12~8:39에 나온다. 그러나 칭의를 통하지 않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구원얻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주부터 계속해서 이야기하겠지만 핵심만 요약하면 이렇다. 칭의를 받은 자는 반드시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컨데, 출애굽한 자는 광야에서 애굽의 구습과 잔재들을 하나씩 날마다 청산해야 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갈 합당한 성도가 되기 위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서 나아가야하며, 새벽마다 내리는 만나를 먹음으로 자신의 몸이 하나님의 양식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어느 누가 이러한 과정을 다 통과할 수 있을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다들 죄된 본성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된 본성이 밖으로 드러난 범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셨다. 그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에 가서는 믿음과 회개가 구원얻는 방법인 것임을 알 수 있다(막1:15, 행2:38, 계3;19).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