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가운데에 살았던 사람이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던 사람이었을까? 그는 정말 죽은 자도 살려내시며 없는 것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만을 쭈욱 잘 믿으며 살았던 사람이었을까? 창세기 12장에서 22장까지를 다시 읽어보라. 그러면 그가 견고한 믿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는 한때 넘어지기도 했다. 자신의 육체대로 행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회개하고 다시 일어섰고 결국에는 그의 믿음이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적어도 칭의로 시작되는 구원이 이와 같을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은 사람이 칭의를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믿음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어떤 행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지지해주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결론적으로 알게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칭의로 시작되는 구원은 결국 믿음과 회개를 통해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없고 또한 경건하지 않아도 그런 자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심으로 그 사람을 의롭다고 간주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저변에 흐르고 있는 핵심포인트다.
우선 롬4장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로마서를 통해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우리가 지금 어디만큼 와 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로마서는 바울의 교리서신 중의 하나다. 바울서신 중 교리에 관한 서신은 총 6권인데, 그것은 롬,고전후,갈,살전후다. 이것들 중에서 로마서가 다루고 있는 구원의 여정은 1장에서 8장까지다. 특히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의 말씀에서 바울은 인간이 받아야 할 구원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한 마디로 인간은 죄에 빠져 있으며 또한 범죄자이기 때문에 그 죄값을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저지른 죄값은 무엇인가? 그것은 안타깝게도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일차적으로는 육체의 죽음을 맛보는 것이지만,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못하고 믿음을 갖지 못한 자는 결국 죽어서 하나님과 영영 분리되는 이차적인 죽음까지도 맛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직시해야 할까? 혹시 자신이 지금 어떠한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는지 잘 실감이 나지 않으시는 분들은 롬1:18~3:20까지를 다시 읽어보기를 권장한다. 그러면 자신이 정말 어떠한 심각한 상태에 있는지를 확실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은 죄인인지 잘 몰라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우길 자들을 향해 누가 과연 죄인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그 방법은 유대인들은 율법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아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게 될 것이라 했으며, 이방인들은 양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했다.
그렇다면 죄를 지은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한 처방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의를 힘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치고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련해놓으신 새로운 의를 힘입어야 한다. 이것은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되어왔던 것인데, 율법 외에 드러난 또다른 믿음의 의라는 것이다. 사람은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련해준 의를 전가받아 의롭게 되며, 죄로부터 구원받게 된다. 한편 믿음으로 주어진 의라 할지라도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칭의를 선물하시기 위해서 엄청난 값을 치르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를 받게 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첫째로, 자랑할 데가 없을 것이다. 둘째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을 것이다. 셋째로, 믿음의 법이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거룩성을 더욱 더 견고히 세워줄 것이다. 우선 여기까지 롬3장의 이야기다. 자, 그렇다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를 얻었던 사람들의 실례를 살펴보자. 이것은 바로 롬4장의 줄거리다.
사도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고 칭함받은, 복받은 두 사람을 소개한다. 한 사람은 창12장부터 22장까지 등장하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삼상 9장부터 사무엘하24장에 나오는 '다윗'이라는 인물이다. 사도바울은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회개로 주어짐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의롭다칭함을 받았던 사람이 되었을까? 사도바울은 칭의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아브라함을 든다. 그리고 그가 언제 의롭다함을 받았는지를 그 시점을 정확히 찝어낸다. 그리고 그 시기가 그가 할례를 받기 14년전의 일인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오는 모든 이들의 조상인 것을 증거한다. 즉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을 통해 이방인들의 조상이 되기도 하며, 14년후에 할례를 통해서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의 조상도 된다고 증거한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이 칭의를 얻은 것이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를 잘 해서가 아니고 또한 그가 할례를 받은 것 때문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칭의를 받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 해주실 것을 믿는 것으로 얻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칭의를 받았다면, 그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하는 모든 사람들도 아브라함과 똑같이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었던 아브라함도 한 때는 믿음의 길에서 넘어질 때가 있었음을 알고 있는가?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용서와 사랑으로 인하여 다시 일어설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인생을 칭의의 관점에서 논한다면, 그에게는 세 지점의 큰 분수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그의 나이 85세 때에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되었고 또 한 번은 99세 때에 재확인되었으며, 마지막으로는 그의 나이 125세 내지는 137세 때에 확정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았던 때는 그의 나이 85세되던 해였다. 이때는 아브라함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앞이 전혀 보이지 않던 시기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의 선포로 인해 아브라함은 믿음 위에 서게 된다. 자, 그렇다면 대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칭의는 언제 주어졌을까? 그리고 언제 다시 확인되었으며, 마지막으로는 언제 확정지어졌던 것인지를 알아보자.
아브라함은 창12장에 비로소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는 다윗보다 약 500년정도 앞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다(B.C.2091년경). 당시 아브라함은 우상을 제조해서 팔던 아버지 데라의 집에 거하고 있었따. 그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것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창12:1).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군말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선택하고 기꺼이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만을 믿고 따르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해 주신다. 그것은 바로 그와 그의 후손을 많게 해 주고 그들에게도 거할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당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당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니 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긴 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항상 후손이 걸렸다. 그리고 언제 그 땅을 받을 것인가에도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었다다. 그러던 후에 금방 3년이 지나가버렸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신이 갈대우르를 떠나올 때부터 함께 했던 조카 롯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서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려고 계획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시로 조카 롯을 떠나보내게 한다. 그후 또다시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여전히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다메섹사람 엘리에셀을 자신의 양자로 삼겠다고 하나님게 말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그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창15:4)"라고 대답해주셨다. 그때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끌어내시더니, 캄캄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을 세어보게 하셨다. 그리고는 말씀하기를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게 될 것이다"고 하셨다. 그러면 보통 사람이라면 피식 웃으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 기분좋게 들으라고 하시는 이야기죠?"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달랐다. 오히려 하나님게서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가진 그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그에게 의로 간주하셨다(창15:6). 이것이 바로 그가 85세에 받았던 최초의 칭의였다. 그 시점은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나온지 10년이 되던 해였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태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아내 사라가 안달이 났는지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그것은 꼭 자신의 몸을 통하지 않더라도 아브라함의 후사를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몸종 하갈을 들여보내어 자식을 얻어보자는 제안이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선뜻 내키지는 않는 제안이었지만 더 늙어가기 전에 자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아내 사라의 제안을 받아이게 된다. 그리하여 그 다음해, 아브라함의 나이 86세 때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뒤로 아들은 태어나서 기쁜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나주시지 아니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1~2년이 아니라 무려 13년동안이나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방문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첫 마디가 "이제는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다시 시작해보자는 차원에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고 하셨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가 이전에 육신을 따라 행했던 습관을 죽음에 넘기는 의식을 할례를 시행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그날 그시에 자신과 자신의 아들 이스마엘과 종들을 다 불러다가 할례를 행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나이 85세 때 받았던 칭의를 14년 뒤인 99세 때에 회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할례란 14년전에 이미 그가 받았던 칭의의 회복하는 인침인 것이다.
그후에 아브라함은 정말 어떻게 달라지게 되었을까? 아브라함은 그 다음 해에 정말론 자신의 아내 사라로부터 아들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항상 이스마엘에 대한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음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금새 흘러갔다. 벌써 그의 아들이 자라서 25세 내지는 37세가 되었을 무렵이다. 하나님께서 또다시 그를 찾아오셨다. 그리고는 그에게 명령하셨다.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내가 지시한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렴(창22:2)" 하지만 3일길이나 걸어가는 길을 가면서도 아브라함은 전혀 믿음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이제는 100세에 얻은 아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죽은 자도 살려내실 분이며, 없는 것도 있게 만드실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롬4:17~18). 이윽고 아브라함은 칼을 들고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급히 찾으셨다. 그리고 그의 아들 독자 이삭에게 아무짓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셨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시면서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셨다. 그가 85세 때 받았던 칭의가 40년 내지는 52년만에 완전히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행함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85세 때에 받았던 칭의가 이제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초지일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졌던 자는 결코 아니었다. 믿음이 있었던 그였지만 그도 중간에 넘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할례를 통해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곧바로 할례를 행함으로 옛 자아를 죽음에 넘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그가 얼마나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랬다. 그도 칭의를 받은 자였지만, 중간에 넘어졌던 경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회개를 통해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뒤로 다시는 넘어지지 아니했다. 그러자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이 다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어주실 놀라운 은혜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가 의롭지 못해도 우리를 의롭게 해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칭의를 얻었다고 그 순간부터 온전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아브라함처럼 육체대로 행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인생에 한 두 번 쯤은 큰 어려움에 직면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느가? 즉시 회개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내가 과연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의롭지 않아도 다시 의롭다고 해주실 하나님을 또다시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옛사람을 더욱 더 죽음에 넘겨야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 인간의 구원은 칭의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중간에 넘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반드시 회개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다음에는 더이상 옛사람의 습관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칭의를 받아 구원의 여정에 들어선 자들이다. 하지만 날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내 자신이 과연 최종적인 구원을 향하여 바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믿음과 회개로 받은지, 결코 믿음과 행위로 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진정 믿음으로 산다면 우리의 삶에는 행위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행위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행위의 열매는 단지 우리가 최종적으로 얻을 구원을 향해 바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증표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모름지기 믿음과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해서는 절대 아니 된다. 우리가 받는 구원은 결국 믿음과 회개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공생애의 첫 외침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이제 마지막으로 다윗이 받은 칭의의 의에 대해 살펴보자. 다윗은 한 때 악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장군의 아내를 데려다가 욕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애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자신의 최측근인 요합장군에게 기별하여 그 부하장수를 최전선에 내보내 죽게 했다. 그는 한 마디로 간음죄와 살인교사죄와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죄를 범했 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그 범죄를 모르시겠는가? 하나님은 즉시 나단선지자를 그에게 보냈다. 그때 나단선지자로부터 권력과 힘을 가진 자의 횡포의 이야기를 들었던 다윗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런 일을 행한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양새끼도 4배나 갚아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나단선지자는 "바로 그 자가 당신입니다."고 정면으로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자신의 죄를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서 나단선지자를 없애버리지도 아니했다. 그는 즉시 회개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를 했노라고 자백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주신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메시야가 죽기 전의 시대이므로 그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자식을 4명이나 잃었으며, 자신의 아들에 의해 자신의 후궁이 겁탈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를 받고 지은 시편이 있는데, 그 시편이 바로 시편 32편과 51편이라는 시다. 특히 시32:1을 보면 용서받고 난 후에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한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사실 다윗이 한 것은 심각한 범죄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오히려 그 죄를 가리워주셨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행하지도 아니하고 오직 회개만 했는데도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이다. 자신은 분명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은혜를 받았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이 바로 칭의와 똑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롬4:6~8). 그렇다. 불법이 용서를 받고 죄가 가리워짐으로 죄인이 의롭다칭함을 받게 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해 주신 일이다. 물론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엄청난 댓가를 지불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든지 다윗이든지 자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며 잘못했던 죄를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의롭다고 칭해주셨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