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는 참으로 놀랍다. 그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사람을 다 확실히 죄인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두 손을 들게 만든다. 그러면 어찌할꼬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한다. 오늘 사도바울은 롬3장 9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모든 사람은 심각한 타락한 상태에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음을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롬3장 21절부터 31절의 말씀에서는 율법 외에 나타난 또 다른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말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통하여 얻게 되는 새로운 의의 길이다.
과연 인간은 얼마나 타락한 상태에 있는 것일까? 칼빈주의자들 즉 이중예정론과 성도의 견인교리를 절대적으로 믿는 자들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전적 무능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인간은 전적인 타락상태나 전적인 무능상태에 있지 않다. 가만히 자연 상태에 놔둔다면 인간은 틀림없이 멸망으로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부어지고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역사한다면 그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인간의 상태를 진달하여 말씀하실 때에, 인간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2:20). 그렇다. 인간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인간은 결국 꺾여지고 말 것이다. 또한 인간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결국에는 불이 꺼지듯 꺼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가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하나님은 그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그에게 되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다고 하셨다(요3:16, 7:37~38). 멸망으로 들어갈 심각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라도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고 자신의 죄를 회개를 할 수만 있다면, 그도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에게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되고 성령이 역사하시게 되었을 때 그가 반응하기만 하면 구원의 기회는 그에게 제공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으며 또한 반응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퍅하게 갖지 말라. 언제라도 그분의 초청에 반응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는 어떠한가?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했다(롬3:10~18). 왜냐하면 죄에 심각하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이후 모든 인간은 심각하게 죄에게 오염되어 있다. 그러므로 가만히 놔두면 그의 마음과 입술과 손과 발은 죄를 지을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은 사람이 마음으로 짓는 죄와 입술로 짓는 죄를 죄라고 명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만 자신이 죄인이라고 판단하려고 하지 말라. 마5~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죄인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마음으로 간음해도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고, 말로 형제에게 욕하는 자는 살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며 오히려 율법을 더 굳건이 서 있게 하려고 오신 것이다. 율법을 강화시켜 죄인으로 하여금 더 죄인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다 율법을 통해 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식하고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닫는 데에 있다(롬3:20). 왜냐하면 율법에 비추어보아 율법 앞에서 자신이 의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에를 들어보자. 율법에 보면 가난한 이웃들 즉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구제하라고 명령하셨다(신14:29). 그런데 얼마만큼 언제까지 구제해야 구제한 것인지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자신을 율법에 비추어보아 자신은 구제생활을 잘 감당하고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려면 율법을 더욱 공부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더 붙잡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은 사람을 다 죄인으로 만들어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 앞에 모두가 죄인인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의가 아닌 새로운 의를 준비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이다(롬3:21~22).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여김을 받는 것을 구약의 의라고 한다면, 신약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주어지는 의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갖고 계신다. 하나는 공의라는 속성이요, 또 하나는 사랑이라는 속성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로 비추어보면, 인간은 죄인인지라 심판받아 지옥형벌을 면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비추어보면,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사랑스러운 존재다. 그렇다고 죄인인 인간을 무조건을 용서해주고 구원하실 수가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대속의 방법을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고, 대신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대신 아들을 죄값으로 죽이시고 우리를 대신 살려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인들은 모든 인류를 위해 대신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여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내지는 "전가된 의"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의는 3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이러한 의를 가진 자는 아무도 자랑할 데가 없다는 것이다(롬3:27~28). 오직 은혜로 값없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러한 의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롬3:29~30). 율법의 의는 차별이 존재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있었다. 그래서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이라고 무시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는 유대인이라고 해도 특별한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 다 똑같이 하나님의 새로운 의를 전가해주신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가진 자는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가 있다. 셋째는 이러한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세워준다는 것이다(롬3:31). 율법의 의를 통해 사람은 죄인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율법의 의는 그런 사람을 믿음의 의로 안내해준다. 그리하여 사람이 구원을 받게 도와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의는 율법의 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보안하여 하나님의 의를 얻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