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영광' 곧 헬라어로 '독사'라는 단어를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빛남, 광채"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사실 영광스러운 존재이시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57:5)". 그래서 그분을 묘사할 때 사도요한은 '빛이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요일1:5). 그리고 어느날 그분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또한 '빛'이라고 표현했다(요1:4,5,9). 예수님 또한 영광스러운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깜짝 놀랄만한 표현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표현하고 있으며(눅2:14),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사건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요12:28). 과연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도 영광스러운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사건이라고 표현해도 좋은 것일까? 이제 우리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통해서 그 비밀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고 이 비밀을 아는 순간 아마도 당신은 숙연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는가부터 살펴보자. 이 세상에는 사실 영광이 없었다. 영광은 하나님만이 갖고 있던 속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표현할 때 그분을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표현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15:11)". 그런데 모세가 이 표현을 사용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출14장의 사건을 경험을 하고 난 뒤에,너무나 감격스러워 노래를 불렀는데, 거기에서 모세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노래(출15:1~18)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홍해에서 자신이 영광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출14:17~18)". 고로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실 때에 사용되어지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영광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에도 나타났고(출24:16~17, 신5:24), 광야에서 하나님의 처소인 성막을 지을 때에도 나타났다(출40:34~35).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디어 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분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첫 표적을 행하셨다. 그런데 이때에 사도요한은 그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그렇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예수께서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이 예수께서 영광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모르고 있었을 때,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 제자들이 비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자신인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영광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의 어떠하심을 드러낼 때 사용되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성육신의 사건과 십자가의 사건마저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성육신의 사건에 대해 사도요한은 이렇게 표현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님의 성육신사건은 독생자가 가지고 있는 영광이 무엇인지를 여실이 드러낸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탄생시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는 의사 누가도 동의하고 했다. 그것은 하늘에서 천군천사가 나타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이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3~14)". 왜 예수의 탄생이 영광스러운 것인가? 그것은 초라함이 맞지 않을까? 아기가 태어나되 마굿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뉘어있는데 어찌 그것을 영광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천사들은 그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함께 노래했다. 여기서 우리는 '영광'이라는 말의 본래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이나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의 사람들의 눈에 볼 수 있도록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세운 인간구속에 관한 일이 진행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예수의 탄생이 비록 초라한 마굿간에서 이루어졌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하는 만세전의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의 눈에 보기에 나타난 사건이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상에서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도 매우 영광스러운 일인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예수께는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그렇다. 예수께서 드디어 인간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를 보니, 그것이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요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일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사복음서 중에서 오직 사도요한만이 기록하고 있는 하늘의 세번째 음성을 살펴보자(요12:28).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12:27~28)".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을 영광스럽게 한 일이 있었고 앞으로 또한 영광스럽게 할 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을 영광스럽게 한 것은 바로 성육신의 사건을 가리키며, 또한 앞으로 영광스럽게 할 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영광을 인간구속의 일에 사용하시어 나타내려 하신 것일까? 그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과 교회를 얻으시려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엡5:27)"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인간에게도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래서 결국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산출하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피조물이 되어 오셨고, 죽을 수 없는 그분이 죽음에 자신을 내어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얻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겸손과 섬기심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광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 종의 형체로서 자신을 낮추셨고, 죽기까지 행하셨다. 즉 낮아지심과 죽으심을 경험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화려함과 장식으로서 사람이나 교회를 높여 영광스럽게 하는 시도는 멈춰야 한다. 진짜 영광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데에 있으며, 그것은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섬김으로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금 높은 위치에 올라와 있다고 해서 자신이 무슨 영광러운 존재가 된 것인량 착각해서 아니 될 것이다. 거기에는 영광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이것을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회개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순종이 그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을 통해 나타났다. 하지만 초림 때에는 사람들이 그 영광의 하나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분은 한 줄기의 빛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그 영광을 자기에게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어야 했지만,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해 한 줄기의 영광의 빛은 예수님을 따르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전달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알라.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의 것이 되게 하려면 우선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 성탄의 참된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탄절에 회개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는가? 그런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만이라도 회개하자.
그리고 두번째로는 순종하는 삶이 요청된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피조물로 낮추기까지 그리고 인간을 위해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가? 자신이 뭔가를 조금이라도 행하면, 그 일로 자신이 높임받기를 원하고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해서는 저 하늘나라에 가서 영광을 더 풍성히 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받아누린 영광은 하늘나라에서 재생되지 않는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 높이는 자가 되라. 그것이 바로 너와 내가 행할 일이다. 당신은 지금도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순종하고 있는가? 없었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하라. 그것이 저 하늘나라에서 자신이 누릴 영광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