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와 회개의 차이는 무엇일까? 비슷한 것같은 두 단어이지만 둘은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후회와 회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고, 우리 성도들은 회개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먼저, 후회와 회개의 공통점에 대해 살펴보자. 후회와 회개의 시작은 둘 다 같다. 둘 다 지난 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회나 회개를 하려면 자신이 무슨 잘못을 범했는지 알아야 하고 그것을 철저히 깨닫고 시인해야 한다. 한편, 구원은 회개와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에(막1:15)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후회와 회개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사실 후회와 회개는 시작은 같은 개념이지만 끝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선 후회와 회개에 대해 사도바울이 말한 것을 들어보자.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9-10)" 그렇다. 그것이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면 그것은 후회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면 그것은 회개인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그것이 사망과 파멸이라는 결과를 낳으면 그것은 후회이지만, 그것이 생명을 가져오고 구원과 회복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회개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후회와 회개는 죄에 대한 처벌을 누가 내리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즉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처벌을 자기나 혹은 사탄마귀에게 두고 있다면 그것은 후회가 되는 것이요, 그것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면 그것은 회개가 되는 것이다. 결국 후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절망으로 가지만, 회개는 회복으로 가는 것이다.
이제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의 실제 사례를 통해서 후회와 회개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가룟유다의 경우를 보자. 그가 예수를 은 삼십에 판 것은 분명 인신매매행위였기 때문에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신24:7). 가룟유다는 그것을 곧 뼈저리게 뉘우쳤고 자신이 행한 것이 범죄인 것을 깨달았던 자다.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며(마27:3)"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 하지만 그 범죄에 대한 처우를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 처단하고 말았다. 그것은 곧 자살이었다(마27:5). 그런데 생각해보라. 사람의 생명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자가 원래 누구인지 말이다. 그는 곧 사탄마귀다(마10:10). 가룟유다는 사실 사탄마귀의 꾀임을 받아 범죄하였다(요13:2). 그리고 그는 그것이 잘못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도 그는 사탄마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고 말았다.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우를 기다리거나 그 처우를 수용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경우를 보라. 그 여인의 범한 죄도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속한다(신22:22). 하지만 그 여인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요8:11)"였다. 그녀의 범죄행위에 대해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정죄도 아니었고 율법에 의한 죽임당함도 아니었다. 그녀를 살리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대신 그 벌을 받고 그녀를 살려내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우다. 내가 대신 벌을 받을테니 너를 지은 죄로부터 용서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회개는 자신이 지은 죄를 철저히 깨닫고 잘못을 시인하는 것에부터 시작하지만 그 끝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한 자는 후회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우리 믿는 이들은 회개를 통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영원한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그렇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범죄했다면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깨닫고 그 죄를 시인한 다음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회개다.
결국 회개의 끝은 예수님의 처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눅15장에 등장하는 돌아온 탕자의 경우를 보라.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철저히 깨달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는 자신을 아버지의 아들로 받아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그를 정식 아들로 다시 받아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했지만 우리를 처벌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것인가를 알았으면 다시 아버지 하나님으로 품으로 돌아와 용서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범죄한 우리를 다시 받아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해 아버지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는 죄를 범치 않아야 한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치러야 했던 죽음의 고통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