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기도는 사실 거듭난 사람의 기도만은 아니다. 방언기도는 성령과 더불어 행하는 내 영의 기도로서 성령과 함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고전14:2).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방언이란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면서, 동시에 령께서 내 영과 더불어 말하는 확실한 언어인 것이다. 이는 방언이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사도행전의 저자가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행2:4). 고로 방언기도 혹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내 영만이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과 내 영이 동시에 기도하고 대화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무난할 듯 싶다.
오늘 이 시간에게는 믿는 자들 중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나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왜 통역이 필요한 것인지, 실제로 방언은 어떻게 통역이 되어서 나오는 것인지, 그리고 방언을 통역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은 대체 어떤 것이 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방언으로 말한 것에 대해 왜 통역이 필요하는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혹 당신이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방언으로 말해보면 방언으로 말하는 본인도 정작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랄랄라, 롤롤롤 등의 어떤 단어를 되풀이하는 방언을 하기도 있고, 어떤 이는 좀 더 많은 소리값으로 구성된 방언을 말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유창한 언어같은 방언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중에서 유창한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그래도 자신이 방언이 정말 내 영이 비밀을 말하는 어떤 기도같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말 랄랄라, 롤롤롤처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이게 도무지 내 영이 성령과 더불이 행하는 기도가 맞는 것인가 하고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놀라지 말라. 방언은 그 음가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내 영이 하나님께 혹은 내 영이 성령과 더불어 유의미한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니 말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방언을 통역해봄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통역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방언기도를 하다가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 따위의 방언은 왜 해야하는 거지?" 하면서 방언을 그치는 자들도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들어와서 방언기도에 대해 아주 부정적으로 말하는 부류가 많아진 것도 문제다. 즉 방언기도는 초대교회 이후에 사라졌으며, 지금 현대교회의 방언기도는 귀신이 주는 방언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을 듣게 될 때 많은 성도들은 정말로 그런가 하고서 그날부로 방언을 그치기도 한다. 그러므로 방언통역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사실 성경에서도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오직 하나님만 알아들을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답답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존재도 알아 들을 수가 없눈 것이 확실하다. 정말 방언의 내용은 방언을 듣고 있는 자도 모를 수밖에 없고, 정작 그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자도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방언이다. 심지어 그 방언을 듣고 있는 천사들(악한 천사이든 선한 천사이든)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오직 인간의 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언을 당신만이 아니라 사람들 중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은사를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방언통역의 은사인 것이다(고전12:10,30, 14:13, 26~27).
문제는 누가 방언통역의 은사를 받아서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 방언통역을 한다고 하는 자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방언통역을 해 왔는지 모른다. 현대교회의 방언의 문제는 방언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방언통역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방언통역에 대해서도 상당한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그것은 방언통역을 제대로 받아보지 않아서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방언을 통역하는 자는 정말 성경말씀을 꿰뚫고 있으면서 동시에 현재까지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존중해드리는 자라야 한다. 그러기에 방언통역을 할 수 있는 자는 목회자가 할 때에 제일 좋은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방언통역을 한다고 할 때에는 우리는 적어도 2가지 이상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는 방언통역자가 과연 지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또한 교회 목회자의 권위 아래에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만약 그가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목회자의 권위에 순복하지 않고 사역하는 은사자라고 한다면 그 통역자는 진실된 방언통역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거짓 영을 따라 행하는 거짓된 은사자일 확률이 매우 높다. 또 하나는 그가 과연 성경을 얼마나 꿰뚫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방언통역을 할 수 있는 자라 할지라도 성경을 잘 모르고 있는 은사자라면 그가 나중 되었을 때에는 거짓된 영을 따라 방언통역을 할 확률이 매우 높아지기 때문이다.
고전14장에 의하면, 당시 고린도교회에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여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왜냐하면 고전14장 33절부터 갑자기 사도바울이 방언통역과 예언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교회에서 여자의 위치 내지는 교회의 질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방언통역과 예언이 여성의 입에서 나왔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고전14:33~35). 사실주변을 살펴보아도 방언통역을 할 수 있는 분들은 대부분 사모님이나 여자전도사님과 여자권사들님 중에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방언통역을 할 수 있는 분이 여자전도사님이나 여자 권사님이라고 한다면 담임목회자의 지도를 받으며 해야하고, 사모님이라면 남편되신 목사님의 권위 아래서 순복하면서 방언통역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둘째로 살펴볼 것은 실제로 방언통역은 어떻게 되어져서 나오는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방언통역은 방언통역의 은사를 가진 자가 방언을 하는 사람의 방언을 들으면서 그 방언을 통역해주는 것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45년간 20만명의 방언을 통역해 준 어떤 목사님의 사모님에 의하면, 방언통역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여쭈어보니, 자신은 방언통역을 3단계로 받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상대방이 방언을 하는데 자기 귀에는 그 방언이 한국말로 들려서 한국말로 그대로 말한 것이 방언통역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는 상대방이 방언으로 말하면 이어서 사모님이 방언으로 통역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일종의 직역이라고 했다. 하지만 직역은 처음에는 미숙해서 상당히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방언 중에 성령께서 그를 책망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직설적으로 나오다보니 중직자의 큰 범죄들이 속속들이 나와서 그 중직자를 당혹스럽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 좋은 중직자라면 그 즉시 자복하고 회개하여 개과천선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반대로 믿음이 좋지 않은 중직자는 시험에 들어 많은 어려움을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지금처럼 의역으로 나오는 방언통역의 은사를 주시되, 동시통역의 은사를 주셨다고 했다. 또 어떤 방언통역 은사를 만나보니, 방언통역은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적으로 깨달아져서 통역하는 것도 있었고, 직독직해식으로 나온 것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방언통역하는 본인이 방언하는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성령께서 그때그때 초자연적으로 깨달아 말하게 하심으로 방언통역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방언통역은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은사로 주신 방언통역은 그때 그일에 대해서 혹은 그 사람의 그 분량에 맞게금만 통역되어 나오는 것이지 모든 기도가 통역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만큼만 통역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지 모든 기도를 다 통역해주시는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통역을 인생전체에 대한 그림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에 필요해서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의 영으로 기도하게금 한 것이고, 성령께서 통역을 해도 필요한 것만을 통역해주시기 때문에, 그것만이 자신의 영이 행하고 있는 모든 기도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방언통역은 실제로 방언통역을 해 본 사람만이 알아듣고 행하는 것이기에, "방언통역은 이렇게 하는 것이 정답이다"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방언통역을 하는 사람의 인격과 그가 그동안 해 왔던 방언통역의 내용을 조사해보면, 과연 그 통역자가 진정 성령께서 은사로 주신 방언통역의 은사로 방언통역을 하는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방언통역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아무 사람이라도 찾아가서 방언통역을 받아서는 아니 되겠다.
보편적으로 방언통역의 은사는 대부분 예언의 은사를 수반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 보인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는 오직 예언하는 것만 할 수 있지만, 방언통역의 은사를 받은 자는 상대방의 방언기도를 통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영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바램까지 동시에 통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통역은 딱 2가지로 나타나는 것 같다. 하나는 우리의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와 똑같은 유형으로 기도하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드리는 기도와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 영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하고 있다는 점과 그 기도의 내용이 단 한 가지도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이나 악한 내용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혹 자기의 영이 잘못된 기도를 할 것 같으면 성령께서 그 즉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 기도를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기도로 고쳐주시기 때문이다(롬8:26).
셋째로, 그렇다면 방언을 통역함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유익한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러가지다. 첫째는 내가 하는 방언기도가 정말 내 영이 성령과 연합하여 하나님께드리는 기도인지를 확실하게 알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자신의 방언기도가 랄랄라 룰룰루라고 나온다고 실망하지 말라. 혹 자신이 그러한 몇 글자의 말로 방언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 내 영은 주어 동사 목적어가 들어있는 말 즉 언어적인 말로써 하나님께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방언통역을 해 보면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방언을 들어보면, 방언하는 사람에 따라 수 백 종의 다양한 언어들로 구성된 방언기도를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한 두 글자에서 20자 미만의 글자들이 나열되는 경우가 많은데(거의 80%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언기도의 내용을 통역해보면 극것은 언어가 아닌 것이 아니라, 확실히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방언통역을 하게 되면, 성령의 은사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도 성령께서는 지금도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어 성도들의 기도를 돕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성령의 은사들 중에서도 방언과 방언통역의 은사만큼 특별한 은사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은사는 초자연적인 언어를 말하는 은사이고 이해하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살아계심을 이 2가지 은사를 통해서도 믿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방언통역의 내용을 통해 얻게 되는 여러가지 유익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방언기도를 통해 자신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고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기도를 자신의 영이 알고 기도하고 있다는 걳을 발견하게 되어, 자신이 앞으로 무슨 기도를 더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도 있고, 또한 중간중간에 성령께서 그 사람의 영을 책망하는 내용이 통역으로 나옴으로 자신의 죄를 통회자복하는 일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방언기도를 들어보면 정말 자신이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으로 쓰임받기를 원하는지를 들을 수 있어서 자신의 사명감을 다시 고취시킬 수도 있으며,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방언기도와 방언의 통역은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령께서 나눠주시는 은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처럼 방언기도와 방언통역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방언통역을 제대로 해 줄 수 있는 분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왜 우리 주변에는 제대로 방언을 통역해주시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일까? 45년간 20만명을 통역해 본 경험이 있는 어느 목사님과 사모님 부부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대부분 2가지 이유에서라고 말씀하신다. 첫째는 주님말씀대로 그대로 지키며 사는 성결한 주의 종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결의 기준은 십계명과 산상수훈인데, 이것을 그대로 준수하는 분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 알게 모르게 권력과 물질을 우상숭배하고 있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고 있으며, 탐욕과 거짓과 음란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방언통역의 은사를 주고 싶어서 그것을 받을 자가 몇 명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기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방언기도나 방언통역의 은사는 기도하라고 주신 은사이고 기도를 많이 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은사인데, 기도(일반기도와 방언기도)의 정성과 헌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분량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방언통역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분들의 말씀을 정말 되짚어보고 또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여, 나도 이제는 더욱 주님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기도의 정성과 헌신을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