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론(112)]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특징(18) 다윗의 저주시, 과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시51:10~1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Bu-ht_hrNmM
1. 들어가며
시편을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믿음의 위인으로 존경해 온 다윗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한 저주의 말을 쏟아낼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원수의 혀를 잘라 달라고, 그의 자녀들이 고아가 되어 유리걸식하게 해 달라고, 그의 후손을 이 땅에서 끊어 달라고 기도한 다윗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형상과는 너무도 달라 보인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많은 신학자와 설교자들을 난감하게 만들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흔한 대답은 "다윗이 악인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직접 심판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긴 것이니, 그 정도는 용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한다. 심판을 청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주여, 저를 벌하여 주옵소서" 정도는 우리가 아뢸 수 있는 기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과 수위를 정하여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징계의 수위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지, 피조물인 인간이 그 내용을 정하여 아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시편의 저주시는 단지 다윗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편은 공동체의 예배서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서 함께 부르던 노래였고, 레위 지파 찬양대가 큰 소리로 노래하던 예배의 내용이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양대장으로서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을 세우고 이들로 하여금 노래를 짓고 부르게 하였다. 그러므로 저주의 언어가 예배의 자리에서 울려 퍼졌다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개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의 고백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우리가 공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말씀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저주시 안에 우리 모두에게 전하실 메시지를 담아 두셨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이 저주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사실이다. 신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원수를 선대하라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을 향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눈을 감았다(행 7:60).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다(눅 23:34). 그런데 다윗은 원수의 자녀들이 고아가 되게 해 달라고, 그들의 후손을 이 땅에서 끊어 달라고 기도했다(시 109:9-13). 이 간격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저주시들을 시편 150편 정경 안에 그대로 보존하셔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 주셨다. 이것이 단순히 한 인간의 개인적 감정 표출에 불과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성경 안에 남겨 두지 않으셨을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 보존하신 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다윗의 저주시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경륜을 네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는 어릴 때부터 쌓인 마음의 깊은 상처, 둘째는 그 상처를 타고 들어온 악한 영들의 역사, 셋째는 메시아 예언의 도구로 저주시를 쓰신 하나님의 섭리, 넷째는 구약 경륜상 성령이 인간 속에 내주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그것이다. 이 시간에는 다윗의 저주시가 기록된 이 네 가지 이유를 성경적으로 살펴보고, 성령을 받은 오늘의 신약 성도가 원수를 향해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윗의 저주시는 오늘의 성도에게 세 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 주는 반면교사의 가르침이다. 둘째, 그 상처와 분노조차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면 메시아 예언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 주는 가르침이다. 셋째, 성령을 내 속에 받은 오늘의 성도는 구약의 경륜적 한계를 넘어서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신약의 은혜를 보여 주는 가르침이다. 이 세 가지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다윗의 저주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오늘의 삶에 바르게 적용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2. 다윗의 저주시가 오늘날까지 성경에 남겨진 이유는 무엇인가?
시편 안에는 이른바 '저주시'라 불리는 본문들이 여럿 존재한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으로 시편 35편, 55편, 69편, 109편을 꼽을 수 있다. 이 본문들은 원수가 일찍 죽어 그 아내가 과부가 되고, 자녀들이 고아가 되어 유리걸식하게 되기를 바라며, 그 후손이 이 땅에서 끊어지기를 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시 109:9-13). 시편 150편에서 저주시의 대부분은 다윗이 썼다. 아삽의 이름이 붙은 것도 있지만, 그것 역시 다윗이 찬양대장으로 세운 아삽, 헤만, 여두둔과 같은 자들이 노래하도록 세운 것이었으니 다윗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이 다윗의 개인적 감정 폭발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것을 시편 정경 안에 보존하셨는가? 이것이 우리가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할 질문이다. 성경의 어떤 내용도 우연히 그 안에 들어온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 보존하신 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저주시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경륜이 담겨 있다.
그 목적을 발견하는 결정적 열쇠는 뜻밖에도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만나신 후, 열한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이렇게 선포하셨다.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시편은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것이라고. 이 말씀은 시편을 단순히 인간의 노래나 기도로 보던 시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고로 시편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서다. 이 관점을 가지고 저주시를 다시 읽으면 그 해석이 전혀 달라진다.
저주시의 대표적인 네 편을 살펴보면,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놀라운 정밀함으로 예언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편 35편에는 거짓 증인이 등장하여 예수님을 고소하게 될 것이 예언되어 있다(시 35:11). 시편 69편에는 까닭 없이 미워하고 쓸개와 초를 마시게 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 69:4, 21). 시편 55편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 아히도벨이 배신하게 되는 내용이 나오는데(시 55:12-14), 이것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언하는 것이다. 시편 109편에는 머리를 흔들며 조롱당하고 수욕을 당하게 될 것이 기록되어 있다(시 109:24-25). 이 네 편의 저주시는 공통적으로 메시아가 고난받고, 버림당하고, 조롱당하는 내용을 정밀하게 예언하고 있다.
다윗의 억한 심정에서 쏟아진 저주의 언어들이 실은 장차 메시아가 당하실 고통의 목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상처와 분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섭리 가운데 붙드셔서 메시아 예언의 정밀한 그릇으로 만드셨다. 다윗이 저주의 말을 쏟아낼 때 하나님께서 막지 않으신 이유가 여기 있다. 장차 메시아가 그런 고통을 당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 예언을 허용하신 것이다.
이것이 저주시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가장 본질적인 이유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다. 인간의 상처와 분노조차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저주시는 웅변한다.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다.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윗의 저주 기도는 과연 일치하는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신약의 가르침은 용서하는 것이고(마 18:21-22), 원수도 사랑하는 것이며(마 5:44), 원수를 선대하는 것이다(롬 12:20-21, 마5:39-42). 저 사람의 혓바닥을 잘라 달라거나(시 55:9), 저 사람의 자식이 고아가 되게 해 달라는 것(시 109:9)이 신약의 기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성도가 다윗의 저주시를 보며 "그렇구나, 하나님께 심판을 청하는 것은 괜찮구나"라는 식으로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 된다. 저주시는 그 당시 구약 경륜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허용된 것이었지, 오늘의 성도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남겨 준 기도의 모델이 아니다. 인간의 상처와 분노조차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된다. 저주시 안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숨겨져 있고,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저주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단순히 한 인간의 분노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곧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실 메시아의 발자취를 읽어야 한다.
다윗은 메시아 예언에 있어서 독보적인 예언자였다. 선지자로서는 이사야를 최고봉으로 꼽을 수 있지만, 내용의 풍성함과 분량에 있어서는 다윗이 이사야를 능가한다. 다윗은 시편을 통해 메시아의 탄생, 사역, 고난, 죽음, 부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생생하게 예언하였다. 저주시도 그 예언의 일부였다. 누군가는 이 고난의 내용을 예언해야 했다. 다윗이 아니고서는 그토록 생생한 언어로 그 고통을 표현할 수 없었다. 상처가 있으니까, 그 상처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토록 날카롭고 구체적인 예언이 가능했다.
3. 다윗은 왜 그토록 강렬한 저주의 말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는가?
다윗이 그토록 강렬한 저주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뿌리는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에 있다. 다윗은 이새의 막내아들이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왕을 기름 붓기 위해 찾아왔을 때, 이새는 다윗을 부르지 않았다. 양을 치러 보낸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일일이 댈 때 다윗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사무엘이 "이 아이들이 다냐"고 물었을 때 비로소 이새는 "아직 막내가 있는데 양을 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아버지 이새에게 다윗은 왕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아이, 애초에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막내였다. 이것이 다윗의 출발점이었다. 시편 27편 10절에 다윗은 스스로 이렇게 고백한다.
시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이 짧은 고백 안에 다윗의 생애 전체가 담겨 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상처다. 부모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녀에게 주어진 존재다.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의 존재는 곧 세상 전부다. 아무것도 없어도 부모만 있으면 아이는 안전하다. 어디서 넘어져 이마가 깨지고 피가 흘러도, 엄마 품에 안기면 울음이 그치고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그러한 품이 없었다. 어린 시절 가족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외면당한 경험이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아물지 않는 상처로 새겨졌다.
그 상처는 이후의 삶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건드려졌다. 사울왕에게 발탁되어 등용되는가 싶었지만, 사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는 도망자가 되었다. 광야 어디를 가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갈멜산의 나발에게 양 떼를 지켜 준 대가로 도움을 청했다가 무시당하는 치욕을 겪었고, 도엑이라는 에돔 사람이 놉의 제사장 무리를 몰살시키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 주변 사람들마저 하나둘 두려워하며 피해 갔다. 십황무지에서도, 아둘람 굴에서도, 사방이 막혀 버린 것 같은 고독과 버림받음의 감각이 다윗을 끊임없이 짓눌렀다.
이처럼 깊은 상처를 지닌 사람에게는 특유한 반응 패턴이 형성된다. 잠깐의 침묵, 응답의 지연, 조금의 외면조차도 완전한 버림받음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이 모든 것을 최악으로 읽어 내는 것이다. 다윗의 저주시에 담긴 격렬함은 바로 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 가운데 그렇게 강렬한 저주의 언어가 터져 나온 것은 악한 본성 때문이 아니라, 거듭 버림받아 온 영혼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쏟아낸 절규였기 때문이다.
어릴 때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이 새겨지는지를 우리는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 상처는 단지 기억 속에 머물지 않는다. 삶의 모든 영역, 관계의 방식, 말의 패턴, 위기 상황에서의 반응 방식 속에 뿌리를 내리고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다윗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상처를 안고 평생을 걸어간 사람이었다.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어떤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저주의 말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윗에게 상처를 가장 직접적으로 입힌 인물 중 하나가 도엑이었다. 에돔 사람 도엑은 사울의 신하로서, 다윗이 놉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움을 받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것을 사울에게 고발하였다. 그 결과 아히멜렉을 비롯한 놉의 제사장 85명 전부가 사울의 명령 아래 도엑의 손에 의해 몰살당하였다. 다윗이 도피 중에 잠시 머물렀던 그 장소에서, 자신을 도운 사람들이 전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죄책감과 분노가 시편 35편, 55편, 109편 등에 담긴 격렬한 저주의 언어를 낳았다. 직접 손을 쓴 것은 도엑이었지만, 그 뒤에는 사울이 있었고, 그 앞에는 무고한 피가 흘러 있었다. 다윗의 저주시에는 이처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상처가 담겨 있다.
또한 다윗에게는 뛰어난 모사 아히도벨이 있었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나중에 밧세바를 취하면서 우리아를 죽이게 되는 그 밧세바의 친할아버지였다. 그는 다윗의 생각을 백 가지나 미리 읽어 내는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런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면서 다윗을 배신하고 말았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자, 가장 깊이 신뢰하던 자의 배신은 어떤 원수의 공격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시 55:13-14). 다윗에게는 그런 상처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상처들이 한계에 달하여 터져 나올 때, 저주의 시편이 탄생한 것이다. 다윗의 인생 전체가 저주시의 배경이었으며, 그의 상처의 총량이 저주의 언어들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시 55:13-14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4. 어릴 때 받은 상처와 악한 영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상처의 문제는 심리적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악한 영이 들어오는 문이 된다. 억울함을 당하게 하는 영, 배신당하게 하는 영,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 영, 앞길을 막는 영들이 그 상처를 타고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삶이 다시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마다, 그 영들은 상처를 건드려 더 강렬하게 폭발하게 만든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타고 들어온 악한 영들이, 그가 위기의 상황에 처할 때마다 강한 저주의 말을 쏟아내게 하였다.
이 원리는 다윗만의 문제가 아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 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목회자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로 강단에 서면, 그 상처에서 비롯된 독이 말을 통해 회중에게 흘러나간다. 은혜를 전해야 할 설교가 오히려 듣는 이의 가슴에 비수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설교가 나올지 몰라도, 실제 삶에서는 걸맞지 않은 폭력적 행동이 드러날 수 있다. 폭력의 영, 살인의 영, 미움의 영, 갈라치는 영들이 그 상처에 달라붙어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눈물로 그 독을 빼내야 한다. 눈물은 독을 씻어 내는 영적 정화의 통로다. 이 악한 영들의 영향은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흐름,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의 경로, 그리고 살면서 스스로 불러들인 영들이라는 세 경로를 통해 축적된다. 이 세 경로가 합쳐지면 그 영향력은 더욱 강해진다. 다윗 역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영들, 어릴 때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 사울왕의 핍박 아래 도망자로 살던 삶이 서로 맞물려, 영적 나이가 높지 않았다면 그 감정이 행동으로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 앞에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 상처에서 비롯된 독은 결코 제거되지 않는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죄가 있고 자신도 악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면, 그 독이 더 많이 쌓여 있을 것이므로 더욱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
상처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이 권력이나 지위를 얻게 되면 그 위험은 더욱 커진다. 공적으로 주어진 권한이 개인적 원한을 갚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사울왕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 주어진 삼천 명의 군사를 다윗 한 사람을 제거하는 데 쏟아부었다. 나라의 진정한 적을 향해 쓰여야 할 군사력이 개인적 시기와 원한을 위해 쓰인 것이다. 지도자에게 주어진 권력은 백성을 섬기기 위한 것인데, 상처받고 악한 영에 사로잡힌 지도자는 그것을 자기를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데 사용한다. 그런 지도자 아래에서 백성은 참으로 불행하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순간적으로 억한 심정이 폭발하여 저주의 말을 내뱉기도 했지만, 실제 삶에서는 끝내 원수를 직접 갚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왕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고, 압살롬의 반역 앞에서 피신하면서도 "그 청년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시무이가 저주하며 돌을 던질 때도 "하나님께서 그리하게 하셨으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했다. 나발을 죽이러 가는 도중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 한마디에 즉시 마음을 돌이켰다. 아도니아의 반역에 참여한 자들(요압장군, 아비아달 제사장)도, 압살롬에게 가담한 아마사도, 다윗은 죽이지 말라 했다. 다윗이 자기 손으로 직접 처단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그의 영적 깊이를 증명한다. 그는 말로는 폭발했지만 행동으로는 절제하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영적 나이가 높았기 때문이다. 상처가 있고 악한 영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성숙함이 그 충동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을 막았다.
영적 나이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영적 나이가 낮은 사람은 그 충동을 바로 실행에 옮긴다. 사울왕이 그랬다. 다윗이 자신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자 즉시 시기심이 폭발하여 그를 제거하려 행동으로 옮겼다. 반면 영적 나이가 높은 사람은 충동이 일어나도 멈출 줄 안다. 아비가일이 나발의 어리석음을 사과하며 찾아왔을 때, 다윗은 이미 4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복수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아비가일의 한마디 말에 즉시 멈추었다. "당신이 하나님이 세운 왕이 될 때, 이것이 당신의 양심을 괴롭히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 한마디에 다윗은 돌이켰다. 이것이 영적 성숙함이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09편에서 도액을 향해 그토록 강렬한 저주를 퍼부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손으로 단 한 명도 처단하지 않았다. 말로는 쏟아냈지만 행동으로는 절제하였다. 하나님 앞에 억울함을 토로하고 심판을 요청하는 것과, 자기 손으로 직접 심판을 집행하는 것 사이의 선을 다윗은 끝까지 넘지 않았다. 이것이 다윗을 사울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차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다윗의 저주시를 그냥 용납하거나 옹호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표현이었다. 다윗 자신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시편 51편에서 하나님께 정한 마음을 새로 창조해 달라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다(시 51:10). 상처와 악한 영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저주시를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 한계 가운데서도 섭리 가운데 메시아 예언의 역사를 이루셨다.
5. 저주시 네 편(35, 55, 69, 109편)에 감추어진 메시아 예언의 비밀은 무엇인가?
다윗의 저주시가 단순한 감정 표출이 아니라 메시아 예언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시편 35편, 55편, 69편, 109편이다. 이 네 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놀라운 정밀함으로 예언되어 있다. 이것이 다윗의 저주시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남겨 두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이유다.
첫째, 시편 35편에는 거짓 증인들이 등장하여 의인을 고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 35:11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
이것은 예수님의 재판 장면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 위해 거짓 증인들을 세워 정죄하였다.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 증인들의 말이 서로 맞지 않을 정도로 거짓이었지만,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그 거짓 증거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다. 아무 죄도 없는 자가 거짓 증거로 죽음에 넘겨지는 그 고난이, 다윗이 원수들을 향해 쏟아낸 저주의 언어 안에 이미 천 년 전에 새겨져 있었다.
둘째, 시편 69편에는 까닭 없는 미움과, 쓸개 및 초를 마시게 되는 장면이 예언되어 있다.
시 69: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나를 끊으려 하는 자, 내 원수들이 강하오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내야 하나이다 시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신포도주를 마시게 되셨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25절에서 직접 시편 69편을 인용하시며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다윗이 쏟아낸 저주의 언어는 정확히 메시아의 수난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윗이 도액을 향하여, 자신을 박해하는 원수들을 향하여 던진 고통의 언어들이, 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경험하실 그 고통을 예언하는 말씀이었다.
셋째, 시편 55편은 가장 가까운 친구의 배신을 예언한다.
시 55:12-14 나를 책망한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라면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라면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이것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언한다. 예수님의 품 안에서 함께 먹고 마셨던 제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자가 은 삼십에 주님을 팔아 넘긴 그 배신의 아픔이 다윗의 시편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 원수에게 배신당하는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밥상을 함께하고 성전에 함께 다니던 자에게 배신당하는 것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쓰라린 상처다. 다윗이 아히도벨에게서 그것을 경험하였고, 예수님이 유다에게서 그것을 경험하셨다.
넷째, 시편 109편은 저주가 메시아 자신에게 임하고, 머리를 흔들며 조롱당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시 109:25 나는 또 그들에게 비방거리가 되었나이다 그들이 나를 볼 때에 그들의 머리를 흔드나이다
십자가에서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조롱하던 장면이 마태복음 27장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시편에는 저주가 자신에게 임하고 금식으로 수척해지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는 모습의 예언이다. 예수님은 다윗의 저주시에 담긴 그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써, 저주받을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시편 109편에는 저주가 자신에게 임하고 금식으로 수척해지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는 모습의 더 깊은 예언이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선언한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다윗이 도액을 향해 퍼부은 저주의 언어가 메시아에게 임하게 되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를 메시아가 대신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 이것이 저주시 안에 담긴 가장 깊은 비밀이다. 저주시는 그 자체로 복음의 예언이었다.
이처럼 저주시 네 편은 한결같이 메시아의 고난을 향해 있다. 거짓 고소, 까닭 없는 미움, 쓸개와 초, 친구의 배신, 머리를 흔드는 조롱. 이 고통의 목록들이 다윗이 원수에게 퍼부은 저주의 언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통의 정밀한 예언이기도 했다. 다윗의 상처와 격분이 없었다면, 이토록 생생하고 구체적인 예언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상처와 분노를 그냥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섭리 가운데 붙드셔서 메시아 예언의 통로로 삼으셨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다.
6. 시편 51편은 구약 성도의 한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다윗의 저주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열쇠가 있다. 그것은 시편 51편이다. 이 시편은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 이후 나단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고 쓴 회개의 시다. 죄를 짓고도 1년 가까이 침묵하던 다윗이 나단의 직면 앞에서 마침내 무릎을 꿇는다.
시 51:10-12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영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이 고백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는 간구다. 다윗은 왜 성령이 자기를 떠날까 봐 두려워했는가? 그것은 구약 시대의 성령 역사 방식에 대한 다윗의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사람들 속에 내주하지 않았다. 성령은 그들 위에 임했다가 그들이 죄를 지으면 떠나는 방식으로 역사하셨다. 사울왕이 그 대표적인 예다. 또한 구약 시대의 성령 역사는 선택적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삼손·기드온·사울·다윗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신 사람들에게만 임했다. 그들에게 임한 성령도 그들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 머무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죄를 짓는 순간 그 성령이 떠나 버리고, 그 자리에 악한 영이 들어오는 일이 벌어졌다.
삼상 16:14-15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을 번뇌하게 하온즉
성령이 사울을 떠나자, 악한 영이 그 자리를 채우고 그를 번뇌케 하였다. 한때 예언을 하며 하나님의 사람처럼 행동하던 사울이, 성령이 떠난 후에는 충성스러운 신하를 시기하고 죽이려 하는 자로 전락하였다.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도, 죄를 분별하는 영적 감각도 없다. 그것이 구약 경륜의 구조적 한계였다.
다윗은 눈앞에서 사울왕의 최후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같은 길을 걸을까 두려웠다. 구약 시대에 단 한 사람 귀신을 알아보고 수금으로 그것을 쫓아낼 수 있었던 다윗이었다. 구약에서 귀신을 분별하고 음악으로 그것을 쫓아낸 사례는 다윗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탁월한 영 분별력을 가졌는지를 보여 준다. 그 영 분별력이 가능했던 것도 위에 임한 성령의 도우심 때문이었다. 그는 성령의 임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죄를 지은 후 1년 가까이 침묵한 것도, 나단 선지자가 그를 직면하기 전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도, 성령이 내 속에 없기 때문에 죄의 심각성을 즉각적으로 깨닫는 내적 감각이 없었음을 보여 준다. 오늘의 성도라면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죄를 짓는 순간부터 내면 깊은 곳에서 양심 곧 영의 가책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다윗에게는 그 내주하시는 성령이 없었기 때문에, 예언자의 직면이 있기 전까지 그 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구약 성도의 한계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범죄 이후에 위에 머물러 있는 성령이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구한 것이다. 그 성령이 있어야만 영 분별의 은사도 있고, 지혜의 말씀도 있고, 지식의 말씀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윗의 저주시를 이해하는 네 번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다윗이 저주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구약 경륜상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속에 내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이 내 속에 없으면 무엇이 죄인지를 내부에서 가르쳐 주는 기능이 없다. 어떤 상황이 왔을 때 그 안에 있는 상처와 악한 영이 거름막 없이 폭발하게 되어 있다. 다윗의 저주는 악한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 없이 살아야 했던 구약 성도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그 한계 안에서 다윗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따랐지만, 성령의 내적 통제가 없다는 구약의 한계가 저주시라는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7. 구약과 신약의 경륜 차이에서 성령의 내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한계를 영원히 그냥 두지 않으셨다. 다윗의 시대로부터 약 400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새로운 경륜을 약속하셨다(B.C.585) 성령이 인간 안에 들어가 거하게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겔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 영을 너희 속에 두겠다." 이것이 신약 경륜의 핵심이다. 성령이 밖에서 임했다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속에 들어와 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이 약속이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이 "너희 속에" 계시겠다는 약속이다. 이 성령이 내주하심으로써 무엇이 달라지는가? 요한복음 16장 8절 이하에 따르면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성령이 내 속에 계시면 무엇이 죄인지를 내부에서 즉각적으로 깨우쳐 주신다. 원수의 혓바닥을 잘라 달라거나 그 자식이 고아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려 할 때, 성령이 그것이 죄임을 즉시 가르쳐 주신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결정적인 차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더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이 한번 들어오면 절대로 떠나지 않는가? 히브리서는 이에 대하여 엄중하게 경고한다.
히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 6:7-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 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을지라도 타락하면 다시 새롭게 될 수 없다는 경고다. 신약 시대에도 성령이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주하시는 이 은혜를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행동을 반복하면 결국 양심이 화인을 맞게 되고, 성령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된다. 양심은 영이고, 그 영이 성령의 음성에 반응하는 기관이다. 회개하지 않아서 악한 영이 양심을 덮어 버리면, 양심이 어긋난 행동과 말을 하게 된다. 그것은 구약 성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성령의 내주는 하나님의 강렬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 시대 내내 성령 없이도 하나님을 따르려 했던 성도들의 몸부림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한계를 끝까지 그대로 두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십자가,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이라는 일련의 구원 경륜을 통해 마침내 새 언약의 시대를 여셨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를 끝까지 놓지 아니하고 회개시키겠다는 뜻을 새로운 경륜으로 선포하셨다. 구약 시대에 성령이 위에만 머물다가 죄를 지으면 떠나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한 길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속에 넣어 주시는 새로운 경륜을 세우셨다. 이것이 신약의 은혜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에 날마다 순간순간 순종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삶이다.
구약 시대에도 삼손, 기드온, 사울, 다윗처럼 특별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역사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 임하는 방식이었고, 그것마저도 죄를 지으면 떠났다. 노아의 시대 이전에는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세기 6장에서 인간의 악함을 보신 하나님께서 "내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고 결정하셨다. 그 이후로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가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하셨다. 그 한계 안에서 구약의 성도들은 살았고,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령이 내 속에 없으면 죄가 죄인지를 내면에서 즉각적으로 알려 주는 기능이 없다. 그래서 상처가 폭발하고 악한 영이 역사할 때 그것을 막아내기가 훨씬 어렵다. 구약 성도들에게 그것이 한계였다.
8. 성령이 내주하는 오늘의 성도는 원수를 향해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는가?
성령이 내주하는 신약 시대의 성도는 원수를 향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다윗처럼 저주시를 쓰는 것이 허용되는가? 그렇지 않다. 신약의 경륜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나를 저주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하셨다.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무리를 향해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눈을 감았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이 신약이 보여 주는 원수를 향한 기도의 표준이다.
오늘의 성도가 원수에게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억울함, 그 고통, 그 분노를 있는 그대로 아뢰는 것은 기도다. 자백은 허용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구체적인 저주의 내용을 청원하는 것은 신약 성도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게 해 달라거나 저 사람의 혓바닥을 잘라 달라는 기도는 성령이 허용하지 않는다. 심판의 내용과 수위는 하나님만이 결정하실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주여,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다. 그것이 신약 성도에게 허용된 한계선이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이 말씀은 시편 109편의 저주시에 담긴 고아의 이미지를 예수님이 직접 역전시키신 것이다. 다윗의 가장 뼈저린 아픔이 고아처럼 버려진 것이었고, 그 아픔이 시편 109편의 저주로 터져 나왔다. 원수의 자식들이 고아가 되게 해 달라는 그 저주의 언어 안에는 다윗 자신이 고아처럼 버려진 상처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신다. 다윗의 저주 속에 담긴 고통이 결국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약속의 뿌리가 된 것이다. 저주시는 메시아 예언이 되었고, 그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더 나아가 진정한 신약적 기도는 그 한계선조차 넘어선다. 사울을 바울로 바꾸신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히는 저 사람도 바꾸실 수 있다는 믿음 위에서, 그가 변하여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기를 기도하는 것이 신약 성도의 기도다. 원수의 죄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용서해 달라고, 그 사람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음성에 따른 기도다. 가장 악독하게 나를 핍박하고 교회를 멸하려 했던 사울이, 누구보다 뜨겁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되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바로 그 사울일 수 있다.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자신의 몸을 망가뜨린 자, 인생을 돌이킬 수 없이 상처낸 자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는 일이다. 자신의 몸을 망가뜨린 사람, 자신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람을 향해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다. 스데반도 혼자의 힘으로 그런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7장 55절은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기록한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이 원수를 용서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원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원수를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구해야 한다. 성령의 충만 없이 원수를 향한 축복의 기도는 위선이 된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원수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임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 기도를 가능하게 하신다. 다윗처럼 저주의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 축복하고 중보하는 것, 그것이 성령을 받은 신약 성도의 삶이다. 저주하는 말 하지 말고, 저주했다면 그것을 고백하고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를 축복하고 그가 사울처럼 귀중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마땅한 삶이다.
9. 나오며
다윗의 저주시가 기록된 네 가지 이유와 그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다윗의 저주시는 단순히 한 신앙인의 실수나 감정 폭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쌓인 버림받음의 상처가 낳은 절규였고,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타고 들어온 악한 영들의 역사였으며,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메시아 예언의 도구로 허용하신 것이었고, 구약 경륜상 성령이 사람 속에 내주하지 않았던 경륜적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구약의 성도들이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특별한 은혜다. 구약의 성도들이 그 속에 성령 없이도 그토록 하나님을 따르려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반면 오늘의 성도들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이 엄청난 은혜를 받고도 구약 성도보다 못한 삶을 살기도 한다.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성령의 음성을 외면하고, 저주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는 것은 신약의 경륜을 오히려 구약보다 후퇴시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다윗과 다른 시대, 다른 경륜 아래 살고 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새 언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보내 주신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신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죄인지를 내면에서 즉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구약의 경륜적 한계는 신약의 성령 내주로 해결되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도는 저주하는 말을 삼가야 한다. 억울한 감정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저주의 내용을 청원하는 것은 성령의 통치를 벗어난 행위다. 신약의 성도에게 성령이 허용하시는 최대치의 기도는 "주여,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이며, 그보다 더 나아가서는 그 원수가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되기를 중보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의 성도가 드려야 할 기도는 원수를 향한 저주가 아니라 원수를 향한 중보다. 나라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악한 지도자를 끌어내리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다. 하나님이 느브갓네살을 하루아침에 미치게 만들어 권좌에서 쫓아낸 것은 백성들의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이었다. 나라를 살리고 전 세계를 살리는 마지막 열쇠는 우리 자신의 회개에 있다. 믿는 자들이 자기 집에서부터 회개 기도를 드리고, 그것이 전 세계 선교를 통해 확장될 때,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마지막 사람들을 세워 가실 것이다. 이것이 저주시 안에 담긴 하나님의 최종 메시지다. 저주시를 제대로 이해한 성도는 저주의 기도로 돌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본문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고, 치유되지 않은 것들을 회개의 눈물로 녹여내며, 성령의 내주에 감사하게 된다. 다윗이 상처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들었던 것처럼,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원수까지도 품어내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가 개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며 나아가 이 나라와 전 세계를 살리는 마지막 열쇠가 된다. 다윗의 저주와 상처가 메시아의 고난 예언이 되었고, 그 메시아의 고난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으며, 그 구원을 받은 우리는 이제 원수까지도 품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다윗의 시대는 저주시가 필요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시대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그만큼 결정적인 경륜의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아는 성도는 저주하지 않는다. 성령이 속에서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이 가르쳐 주는 대로 죄를 자백하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원수를 위해 중보하며, 그것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기도의 물결이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 저주시는 구약의 산물이다. 성령 내주의 은혜를 받은 오늘의 성도에게 저주시는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다. 그 자리에 중보가 서야 한다. 그리하여 저주 대신 축복을 선택하고 원수를 위해 중보하며, 나를 핍박한 그 사람이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6월 04일(목)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저주 시편을 어떻게 기독론적 관점에서 이해할 것인지 그 근거와 이유를 네 가지 핵심 원리로 설명합니다. 정보배 목사는 다윗의 격렬한 분노가 어린 시절의 거절감과 상처, 그리고 그 틈을 타고 역사한 악한 영의 영향력에서 비롯된 인간적 한계임을 밝히면서도, 하나님께서 이를 메시아의 고난을 예고하는 예언적 도구로 섭리 가운데 사용하셨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구약 시대는 성령이 인간 내면에 거주하지 않았던 구속사적 경륜의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하며, 성령이 내주하는 신약의 성도들은 원수를 저주하기보다 용서와 사랑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결국 이 설교는 다윗의 개인적 감정 토로를 넘어, 그 고통의 고백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참한 희생을 미리 보여주는 정밀한 계시였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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