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22(수) 수요기도회
제목: [마태복음 강해(49)] 혼인잔치의 비유와 세금 및 부활 논쟁에 나타난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마22:1~3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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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많은 무리가 환호하며 그분을 맞이했다(마 21:8-1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환호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곧바로 성전으로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성전을 정화하셨다(마 21:12-13).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 21:13) 예수님의 이 행동은 당시 성전 중심의 종교 체계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던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어떻게든 책잡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마 21:15, 45-46). 사람들은 이제 율법 해석이나 신앙 문제에 대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아닌 예수님께 나아와 묻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과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합법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에서 정죄할 빌미를 찾고자 혈안이 되었다.
이번 시간에 우리가 살펴볼 마태복음 22장의 내용(혼인 잔치 비유, 세금 논쟁, 부활 논쟁)은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펼쳐진다. 종교 지도자들은 교묘한 질문들을 던져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 시도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지혜로운 답변과 비유를 통해 그들의 악의를 드러내시고 오히려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와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선포하신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불신앙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논쟁과 갈등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와 분별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2. 혼인 잔치의 비유(마 22:1-14)는 무엇을 말씀하고 있으며, 이전 비유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예수께서는 성전 권위에 도전하신 후, 당신을 배척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세 가지 비유를 연이어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의 불순종과 완악함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놓치게 될 것임을 경고하는 메시지였다.
첫 번째 비유는 두 아들의 비유(마 21:28-32)이다. 이는 입술로만 순종하고 행함이 없는 종교 지도자들(둘째 아들)보다, 처음에는 거역했으나 후에 뉘우치고 순종한 세리와 창녀들(첫째 아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내부에서의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비유이다.
두 번째 비유는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 21:33-46)이다. 포도원(이스라엘)을 맡았으나 주인의 종들(선지자들)과 아들(예수님)까지 죽인 악한 농부들(종교 지도자들)에게서 포도원을 빼앗아 열매 맺는 다른 백성(이방인 교회)에게 줄 것을 말씀하셨다. 이는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옮겨갈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세 번째 비유는 혼인 잔치의 비유(마 22:1-14)이다. 임금(하나님)이 아들(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했으나, 먼저 청함 받은 자들(유대인들)이 핑계를 대고 거절하며 심지어 종들(선지자, 사도들)을 죽이기까지 하자, 임금이 진노하여 그들을 멸하고 길거리에서 아무나(이방인들, 죄인들) 데려와 잔치를 채우는 이야기이다. 이는 두 번째 비유와 유사하게 유대인의 거절과 이방인의 초청을 보여주지만,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추가된다.
그럼, 혼인 잔치 비유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마태복음 22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비유들로 대답하여 이르셨다”고 언급되 어 있다. 이것처럼, 이 비유는 사실상 두 개의 작은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1-10절)을 보자. 임금의 초청을 거절한 유대인들과, 대신 초청받아 잔치 자리를 채운 다양한 사람들(선한 자, 악한 자 모두 포함)의 이야기이다. 이는 앞선 두 비유의 내용을 종합하며, 하나님 나라의 초청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과 소외된 자들에게로 확장됨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14장 15-24절에도 비슷한 비유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초청받은 대상이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맹인, 저는 자들(이스라엘 내 소외 계층)과 길과 산울타리로 가서 강권하여 데려온 자들(이방인)로 더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빈자리를 반드시 채우신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이 거절했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 잔치가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자격 없어 보이는 자들이라도 초청하여 그 자리를 채우신다.
두 번째 부분(11-14절)을 보자. 잔치 자리에 들어왔으나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발견되어 쫓겨나는 이야기이다. 이는 첫 번째 부분과 연결되면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혹은 초청에 응답하여 잔치 자리에 들어왔다 할지라도, 합당한 준비(예복)를 갖추지 않으면 결국 탈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앞선 비유들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메시지이다.
따라서 혼인 잔치 비유는 단순히 유대인의 불신앙과 이방인의 구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합당한 자격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며, 구원 탈락의 가능성까지 암시하는 심오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3. 혼인 잔치 비유에서 ‘예복’은 무엇을 상징하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난 이유는 무엇인가?
혼인 잔치 비유의 두 번째 부분(마 22:11-14)은 잔치에 참여한 손님 중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발견되어 임금에 의해 쫓겨나는 충격적인 장면을 묘사한다. 임금은 그에게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고 묻지만,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원문: 입이 막히게 되었다), 결국 손발이 묶인 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이 비유를 이해하는 핵심은 ‘예복’(ἔνδυμα γάμου, 엔뒤마 가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있다.
첫째, 예복은 누가 준비해 주는가?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청받은 사람들이(선한 자, 악한 자, 가난한 자, 장애인, 도둑, 깡패 등) 각자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을 리 만무하다.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르면, 왕이나 귀족이 큰 잔치를 열 때는 손님들의 격을 맞추고 잔치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주인이 직접 손님들에게 입을 옷(예복)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손님에 대한 주인의 환대와 배려를 나타내는 동시에, 잔치 참여의 필수 조건이기도 했다. 따라서 비유 속의 예복 역시 임금(하나님)께서 값없이 마련하여 제공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예복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이 예복은 그리스도의 의(義)를 상징한다. 우리는 본래 죄와 허물로 더러워져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지만(롬 3:23),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의의 옷을 입혀 주셨다(롬 3:24-26; 고후 5:21; 갈 3:27; 계 19:8). 이 예복은 우리의 행위나 자격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셋째, 그는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는가? 그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교만 때문일 수 있다. 자신이 입고 온 옷(자기 의)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주인이 준 예복을 거절했을 수 있다. 둘째로, 무지 또는 부주의 때문일 수 있다. 예복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소홀히 여겨 입지 않았거나 잃어버렸을 수 있다. 셋째로, 불순종 때문일 수 있다. 예복을 입으라는 주인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거역했을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가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주인의 은혜와 잔치의 거룩함을 멸시하고, 잔치 참여자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그는 왜 쫓겨났는가?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단순히 복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義)를 주의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여전히 자신의 죄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 나라 잔치에 합당하지 않는 자였에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바깥 어두운 데’는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에서 제외된 상태를 가리키며, 실제 천국의 새 예루살렘 성의 바깥을 가리킨다. 그렇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합당하지 못해서 새 예루살렘 성에서 밖으로 쫓겨날 사람이 있다. 여기에는 그냥 '성 바깥'으로 쫓겨날 사람도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더 바깥쪽 어두운 곳'으로 쫓겨날 사람도 있다. 마치 천국의 빛의 나라와 같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 성은 빛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성밖 바로 바깥쪽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더 바깥쪽으로 갈수록 빛은 줄어들고 어둠으로 가득한다. 그러므로 '바깥쪽'보다 '더 바깥쪽 어두운 곳'이 더 어두운 곳이다. 그러므로 성밖도 차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복을 입지 않았던 그 사람은 성밖으로 쫓겨나도 더 바깥쪽의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밖 더 바깥쪽의 어두운 곳으로 던져져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이는 자기자신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고통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고로 이 비유는 실로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를 안겨준다. 하나님 나라의 초청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마 22:9-10), 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예복,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야 한다.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심지어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그분의 의를 힘입어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살지 않으면, 마지막 날 잔치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예수께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이 경고의 핵심을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의 초청(청함)은 보편적이지만, 그 초청에 합당하게 응답하여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사람(택함)은 많지 않을 수 있다ㅁ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의의 예복을 제대로 입고 있는가? 혹시 더러워진 채로 방치하거나, 세상의 누더기 옷을 더 자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날마다 회개를 통해 우리의 예복을 깨끗하게 빨며(계 7:14; 22:14),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4. 세금 논쟁(마 22:15-22)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의 올무를 피하셨는가?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예수님께,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들과 함께 와서 교묘한 질문으로 올무를 놓으려 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중시하며 로마 통치에 반감을 가진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헤롯 당원들은 로마와 결탁하여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친로마 세력이었다. 평소에는 서로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공동의 목표 앞에서는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것이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칭찬하며 아첨하는 말(“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거리끼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로 경계심을 풀게 한 뒤,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마 22:17). 그런데 이는 매우 교묘한 함정이 들어있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께서 “세금을 바치라”고 답하시면, 로마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유대 백성들의 반감을 사게 되고, 민족의 해방을 기대했던 메시아상에 흠집을 낼 수 있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노리던 바였다. 그리고 만약 예수께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답하시면, 이는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 행위로 간주되어 즉시 로마 당국에 고발당할 수 있었다. 이는 헤롯 당원들이 노리던 바였다.
그러므로 어떻게 대답하든 예수님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 수 있는 질문을 그들이 던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의를 간파하시고(마 22:18), 지혜롭게 대응하셨다.
첫째, 예수님은 세금 낼 돈(데나리온 동전)을 가져오라고 요구하셨다(마 22:19). 당시 로마 제국에서 통용되던 은화인 데나리온에는 로마 황제(당시 티베리우스)의 형상과 글(신격화된 칭호)이 새겨져 있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성전세를 낼 때는 이방인의 형상이 없는 세겔을 사용했지만, 일상적인 거래나 로마에 세금을 낼 때는 데나리온을 사용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 데나리온을 소지하고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들이 이미 로마의 통치 질서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게 하셨다.
둘째, 예수님은 동전에 새겨진 형상과 새겨진 글이 누구의 것인지 물으셨다(마 22:20).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는 의미를 살펴보자. 이는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으로 대표되는 세상 권세(국가)의 영역을 인정하고, 시민으로서의 의무(세금 납부 등)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로마 통치에 대한 직접적인 지지나 반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질서 안에서 세상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가르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롬 13:1-7 참조). 둘째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의미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창 1:27)과 온 세상의 궁극적인 주권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경배와 순종, 헌신을 다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세상 권세에 대한 의무가 하나님께 대한 의무보다 우선할 수 없으며, 신앙의 영역은 세상 권력으로부터 침해받을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고로 예수님의 이러한 답변은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세상 권세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원리를 제시한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이나 헤롯 당원들 모두 예수님의 답변에 책잡을 근거를 찾지 못했고, 그분의 지혜에 놀라 잠잠히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마 22:22).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올무를 피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기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오늘 우리 역시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국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감당하되, 궁극적인 충성은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5. 여섯 번째 질문: 부활 논쟁(마 22:23-33)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사두개인들의 오류를 지적하셨는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부활에 관한 질문으로 도전했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교 내에서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을 누리던 그룹으로, 모세 오경(토라)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부활, 천사, 영의 존재를 부인하는 합리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성향을 가졌다(행 23:8). 그들은 부활 신앙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겼고, 이를 논박하기 위해 교묘한 이야기를 만들어 예수님께 질문했다.
그들의 질문은 ‘수혼(嫂婚) 제도’(Levirate marriage)에 관한 것이었다(신 25:5-10). 이 제도는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주도록 한 율법 규정이다. 사두개인들은 일곱 형제가 차례로 한 여자와 결혼했으나 모두 자식 없이 죽었다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질문했다(마 22:24-28). 이는 부활이라는 개념 자체가 비논리적이고 모순적임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시기 전에, 그들의 근본적인 오류를 지적하셨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들은 부활 후의 삶을 현재 이 땅에서의 삶의 연장선상에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고로 결혼하고 시집가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의 방식이지, 부활 후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방식이 아닌 것이다.
둘째,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고 말씀하심으로써, 부활 후의 삶은 현재의 육체적, 사회적 관계를 초월하는 새로운 차원의 삶임을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실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사두개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제한하고 있었다.
셋째, 성경(모세 오경)을 알지 못ㅎ라고 있었다(오해함).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유일한 경전으로 인정하는 모세 오경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출애굽기 3장 6절 말씀을 인용하시며 부활의 증거를 제시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31-3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을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미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난 후였다. 만약 그들이 죽음으로 완전히 소멸했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그들이 비록 육신적으로는 죽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이며, 장차 부활하여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누리게 될 것임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말씀이다. 즉, 사두개인들이 신봉하는 모세 오경 안에 이미 부활 신앙의 근거가 명확히 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의 명쾌한 답변에 무리들은 진짜 놀랐고(마 22:33), 사두개인들은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교묘한 질문을 통해 오히려 부활 신앙의 진리와 성경 해석의 올바른 원리를 가르치셨으며, 당신의 신적 권위와 지혜를 다시 한번 드러내셨다. 오늘 우리 역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제한하거나, 자신의 이성과 경험에 말씀을 꿰맞추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하며 겸손히 말씀을 상고할 때, 우리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 가운데 굳건히 서게 될 것이다.
6. 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권위 앞에 서라
마태복음 22장에 기록된 세 가지 사건(혼인 잔치 비유, 세금 논쟁, 부활 논쟁)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집요하고 교활하게 공격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신학적, 정치적 함정을 파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때마다 놀라운 지혜와 권위로 그들의 올무를 피하시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선포하셨다.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뛰어난 랍비나 선지자가 아니셨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혼인 잔치 비유), 세상 권세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시는 분이시며(세금 논쟁), 생명과 부활의 주관자이시며 성경의 참된 해석자이시다(부활 논쟁). 그분의 말씀과 행동에는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신적 권위가 나타난다. 고로 우리는 그분의 권위 앞에 겸손히 엎드려 순종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잔치에는 누구나 초청받지만,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예복)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회개를 통해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며, 의의 열매를 맺는 자만이 합당한 참여자가 될 수 있다. 형식적인 종교 생활이나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셋째,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망한다는 것이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잘못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진리이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거부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한다고 했지만 정작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능력 또한 알지 못했다. 진리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넷째, 깨어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교묘한 질문과 유혹으로 우리의 믿음을 흔들려 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성경 말씀을 통해 분별력을 키워 세상의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동시에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는 지혜 또한 필요하다.
예수님을 향한 종교 지도자들의 공격은 결국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졌지만, 그것은 실패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악함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오늘 우리를 향한 세상의 공격과 비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자.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서,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자. 그리하여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잘했다 칭찬받는 충성된 종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설교요약] 본 영상의 설교는 마태복음 22장에 기록된 혼인 잔치의 비유와 이어지는 세금 논쟁 및 부활 논쟁에 나타난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설명합니다. 특히 혼인 잔치의 비유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완악함과 초대를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며, 구원이 죄인이나 이방인 등 예상치 못한 이들에게 확장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이 비유를 통해 초청받아 잔치에 들어왔더라도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쫓겨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가치(예복)를 모르고 교만하여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며 성도의 지속적인 회개와 믿음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또한, 세금 논쟁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지혜로운 답변을 통해 성도들이 세상의 통치와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취해야 할 합당한 태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025년 10월 22일(수)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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