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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r9RZSmMcQ2k
날짜 2026-05-13
본문말씀 레위기 10:8~20
설교자 정보배목사

2026-05-13(수) 수요기도회

제목: [레위기강해(07)] 신약의 성도들도 과연 아론과 같이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레10:8~2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r9RZSmMcQ2k

 

 

1. 들어가며

  레위기는 흔히 신약 성도에게 가장 거리감이 큰 책으로 여겨진다. 제사 규례와 정결 규례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어 옛 이스라엘의 의식 문서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기는 단순히 고대의 종교적 매뉴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으로 부르신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들과 일반 백성이 어떻게 구별되며, 또한 그 직분의 무게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가르치는 영적 교본이다.

  레위기서는 그 이름 그대로 레위인들이 지켜야 할 법도를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일반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구별되어 있음을 본다. 더 나아가 그 구별이 오늘날 신약 시대에 어떻게 적용되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가운데 어떤 자리에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한국 교회 안에는 오랫동안 한 가지 큰 오해가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표현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근거로 모든 신자가 곧 제사장이고, 따라서 누구든지 강단에 설 수 있고, 누구든지 직접 가르치며, 누구든지 같은 신분이라는 식의 평등주의적 해석이 무비판적으로 퍼져 왔다. 이러한 해석은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을 한국적으로 잘못 번역하고 잘못 적용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본래 의미는 무엇인가? 루터가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했을 때 그가 실제로 말한 것은 무엇이며, 이를 토마스 뮌처와 같은 자들은 어떻게 왜곡했는가? 신약 시대의 성도는 진정 어떤 신분에 속한 자이며, 천국에서 우리가 받게 될 보상은 모두 동일한가, 아니면 차등이 있는가?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신약의 성도들도 과연 아론과 같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를 헬라어 원문과 종교개혁사, 그리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따라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2. 레위기서는 어떤 책이며, 레위인과 제사장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레위기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레위 지파의 기원을 살펴야 한다. 레위는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셋째 아들이었다. 야곱이 열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셋째 아들 레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보여 따로 구별되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 지파를 따로 떼어서 주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레 3:41,45). 이로써 레위 지파는 다른 열한 지파와 구별된 자들이 되었다.

  다른 지파는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일반적인 삶을 살았다. 그들은 절기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오고, 죄를 지으면 속죄제를 드리러 오고, 첫 열매와 십일조를 가지고 와서 드렸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그러한 일상의 삶에서 떨어져 나와 오직 회막의 봉사를 위해 구별된 자들이 되었다(레 3:6-7, 8:14-16). 오늘날로 말하면 일반 지파는 그냥 살아가는 평신도에 해당하고, 레위 지파는 회막의 직무를 감당하는 헌신된 평신도 그룹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레위인들 중에서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목회자와 사도급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레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니 곧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가 있었다. 이 세 종족이 레위 지파를 이루었고, 회막에서 각기 다른 직무를 감당했다. 게르손 자손은 회막의 휘장과 덮개 등 천막 부분을 운반했고, 고핫 자손은 분향단과 떡상과 법궤 같은 거룩한 성물을 운반했으며, 므라리 자손은 회막의 나무 기둥과 받침을 운반했다. 각자에게 정해진 직무가 있었던 것이다(민 3장).

  그런데 하나님은 레위 지파 가운데서도 다시 한 그룹을 따로 불러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주셨다. 이들은 레위의 둘째 아들 고핫의 손자인, 아므람의 아들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다. 아론은 나답과 아비후, 엘르아살과 이다말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세워졌다. 그러므로 레위인은 모두 제사장 계열에 속한 사람이지만, 모든 레위인이 다 제사장은 아니었다. 제사장은 오직 아론과 그의 자손들만이 될 수 있었고, 그 직분은 혈통으로 유전되었다. 일반 레위인이 따로 제사장으로 세워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레위인과 제사장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가? 제사를 직접 집례하는 권한이다. 제사장은 백성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회막 안에서 봉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백성의 송사를 재판하며, 백성에게 복을 선포하는 직무를 감당했다. 반면 레위인은 제사장이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자들이었다. 회막의 성물을 운반하고, 제사에 쓰일 것을 준비하며, 회막을 지키고 청소하는 일들이 그들의 몫이었다. 나중에는 성전 문지기의 일과 찬양하는 일을 추가로 담당하게 된다. 

  이렇게 레위인과 제사장이 무슨 일을 하느냐를 규정해 놓은 책이 바로 레위기서이다. 곧 레위기서는 하나님이 쓰시는 종들이 어떤 직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를 정확히 가르치는 책이다. 1장부터 5장까지는 다섯 가지 제사의 기본 규례를, 6장과 7장은 그에 대한 보조 규례를 가르치고, 8장은 제사장 위임식의 일곱 가지 절차를, 9장은 아론의 첫 제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0장에 이르러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3.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과 포도주 금지는 어떤 경건성을 요구하는가?

  아론이 제사장 위임식을 마치고 9장에서 최초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사르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이것이 곧 '여호와의 불'이었다(레 9:24). 그 후 그 불은 번제단 위에서 끊어지지 않게 계속 유지되어야 했다. 그런데 아론의 첫째 아들 나답과 둘째 아들 아비후가 제사 실습 차원에서 분향단의 향로에 향을 피우게 되었다. 그 향을 사를 때 사용해야 할 불은 반드시 번제단의 거룩한 불, 곧 하늘에서 내려온 여호와의 불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그 불이 아닌 다른 불을 가져다 향을 피웠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레 10:1-2).

  여기서 하나님은 큰 교훈을 주신다. "나를 위해 구별된 자는 나를 위해 봉사할 때에 조심하라. 내가 시키는 법대로 정확히 행해야만 한다. 네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곧 거룩한 직분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경고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모든 제사장이 영원토록 지켜야 할 규례를 명하신다(레 10:9).

레 10:9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제사장은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실 수 없었다. 만약 술기운이 있는 상태로 회막에 들어가면 즉사한다는 무서운 경고였다. 왜 이렇게 엄중한가? 그 이유가 곧 이어지는 말씀에 분명히 드러난다(레 10:10-11).

레 10:10-11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제사장의 본질적 직무 가운데 하나는 분별이다. 무엇이 거룩하고 무엇이 속되며, 무엇이 부정하고 무엇이 정한지를 가려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술에 취해 정신이 흐려져 있는 자가 어떻게 그러한 분별을 할 수 있겠는가? 자기 자신이 죄를 짓고 있는 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고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지도자의 경건성이 가지는 무게이다.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 죄가 많은 자들로 가득 차면 그 나라가 잘못된 길로 가듯이, 한 교회의 지도자가 흐트러지면 그 교회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사사기 시대를 보라. 백성이 타락하니 하나님은 악한 주변국의 지도자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부르짖게 하셨다. 그리고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잘못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교회 전체의 타락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직시해야 한다.

  필자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안타까운 현실을 떠올린다. 오늘날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술을 가까이한다는 사실이다. 신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기숙사에서도 몰래 술을 마시는 자들이 있었다. 술을 끊지 못한 채 신학교로 들어와 그 습관을 이어가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본인의 의지로 충분히 절제할 수 있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모습은 회막에 들어가는 자의 자격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필자도 솔직히 술이 당기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부친께서 술을 즐기셨던 까닭에 그 영적 흔적이 내 안에도 있다. 그러나 회막에 들어가야 할 자가 술 냄새를 풍긴다면 어떻게 백성을 가르치겠는가? 그래서 절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다. 회막의 직무를 감당하는 자에게 주어진 거룩한 명령이며, 어기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엄중한 규례이다. 더 나아가 이는 제사장에게만 적용되는 규례가 아니었다. 나실인의 경우는 더 무거웠다. 회막에 들어갈 때만이 아니라 서원하는 모든 날 동안 포도주를 비롯한 모든 술을 입에 대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구별하여 드린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경건성의 수준이다. 우리는 이 수준 앞에서 자신을 깊이 점검해야 한다.

 

4.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왕 같은 제사장"은 원문상 어떤 의미인가?

  이제 본격적으로 본 강의의 핵심 주제로 들어가자.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 가장 흔하게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가 베드로전서 2장 9절이다(벧전 2:9).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필자도 한때 이 말씀을 근거로 제자 훈련을 열심히 시킨 사람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외치며 서로에게 신앙 고백을 시켰다. 모든 성도가 왕이며 동시에 제사장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깊이 살펴보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글 성경은 번역 성경이지 원문 성경이 아니다. 번역에는 한계가 있고, 그래서 원문에 비추어 다시 살펴야 할 부분이 있다.

  헬라어로 제사장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는 '히에류스(ἱερεύς)'이다. 그리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뜻의 동사는 '히에라튜오(ἱερατεύω)'이며, 그 명사형은 '히에라테이아(ἱερατεία)'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설명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롬 15:16).

롬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로서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히에라테이아'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곧 직무로서의 제사장 사역이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에라테이아'가 아니다. 그것은 '히에라튜마(ἱεράτευμα)'이다. 이 단어는 '직무'가 아니라 '체계' 또는 '제사장 집단의 구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은 "너희는 왕에 속한 제사장 체계에 속한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모든 성도가 한 명 한 명 제사장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성도 전체가 하나의 거룩한 제사장 체계 안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이 차이가 왜 중요한가? 제사장 체계는 단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대제사장이 있고, 그 아래 제사장이 있으며, 그 아래 레위인이 있고, 또 그 아래 느디님 사람(회막에 봉사하도록 바쳐진 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을 "제사장 체계에 속한 자"라고 할 때, 그 체계 안에서 누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사람마다 각자 다르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들을 보내실 때 각자의 위치를 정하여 보내신다. 대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자로 보내신 자가 있고,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자로 보내신 자가 있고, 레위인의 직무를 감당할 자로 보내신 자가 있다. 그리고 본래는 멸망 받아야 했으나 항복하여 회막 봉사에 받쳐진 나무패며 물긷는 자(나중에 느디님 사람이라 불림)의 위치로 보내신 자도 있다. 이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왕 같은 제사장"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여 "내가 곧 제사장이다"라고 생각해 버렸다. 이로 인해 자신의 부르심과 분량을 살피지 않은 채 함부로 목회자의 길에 뛰어드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 결과 무엇이 일어났는가? 부적격자가 강단에 서게 되었고,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사역자가 양산되었으며, 결국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채 평생 헤매다 가는 안타까운 인생이 속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다시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우리는 왕에 속한 제사장 체계 안에 속한 자들이며, 그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를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

 

5.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은 본래 무슨 뜻이었으며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잘못 이해하게 된 데에는 종교 개혁사의 한 흐름이 깊은 영향을 끼쳤다. 곧 마르틴 루터가 주장한 만인 제사장설이 그것이다. 그런데 루터가 본래 의도한 만인 제사장설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먼저 종교 개혁의 배경을 잠시 살펴보자. 1517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시작된 종교 개혁의 직접적 도화선은 면죄부 판매였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게 했다. 면죄부를 사면 연옥에 있는 사람도 천국으로 갈 수 있고, 이미 죽은 부모의 영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의 가르침이 횡행했다. 이는 명백한 권력 남용이자 착취였다.

루터는 이러한 부당함에 분노하여 신학적 반박을 시도했다. 그가 근거로 든 핵심 구절 중 하나가 히브리서 9장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으므로, 이제 사람이 죄 용서를 받기 위해 사제에게 가서 고해 성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자백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이것이 곧 루터가 주장한 만인 제사장설의 본질이었다.

다시 말해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은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다"라는 신분상의 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든지 사제라는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라는 접근성에 대한 선언이었다. 독일어 원문을 보아도 루터가 말한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제사장 체계"이지, "모든 사람이 곧 제사장"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글 번역으로 들어오면서 "만인 제사장설"이라는 표현이 자리 잡게 되었고, 이것이 마치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다"라는 뜻으로 오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루터의 본래 의도와 무관한 방향으로 이 가르침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1525년 토마스 뮌처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농민 운동을 일으켰다.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면 사제 계급도 필요 없고, 지주 계급도 필요 없다. 우리 모두 평등한 형제다. 따라서 사제도 지주도 다 없애자." 이로 인해 독일 전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토마스 뮌처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그가 뿌린 평등주의의 씨앗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흐름은 재세례파로, 다시 형제회로, 그리고 후대에는 위트니스 리와 신천지 같은 이단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들 그룹의 공통된 특징은 무엇인가? 직분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목사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모두를 형제라 부르며, 권위 구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 집단 내부에는 여전히 지도자가 있고 권력자가 있다. 다만 명칭만 평등하게 위장한 것뿐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영지주의적 평등주의이며, 사회적으로는 공산주의적 발상과 닮아 있다.

루터 자신도 후에 이러한 왜곡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본래 의도가 그것이 아니었음을 거듭 해명했다. 그러나 한 번 잘못 풀려 나간 가르침은 쉽사리 바로잡히지 않았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오해는 여전히 한국 교회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종교 개혁이 모든 면에서 옳았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종교 개혁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잘못된 가르침까지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일은 위험하다. 칼뱅이 정립한 이중 예정론, 곧 만세 전에 어떤 사람은 천국 갈 자로 어떤 사람은 지옥 갈 자로 예정되어 있다는 가르침 역시 성경에서 분명히 입증되지 않는 교리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지, 처음부터 일부를 지옥에 예정해 두셨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결국 만인 제사장설은 그 본래의 의미인 "누구든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진리로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어느 직분에 부르심을 받은 자인지를 신중히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6. 달란트 비유와 계시록 1장 5~6절은 천국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

성경은 천국에서의 보상이 모든 자에게 동일하지 않음을 분명히 가르친다. 이것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본문이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이다(마 25:14-15).

마 25:14-15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길 때 그 분배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각각 그 재능대로"이다. 곧 각 종에게 주어진 그릇의 크기에 따라 다른 분량의 달란트가 맡겨졌다. 이는 결코 차별이 아니라 적합한 배정이다. 한 달란트 그릇의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면 감당하지 못한다. 다섯 달란트 그릇의 사람에게 한 달란트만 맡기면 충분히 활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각자에게 적합한 분량을 주신다.

여기서 종이라 함은 그저 평범한 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본문의 헬라어와 문맥을 살피면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자들, 곧 요한계시록 7장에 등장하는 14만 4천 명의 인 맞은 종들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하나님의 일을 위해 따로 구별된 자들 사이에서도 그 그릇과 분량이 다르다는 것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각각 그것으로 장사하여 배의 결과를 남겼다. 두 사람 모두 주인에게 같은 칭찬을 받았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동일한 칭찬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양의 크기가 아니라 충성의 비율이 평가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한 자가 주인 앞에 칭찬받는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어떠했는가? 그는 자기에게 적게 주어진 것을 불만으로 여기고 그것을 땅에 묻어 두었다. 그의 변명은 이러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이는 주인을 향한 왜곡된 인식이며, 일하기 싫어하는 자의 핑계이다. 주인은 이 종을 어떻게 처분했는가?(마 25:30)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여기서 "바깥 어두운 데"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사실 비교급으로, 정확히 옮기면 "더 바깥의 어두운 곳"이다. 이는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성 밖에서도 더 멀리 떨어진 고통의 장소를 의미한다. 거의 지옥에 방불한 징계의 자리이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았음에도 충성하지 못한 자가 받게 될 무서운 결말이다.

이러한 차등 보상은 요한계시록 1장 5절과 6절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계 1:5-6).

계 1:5-6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왕"으로 삼으셨다고 하지 않는다. "왕국"으로 삼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제사장"이 아니라 "제사장들"로 삼으셨다고 한다. 왕국이라 함은 무엇인가? 그 안에 왕이 있고, 장관이 있고, 백성이 있고, 종이 있는 체계이다. 제사장들이라 함도 단순한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대제사장과 제사장과 레위인과 느디님 사람이 함께 이루는 위계 체계이다.

곧 신약 성도가 받게 될 천국의 모습은 평등한 단일 신분의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각자의 충성에 따라 분명한 차등을 두시는 질서 있는 나라이다. 어떤 자는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서 어린 양께 가장 가까이 있고, 어떤 자는 변두리에서 간신히 성 안에 들어가 살게 된다. 이것이 천국의 실제이다.

 

7. 신약 성도가 신약의 레위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 역할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 시대의 평신도는 구약의 어떤 계열에 해당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신약의 평신도는 본질적으로 레위인급에 해당한다. 그 근거를 살펴보자.

레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었는가? 그 기원은 출애굽 사건에 있다.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신 열 번째 재앙은 모든 장자의 죽음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와 가축의 첫 새끼는 어린 양의 피로 인하여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본래는 죽었어야 마땅했으나 살아난 그 장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각 가정의 장자를 모두 회막으로 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이에 하나님은 한 지파 전체를 그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자신께 바치도록 정하셨다(민 3:41).

민 3:41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이렇게 레위 지파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받쳐진 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감당해야 할 직무는 무엇이었는가?(민 8:14-15, 19)

민 8:14-15 "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민 8:19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라"

레위인의 직무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봉사였고, 다른 하나는 백성을 향한 매개 역할이었다. 회막에서 봉사하며 제사장을 도왔고, 이스라엘 백성과 거룩한 성막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감당했다. 진을 칠 때에도 이스라엘 12지파가 사방에 진을 치는 그 안쪽, 곧 회막을 둘러싸는 위치에 레위인 세 종족이 자리를 잡았다. 동쪽에는 아론 자손이, 남쪽에는 고핫 자손이, 북쪽에는 므라리 자손이, 서쪽에는 게르손 자손이 진을 쳐서 일반 백성이 회막에 함부로 접근하여 죽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완충지대를 이루었다.

이러한 레위인의 역할은 신약 시대에 그대로 적용된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자들인가?(고전 6:19-20)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어린 양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바 된 자들이다. 본래는 죽었어야 마땅한 자들이었으나 그 보혈로 살림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구약의 장자에 해당하며, 동시에 그 장자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레위인의 위치에 서게 된 자들이다. 모든 평신도는 곧 신약의 레위인이다.

그러면 신약의 레위인인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첫째, 불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중간 매개 역할이다. 곧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이다. 둘째, 회막에서 제사장을 돕는 봉사이다. 곧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의 사역이 잘 이루어지도록 돕는 일이다. 진설병을 굽고, 분향단의 향을 준비하며, 성소를 청결히 유지하던 그 일들이 오늘날의 교회 봉사로 이어진다. 안내, 찬양, 교육, 구제, 행정 등 교회의 모든 봉사가 곧 신약 레위인의 직무이다.

셋째, 영적 전쟁의 임무이다. 구약에서 일반 12지파는 가나안의 일곱 족속과 전쟁하여 그들을 쫓아내고 땅을 차지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직접 전쟁에 나가지 않고 중간에서 회막을 지켰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사정이 다르다. 신약의 레위인인 우리는 직접 영적 전쟁을 감당해야 한다. 불신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악한 영들을 쫓아내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영적 전쟁을 많이 감당할수록 천국에서 우리의 기업, 곧 차지하는 땅의 면적이 넓어진다.

보통 평신도가 천국에서 차지하는 땅은 50평에서 300평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혼 구원에 헌신하고 영적 전쟁에 충성한 자는 그 기업이 크게 확장된다. 이것이 신약의 레위인인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부르심이며 동시에 무거운 책임이다.

 

8. "예정은 있지만 고정은 없다"는 진리는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주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영적 진리 하나를 나누고자 한다. 곧 "예정은 있지만 고정은 없다"는 명제이다. 이것은 내가 깊이 묵상하고 체험하면서 얻게 된 표현으로, 어쩌면 "만인 레위인설"이라 부를 만한 가르침이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실 때 각자의 위치와 신분을 정하여 보내신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곧 대제사장급, 제사장급, 레위인급, 느디님 사람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 이것이 "예정"이다. 하나님은 무계획하게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시지 않는다. 각자의 그릇과 부르심에 따라 정확히 자리를 정해 두신다.

그러나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더해진다. 그 예정된 자리가 영원히 고정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충성과 헌신, 그리고 회개와 영적 전쟁을 통해 본래의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반대로 게으름과 불순종을 통해 본래의 자리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곧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 진리를 가리킨다.

나의 경우가 그 산 증거이다. 처음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실 때, 나에게는 본래 정해진 위치와 신분이 있었다. 본래 나는 세례 요한 마을에 속한 자로 보내심을 받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를 외치는 자, 곧 길을 예비하는 자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내가 25세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이후, 본래의 분량보다 더 깊이 충성하기 시작했다. 모든 부서를 맡을 때마다 120퍼센트를 드리려 했다. 목사님이 "그만해도 된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더 헌신하니 하나님은 본래의 위치보다 더 높은 위치로 나를 옮겨 주셨다. 어느 날 천국에 데려가셔서 엘리야를 만나게 하셨고, 엘리야가 나에게 칼을 건네 주었다. 이는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거짓 선지자들을 멸하고 칼로 그들을 처단했던 그 권세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본래 나에게는 없었던 불과 칼의 능력이 더해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세례 요한 마을에서 엘리야 마을로 옮겨졌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분량에서 최선을 다할 때 그 충성에 합당한 은사와 능력을 더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너는 이만큼이니까 더는 안 된다"라고 못 박아 두시지 않는다. 우리의 열심과 노력과 수고와 헌신을 주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기억하시며 더하여 갚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두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작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영영 작은 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면 그 자리가 더 큰 자리로 확장된다. 반대로 큰 자리에 있다고 해서 영원히 그 자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게으르고 불충성하면 그 자리도 잃을 수 있다.

이 진리는 천국이 결코 운명론적 결정으로 닫혀 있는 곳이 아님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며, 그 의지가 충성과 헌신으로 표현될 때 더 큰 영광으로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자리에서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더 헌신해야 한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더 큰 일이 맡겨진다는 주님의 약속을 마음 깊이 새기고 살아가야 한다.

 

9. 나오며

  지금까지 우리는 신약의 성도들도 과연 아론과 같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레위기서가 어떤 책이며 레위인과 제사장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과 포도주 금지 규례가 주의 종에게 요구하는 경건성의 무게가 어떠한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왕 같은 제사장"이 헬라어 원문상 '히에라테이아'가 아니라 '히에라튜마', 곧 '제사장 직무'가 아니라 '제사장 체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더 나아가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이 본래는 사제를 거치지 않고 누구든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접근성에 관한 가르침이었으나, 토마스 뮌처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모든 신분 구분을 철폐하는 영지주의적 평등주의로 왜곡되어 재세례파, 형제회, 신천지로 이어진 흐름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와 요한계시록 1장 5~6절을 통해 천국에서의 보상이 결코 동일하지 않으며 행한 대로 차등이 있음을, 신약 성도가 신약의 레위인으로서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마지막으로 "예정은 있지만 고정은 없다"는 영적 진리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주는지를 함께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자신이 어느 자리에 부르심을 받은 자인지를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 자신이 대제사장급인지, 제사장급인지, 레위인급인지, 느디님 사람급인지를 진지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 자리를 함부로 결정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둘째,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큰 그릇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작은 그릇을 땅에 묻어 두는 어리석음에서 떠나야 한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동일한 칭찬을 받았듯이, 자기에게 주어진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주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삶이다. 셋째, 회막에 들어가는 자의 경건성을 회복해야 한다. 술과 세상의 흥취에 영혼이 흐려진 상태로는 결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할 수 없다. 자신을 정결케 하여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이는 목회자에게만이 아니라 신약의 레위인인 모든 성도에게 요구되는 본질적 자세이다. 넷째, 만인 제사장설의 잘못된 이해에서 떠나야 한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평등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우리가 제사장 체계에 속한 자들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충성해야 한다는 본래의 진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질서가 바로 세워지고 부적격자가 강단에 함부로 서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다섯째, "예정은 있지만 고정은 없다"는 진리를 붙들고 끝까지 헌신해야 한다. 오늘의 자리가 영원한 자리가 아니다. 우리의 충성에 따라 하나님은 더 큰 은사와 능력을 더하여 주시며, 더 높은 자리로 이끌어 주신다. 그러므로 결코 좌절하지 말고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장 체계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분명히 알고, 그 자리에서 끝까지 충성함으로 본래의 분량보다 더 풍성한 은혜로 업그레이드되며, 마침내 천국에서 넓은 땅과 높은 집과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얻어 영원토록 어린 양과 함께 거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5월 13일(수)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레위기에 나타난 제사장 제도를 통해 신약 시대 성도의 정체성과 직분을 재정립하며, 대중적으로 알려진 만인제사장설의 오해를 바로잡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저자 정보배 목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권권을 가진 레위인적 존재가 되었음은 분명하지만, 천국에서도 사역의 분량과 영적 수준에 따른 제사장 체계와 위계가 엄연히 존재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아론의 아들들이 부정한 불을 사용하다 죽임당한 사건을 통해 지도자의 경건성과 법도 준수가 얼마나 막중한 책임인지를 경고하며, 성도들에게는 각자에게 맡겨진 달란트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합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적 예정은 고정된 운명이 아니라 성도의 헌신과 회개를 통해 하늘의 기업과 신분이 확장될 수 있다는 영적 성장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강의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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