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서 고린도전서 강해가 끝마쳐진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교회들 가운데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들의 성숙되지 못한 신앙이 어떻게 지체들에게 역사하고 있었으며, 온전하지 못한 부활신앙은 또한 어떤 폐해를 주고 있었는지까지도 살펴보았다. 그중에서 오늘은 바울이 자기의 마음 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꺼내놓았다.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진정 바라고 바랬던 성숙한 신앙은 대체 무엇이었던 것일까? 그 비밀이 오늘 밝혀진다.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는 총 16장으로 구성된 것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다. 그중의 핵심 사항은 1장부터 15장 안에 들어 있으니, 고린도전서는 15장으로 끝났다고 해도 큰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6장은 일종의 '첨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6장은 너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장에서 자신의 속에 있는 마음을 마지막으로 꺼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조금만 비집어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의 속마음이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도를 하기 전에 그가 한 말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누가 되었든지 저주를 받으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6:22). 바울은 왜 이러한 말을 마지막으로 써야 했던 것일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좀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 첨언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의 말은 알고 보면 참으로 뼈아픈 말이기 때문이다.
2. 고린도전서 16장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고린도전서는 총 16장으로 구성된 편지로서 내용을 뜯어보면 총 세 부분인 것을 알 수 있다. 첫 부분은 1:1~9의 도입부이며, 중간 부분은 1:10~15장까지의 본론부요, 끝 부분은 16장으로서 종결부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본론부는 또다시 1:10~6장까지의 전반부가 있다. 이 전반부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도덕적 무질서에 대한 바울의 책망과 훈계가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1~4장까지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분파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5장에서는 근친상간의 음행의 문제를 그리고 6장에서는 성도 간의 소송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7장~15장까지의 후반부인데, 여기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신앙 생활의 중요한 현안들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 답변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 7장에는 성도들의 결혼과 이혼과 재혼에 관하여 기술되어 있고, 8~10장에서는 우상 제물의 취식 문제, 11장에서는 예배 중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와 성찬식 전에 진행되었던 애찬식이 갖고 있는 문제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2~14장에서는 고린도전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의 문제를 다룬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처럼 성령의 은사가 풍성히 나타난 교회가 성경에는 나오지 않으며,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그렇게 시끄러운 교회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12장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9가지 은사와 한 몸 됨의 관계 그리고 성령의 직분의 은사를 다루고 있고, 13장에서는 사랑의 은사를, 그리고 14장에서는 방언과 예언 그리고 방언 통역의 은사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5장에서는 고린도전서에 유일하게 나오는 교리에 관한 부분으로서 '부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가능한가? 그리고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며, 부활 때에는 어떠한 몸을 입는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종결부로서 16장이 있다. 오늘은 이 마지막 종결부를 쭉 살펴보고 그것을 정리하고자 한다. 종결부로서 고린도전서 16장은 또다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1~4절에서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의 수집 및 전달 방법에 대한 지침이 나온다. 그리고 5~12절에서는 바울의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 및 디모데 파송 소식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궁금해하고 있는 아볼로의 고린도 방문 여부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3~24절에서는 바울의 마지막 권면 및 문안 인사 그리고 축도가 나온다.
3. 가난해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바울은 어떻게 연보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가?
사실 고린도 교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 예루살렘 교회는 '할아버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전도로 인하여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고, 이어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한 전도자들 곧 바울의 전도팀에 의하여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가 A.D.53~55년경에 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롬15:25~26). 아마도 예루살렘의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한 대로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므로 그들로부터 영적인 소산을 물려받아 성장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게 바울은 이미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바와 같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면서 어떻게 연보를 할 때에, 억지나 인색함으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과 기쁨의 연보가 될 수 있는지를 말한다. 그것은 매주 첫 날(당시에 이방인들은 안식 후 첫 날인 오늘날의 '주일'에 모였다)에 각 성도들이 자기의 형통함의 정도를 따라 미리 연보할 것을 따로 떼어 두었다가 바울이 갈 때에 연보를 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고전16:2). 하나님께서는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내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고후9:7). 또한 미리 준비하여 연보하는 것이 참 연보다운 연보이기 때문이다(고후9:5).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드린 연보를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그것은 원래 바울이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것이 바른 것이지만 혹시 모를 불신을 종식시키기 위해, 고린도 교회가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 주고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바울도 함께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과 같이 가겠노라고 말한다(고전16:3~4). 그렇다. 바울은 교회에서 물질이 중요한 문제인 만큼, 헌금의 투명한 전달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역할까지도 기꺼이 내려놓은 것이다.
4.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어떤 방문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먼저, 구제 헌금의 문제를 언급한 바울은 이제 자신의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을 그들에게 밝힌다. 그것은 당시에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고 있었지만 육로를 이용하여 마케도냐(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서 아가야(아덴, 고린도)로 이동할 계획이라고 말한다(고전16:5~6). 그리고 만약 고린도에 도착하게 된다면 고린도에서 겨울을 보낼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다음 선교지로 생각하고 있는 로마와 서바나(스페인)에 대한 계획을 고린도 교회에 전달하고 그 교회로부터 선교 지원을 받았으면 한다고 말을 꺼낸 것이다(고전16:5~6). 이러한 고린도 방문 계획은 일시적으로 잠깐 스쳐 지나가는 고린도 교회 방문이 아니라 고린도에서 약 3개월 정도 머물면서 다음 선교지를 향해 출발하겠다는 계획인 것을 밝힌 것이다(고전16:7).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도 활동으로 세운 교회들 가운데 두 번째로 바울이 애지중지한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2차 전도 여행 때에 얼마 머무르지 못했던 마케도냐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그에게 몇 번이고 선교 헌금을 보내왔는데, 고린도 교회는 상당히 큰 규모의 교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합당한 사례비도 주지 않았을 뿐더러 선교 헌금이나 구제 헌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은 하나님께서 에베소에 열어 놓은선교의 문을 닫을 수 없기에 그곳에 잠시나마 머물러 있지만(물론 동시에 대적자들의 방해도 심했다), 곧 고린도에 가게 된다면 4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지원을 받고 싶다고 말을 꺼낸 것이다(고전16:6). 고로 바울의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과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관한 말씀을 종합해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마땅히 실천해야 할 실제적인 사랑과 헌신에 대해 지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받은 은혜가 무궁무진한데도 불구하고 구제 및 선교 활동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 받은 은혜는 많았지만 그것을 갚지 못하고 받기만 하는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내는 헌금을 가리켜 '은혜'라고 일부러 둘러서 표현한 것이다(고전16:3). 받은 은혜를 그들은 자기들만 받고 다른 이들에게는 그 은혜를 나눠 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와 아볼로의 소식을 그들에게 전달해 준다(고전16:10~12). 사실 바울이 이 고린도 전서의 편지를 쓰고 있을 때에 그는 이미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 상태였다(고전4:17). 그러면서 그들에게 디모데에 대해 소개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아들과 같다고 했으며(고전4:17), 자신과 같이 주의 일에 힘쓰는 자라고 했다(고전16:10). 그러므로 그가 나이가 어리다 하여 업신여기지 말고 바울을 영접하듯이 그를 영접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래서 그가 그 교회에 가더라도 멸시받지 않고 평안히 다시 자기에게로 올 수 있도록 편의를 봐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돌아올 때에는 그 교회에 있는 몇몇 형제들을 같이 보내 달라고 요청을 한다. 이는 그 교회가 이전에 자기에게는 제대로 교역자 대우를 하지 못했지만 이번에 보낸 디모데에게만큼은 합당한 대우를 해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그들이 궁금해하는 아볼로의 소식도 전해 준다(고전16:12). 왜냐하면 그들은 아볼로가 오기를 많이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 교회가 보낸 형제들과 함께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것을 많이 권했음을 언급한다. 하지만 아볼로는 그때는 갈 뜻이 전혀 없고 기회가 되면 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는 아볼로의 사려 깊은 행동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 교회가 분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아볼로가 그곳을 방문하고 이어서 바울이 또 방문하면 틀림없이 아볼로파와 바울파가 대립하여 또다시 서로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복음 사역자들에게는 자기에게 맡겨진 은사와 달란트를 따라 교회를 섬기고 온전케 해야 한다. 하지만 언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복음 사역자들은 때마다 일마다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5. 바울의 마지막 권면은 무엇이며, 어떤 문안 인사를 했는가?
바울은 늘 고린도 교회를 걱정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있어서는 정말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는데, 그들의 성품과 행동 그리고 말은 여전히 어린아이 같아서 분쟁과 시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최종적으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5가지 사항을 권면한다(고전16:13~14). 첫째, 깨어 있으라. 둘째, 믿음에 굳게 서라. 셋째, 남자답게 행동하라. 넷째, 강해져라. 다섯째, 그러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그렇다. 고린도 교회는 어린아이와 같이 약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남자답게 강하게 될 것을 마지막으로 주문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문안을 한다. 먼저는 그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바울을 찾아온 세 명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근황을 전하면서 그들을 칭찬한다(고전16:15~18). 특별히 그중의 한 명인 '스데바나'는 아가야의 첫 열매로서 그의 온 집안이 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면서, 교회에서도 성도 섬기기에 알려진 사람이니만큼 그리고 주의 일에 수고하는 자들인 만큼 그를 존중해 주고 그런 일을 하는 형제들에게도 순종할 것을 권고한다(고전16:15~16). 아마도 그는 바울이 아가야의 첫 성이었던 아덴에 전도하러 갔을 때에 전도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가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데 혁혁한 일을 한 것 같고, 이제 고린도 교회의 제반 문제를 물어보기 위해 고린도 교회의 파송을 받아 에베소에 온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스데바나'를 칭찬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온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에 대해서도 더불어 칭찬을 하는데, 이는 자기가 그들로 인하여 답답한 마음이 시원함을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라는 것이다.
이어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의 안부를 그 교회에게 전한다. 바울이 위치한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베소 교회, 골로새 교회, 두아디라 교회, 서머나 교회. 히에라볼리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등등)이 문안하고, 특히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에 만나서 바울의 협력자가 되어 준 아굴라와 브리스가 그리고 그 집에 있는 교회의 문안을 전한다. 사실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에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으나,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있어서 그들은 바울처럼 텐트 만드는 일을 함으로 그 수입으로 바울의 선교 사역을 위해 지원하고 있었다. 또한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시에도 에베소에까지 와서 그를 돕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마 바울 평생에 가장 고마운 분이 이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 전도팀 및 교회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각각 거룩한 입맞춤 곧 성령 안에서의 영적인 교제 곧 기도의 교통을 계속하라고 권면한다(고전16:20).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편지가 사도인 자기의 친필이 들어간 책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필레오'사랑으로 친구 간의 사랑) 아니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언급한다(고전16:22a). 이는 그들이 진정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은 하지만 지금처럼 자기 교회를 개척해 준 지도자를 사랑하여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를 말한 것이다. 그만큼 그 교회의 지체들은 받은 은혜를 실천하는 면에서는 매우 부족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라나타'('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아람어)라는 말로서 당시의 성도들 간의 인삿말을 그들에게 전한다(고전16:22b). 이는 주께서 그들의 세대에 오실 것을 다 기대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도 그들은 받은 은혜를 남에게 베풀면서 살지 않고 있었고, 계속해서 받으려고만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우리도 과연 언제까지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어린아이로 살아갈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끝으로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신의 사랑이 그들에게 가득하기를 축복하면서 편지를 마무리 한다(고전16:23~24).
6. 나오며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 교회는 아마도 에베소 교회 다음으로 공을 듬뿍 들인 교회인 것 같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 중에서 고린도 교회는 두 번째로 오래 머물렀던 교회였으며, 그 교회의 문제를 들었을 때에는 직접 자신의 사람을 보내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게는 편지도 두 차례 이상으로 써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같다고 말했다(고전3:1).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은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 같이 서로 간에 치고박고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교회의 공중 예배 시간에 자랑하듯 말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영적인 성숙도는 매우 낮은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라는 지역은 특성상 이러한 은사들이 없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고린도 교회는 탄생하지도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는 말씀처럼 고린도 교회는 음행과 우상 숭배가 가득한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게 매우 다양하고 많은 은사들을 주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린아이인지라 그것을 사용할 줄도 잘 몰랐고 그것을 자기 자랑하는데에만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로 바울은 그 교회의 개척 목회자로서 그 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교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아비와 같은 심정으로 권면을 하였다. 때로는 엄하게 책망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달래기도 하면서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는 편지를 마감하면서 그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맹점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면서 이전까지는 그들이 받기만 했던 신앙생활이었다면, 이제는 나눠주는 신앙생활을 감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한 것이다. 그들이 이와 같은 바울의 염원을 알아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서신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읽어 보면 그들은 여전히 어린아이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 우리도 교회에 다닌지 수십 년이 흘렀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의 신앙 안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은 정말 값없는 은혜를 받았지만 그것을 누군가에게 나누기 위해서 응당 내가 치러야 할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이제 우리도 달라져야 함을 느낀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신부처럼, 다른 신부를 산출하고 양육하며 성장하는 신부가 되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2021년 10월 27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