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자신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기에 혹시 잘못해서 죄를 범해도 그 죄가 자신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 것은 잘 믿는 것일까? 누가 오늘날에도 역시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며, 누가 지금 어두운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 자인가? 이 놀라운 물음들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에 들어 있다.
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어떤 책인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특징을 딱 2가지로 요약하여 말하라고 한다면, 이 책은 예방 접종책이자 초신자용 훈련 교재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자신이 없는 여러 교회들을 비집고 들어 온 영지주의라는 이단에 맞설 수 있도록 신앙의 가장 초보적인 교리들을 써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자에게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두 번의 시간을 통하여, 이 책의 서론 부분과 아울러, 성도의 교제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의 표징으로서 형제 사랑 계명 준수와 세상에 대한 사랑 경계 부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번 시간을 통하여, 영지주의의 미혹을 보다 더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고 그것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유혹을 이길 수 있는지도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2.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자들과 성도들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3~11의 말씀에서,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참된 성도들이 갖고 있는 신앙의 차이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미혹에 직면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매우 피부에 와 닿는 말씀일 것이다. 하지만 달라진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썩 다가오지 않는 말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본문 말씀은 영지주의의 실체를 알아보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무엇을 주장했을까? 이 책은 사실 이단의 세력에 대한 예방 접종을 위한 책이다. 그러므로 이단의 예방을 위해서 우리는 이 책을 보다 더 면밀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이단들 역시 성경을 이용하여 사람을 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이단들의 특성과 그들의 접근 방법을 잘 알아 놓는다면 그들을 쉽게 분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어떻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로, "나는 그분 곧 하나님(혹은 그리스도)을 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요일2:4). 그들은 하나님이 누군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정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있었을 텐데, 그들은 지금 계명을 준수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들은 "나는 그분 안에 살고 있다(머무르고 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요일2:6).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말한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그분 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은 그분이 행하셨던 바대로 형제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아무리 자기들이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행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셋째로, 그들은 이미 빛 가운데서 걸어가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요일2:9). 그러나 그들이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형제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어둠에 있었던 것이다. 고로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이 말로서는 자신들이 어떠어떠한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들의 말에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영지주의의 구원관은 어떤 것인가?
요한서신 강해 첫 시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영지주의 이단은 2세기 말경부터 3세기에 맹위를 떨친 가장 위험한 기독교 이단이었다. 얼핏 보기에 그들은 기독교와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빛과 어둠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말하며 진리를 찾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빛'과 '어둠' 그리고 '진리'를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과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바는 차이가 있었다. 그중에서 오늘은 그들의 구원관과 사도 요한이 말하는 구원관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영지주의의 구원관은 대체 어떤 것인가? 영지주의자들은 영지를 깨닫는 것을 곧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속죄양 같은 것은 필요 없다. 그들에게 죄나 사탄 마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 그들이 말하는 '영지(영적인 지식)'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은 인간은 원래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멀리 있다 보니 어둠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느 날 예수라는 청년의 육체 속에 잠깐 영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30세 때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 속에 들어왔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깨우쳐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 준 다음,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기 전에 그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도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으면 그것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요 미혹하는 자요 이단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적그리스도라고 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할 때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4. 왜 사도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가?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자들과 참된 성도들의 차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는가? 그것은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았으면 그것으로 구원은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선한 행실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 중에 어떤 분파는 육체라는 것은 영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죄를 저지른다 할지라도 자신의 영혼에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을 가리켜 '에피큐로스(쾌락주의) 학파'라고 부른다다. 그런데 당시 교회에 침투해 있는 영지주의자들의 생각도 그랬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도덕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형제 사랑을 성도가 실천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새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곧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그들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요13:34~35). 이는 형제가 서로 사랑할 때에 그가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그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왔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언급하신 계명(도덕적인 계율)은 이전에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미 구약시대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레19:18).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새 계명을 말할 때, 그것은 옛 계명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했다(요일2:7). 그렇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은 구약 계명에 비하면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계명은 원수는 미워하고 이웃은 사랑하라는 명령이었다면, 신약의 예수께서는 이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까지도 위해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마5:43~44). 이처럼 새 계명은 사랑해야 할 대상의 범위가 훨씬 더 넓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자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죽이라고 하신 것일까? 정말 영지주의자들의 말처럼 여호와가 저급한 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명령하신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무엇이 죄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리하여 죄를 짓게 되면 어떤 심판과 어떤 결과를 맛보게 되는 것임을 알려 주어야 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꼬?"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고, 비로서 그때에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예수께서는 죄를 지어 죽어가는 자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 흘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분이 대신 담당하시고 그분은 죽을 우리 인간을 살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원수라고 할지라도 그를 죽여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그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형제를 미워했고 심지어 살인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깨달은 영지를 가지고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 그러한 어리석은 생각을 갖게 된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5. 성도들은 영적으로 어떤 단계를 거쳐 성장하는가?
사도 요한은 이제 영적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신 자들을 성도라고 하면서, 이제 갓 태어난 모든 성도들은 성장해 가야 한다고 하였다. 즉 어린 아이로 태어난 성도가 양육을 받아 점점 자라서 청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비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도라도 지금 자신이 어떤 영적 성장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영적인 나이에 따른 권면의 말씀을 전한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보았을 때에 '아이들'이란 대체 누구를 가리키며, '청년들'과 '아비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첫째, '자녀들' 혹은 '아이들'을 두 종류의 단어로 표현했다. 하나는 '자녀들(테크니아)'이라고 말했다(요일2:12). 이것은 아버지가 자녀를 양육할 때에 쓰는 단어이다. 그런데 또 하나는 '아이들(어린이들)(파이디아)'이라는 용어도 있다(요일2:14). 이 단어는 스승이 자기의 제자를 양육하고 훈련해야 할 때에 쓰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들은 어떤 영적 상태의 성도를 가리키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그것은 영적으로 초신자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자기가 어린 자녀라 할지라도 두 가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첫째로, 어떤 죄든지 지은 죄들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했다(요일2:12). 그리고 자신은 영적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요일2:14).
그리고 사도 요한은 둘째, '청년들'이란 영적으로 성장하여서 이미 강해진 자들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은 악한 자인 사탄 마귀와 싸워서 이미 이긴 싸움을 싸워 이기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요일2:13,14). 그렇다면 청년들은 대체 어떤 무기로 악한 자와 싸워서 이길 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요일2:14). 하나님의 말씀이 칼이 되어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영적 싸움에서, 이 세상 임금인 사탄 마귀를 이기려면 두 가지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낸 당신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요일5:4~5). 그리고 또 하나는 악한 자를 대적할 말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요일2:14). 고로 영적인 전쟁을 수행할 자는 말씀을 많이 알수록 칼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셋째, '아비들'이란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가? 이들은 한 마디로 영적인 지식과 생활이 성숙한 상태에 도달해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들은 이미 성경을 꿰뚫고 있는 자들이고 영적인 세계를 꿰뚫고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예수께서 '태초부터 계신 이'라는 것을 알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태초부터 계신 이'라 함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태초부터 계신 이라고 불리운 것이다(요일1:1, 요1:1~3).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온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요일2:13~14). 처음에 세상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적자였던 사탄 마귀의 반란으로 인하여, 인간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자는 태초부터 계신 분 곧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자라도 결코 거듭난 성도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 참 믿음인 것이다(요일5:18).
6.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가?
이어서 사도 요한은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고 언급한다. 그것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형적없이 사라질 때에 같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요일2:15~17). 그렇다. 이 세상에 속한 물질적인 세계는 영의 세계에서는 아무 쓸모 없는 것들이다. 또한 영의 세계에 그것을 가지고 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영적인 세계를 사모하고 그 세계에서 누릴 것을 잘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악한 자요 미혹하는 자인 사탄 마귀는 사람을 한사코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미쳐 살도록 꼬드긴다. 악한 자가 인간을 꼬드길 때 사용하는 미끼가 사도 요한은 총 3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육체의 정욕' 곧 '육신의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이것을 부추켜서 그것을 일평생 추구하며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의 욕망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육체가 즐거워하는 것에만 푹 빠져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 역시 다 헛된 것이다. 이것들 모두가 언젠가는 썩어 없어져 갈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은 다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에 필요한 먹을 양식이 있고 입을 옷이 있다면 거기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힘써야 한다. 둘째는 '안목의 정욕'이란 '눈들이 보는 대로 갖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사람이 되어서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은 사실 끝이 없다. 우리나라처럼 잘 살아도 상대적인 빈곤함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번 눈으로 보면 그것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나는 이들이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래서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치자, 과연 사람은 그것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갈까? 아니다. 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또 안달이 나서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갖고 싶어하는 욕망에 결코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셋째는 이생의 자랑이다.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떠벌리고자 하는 마음이 '이생의 자랑'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랑하는데 바쁘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기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것도 헛된 것이다. 아무리 비싼 것이 있다고 자랑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도 그것을 내세에 가지고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 물질적인 것, 유한한 것에 결코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한다. 있으면 감사하고 그것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것이 되어야 한다.
7. 나오며
참으로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 매우 위협적인 이단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오직 깨달음만이 중요했기에, 예수님의 성육신도 그들에게는 필요없는 것이었고, 더욱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도 역시 그들에게는 아무런 중요성을 띠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깨달음을 통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자들이고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구원파나 신천지 등은 신종 신세대에 땅을 뚫고 올라온 영지주의의 변형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어서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은 것이라고 믿는 것도 신종 영지주의에 물든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에 물든 자들은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아도 이미 예수께서 자신의 죄와 죽음과 저주를 끝내셨기 때문에 자신이 구원받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처음 믿을 때 곧 회심할 때에는 회개(돌이킴)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자범죄가 발생하면 즉시 회개(자백)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태반이다. 이미 골고다의 사건으로 자신의 구원은 결정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예수께서 치르신 골고다의 사건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우리가 믿어도 비로소 다시 회개할 때에 그분의 피로서 우리가 죄 용서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한 번 믿었다고 해도,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을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겠는가?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라도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 그는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기 때문이다(빌2:12).
2021년 11월 24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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