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요한이서는 어떤 책인가? 사실 요한이서는 성도들에게 왠지 낯설은 책이다. 왜냐하면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에 비하면 그리 많이 읽혀지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에서 이어서 나오는 책으로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그렇다면 과연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의 저자였던 사도 요한이 쓴 것일까? 아니면 '장로'로 지명된 어떤 특정한 무명의 인물이 기록한 것인가? 그리고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와 대체 어떤 관련이 있길래 '요한이서'라고 명명되어 있는가? 이제 곧 요한이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요한이서는 전형적인 편지 형식의 서신서이다. 편지로서 요한이서를 보면 오히려 요한일서가 파격젹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송신자와 수신자를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문안인사나 끝인사도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이서와 요한일서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가정하에 요한이서를 본다면, 이 책은 과연 어떤 목적을 따라 기록된 것인가? 요한일서에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내용이 있어서 저자가 그것을 요한이서에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요한일서의 편지를 보내고 난 후 수신자들에게 발생한 어떤 특정한 사건 때문에 저자가 다시 요한이서를 써서 보낸 것인가? 기왕 요한이서를 공부하려 들어왔다면, 지금이야말로 요한이서를 제대로 공부할 때가 아닌가 싶다.
2. 요한이서는 어떤 책인가?
요한이서는 누가 쓴 책인가? 요한이서는 이 책을 '장로'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는 분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요이1:1). 그렇다면 이 '장로'라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헬라어로 보니, '호 프레스뷔테로스'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그 장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떤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로'는 사도 요한인가 아니면 다른 특정한 인물인가?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요한이서의 내용과 필체에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책 제목이 '요한이서'라고 명명되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에 붙어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자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요한이서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용어들이 요한일서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리, 아버지와 아들, 사랑, 새 계명, 처음부터, 미혹하는 자,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 적그리스도" 등이 아예 똑같은 단어이다. 그리고 중심주제도 거의 같다.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미혹하는 자를 주의하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요한이서는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구체적이고 실체적이다. 즉 요한일서에 비해 새롭게 추가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았을 때, 요한이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 사도 요한은 그의 나이가 90세 정도는 되었기에 장로라고 명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초대 교부들 대부분은 요한이서를 사도 요한 저작으로 인정한다. 예를 들어, 폴리캅(Polycarp), 이레네우스(Irenae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등이 그렇다. 다만 이 책의 저자가 자기자신을 가리켜 ‘장로’(1:1)로 표현한 것을 두고 사도 요한이 아니라 다른 익명의 장로(Eusebius, Papias)로 추측하는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장로’라는 호칭이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나이가 지긋하고 연륜이 많은 자에 대한 존칭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벧전 5:1), '장로'라는 호칭은 사도 요한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3. 요한이서의 수신자는 누구인가?
나이가 많은 사도 요한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 책은 대체 누구에게 써 보낸 책인가?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선택함을 받은 부녀와 그녀의 자녀들(1:1))" 혹은 "선택함을 받은 너의 자매들의 자녀들(1;13)"이 그 수신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부녀' 혹은 '너'로 지칭되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먼저 '부녀'를 헬라어로 보면, '퀴리아'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퀴리오스'('주')의 여성형 명사로서, 어떤 여성의 이름일 수도 있고,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퀴리아'를 어떤 개인으로 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우리'와 '너희'가 비교되면서 등장하는데 개인을 지칭하기 보다는 교회공동체를 향해 부르는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이서의 수신자로 등장하는 '퀴리아'란 아마도 교회공동체를 지칭하는 대유명사인 듯 하다. 그러므로 여기어 덧붙혀 퀴리아의 자녀들 역시 교회공동체의 각 구성원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4. 요한이서는 왜 기록했으며,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 장로는 왜 요한이서를 기록해야 했는가? 앞에서 살펴본대로 본 저작을 나이 많은 장로였던 사도 요한으로 가정한다면, 이 편지는 요한일서를 보내고 난 뒤고 얼마 안 있어서 써 보낸 편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첫째, 본 서신의 내용이 요한일서를 읽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 교회공동체를 향한 사도 요한의 칭찬과 기쁨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요이1:4~6). 그리고 둘째, 이 편지를 써 보내야 했던 직접적인 목적이 중후반에 나오기 때문이다(요이1:7~11). 그것은 바로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인 세력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다. 그것도 그들을 결코 가까이 하지 말고 그들을 배척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요한일서를 보내고 난 뒤에 어떤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난 것을 알게 된 장로 요한은 이 책을 곧이어 써보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요한이서는 편지 형식을 고스란히 갖춘 전형적인 서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편지를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나면, 장로 요한이 에베소교회나 혹은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의 회람용 서신으로 이 편지를 기록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 편지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이 편지의 송신자가 수신자에게 전하는 인삿말(1:1~3)이다. 그리고 둘째는 본 편지를 보내는 2가지 주된 목적(1:4~11)이 나온다. 그리고 셋째는 끝 인삿말(1;12~13)이 나온다.
5. 장로 요한이 첫 인사말에서 전하고 있는 '진리'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장로 요한은 서두 인삿말(1:1~3)에서 각 절마다 '진리'에 대해 언급한다. 이 편지의 발신자인 장로 요한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채 있는 모든 자들"도 역시 수신자인 퀴리아와 그녀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언급한다(1절). 그리고 진리가 장로 요한 및 그와 함께 있는 이들 안에 머물고 있으며, 또한 그 진리는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확신있게 말한다(2절). 그리고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와서 진리와 진리 안에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한다(3절). 그렇다면 장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이 '진리'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우리가 이 진라('알레데이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이서의 말씀과 함께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책을 함께 검토해본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장로 요한이 쓰고 있는 '진리'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도 동시에 많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진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는 말이다(요1:17, 14:6). 또한 예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는 분이시다(요8:40,45). 그리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말씀 또한 진리다(요17:17,8:40) 더욱이 예수께서 떠나가시면서 당신을 대신하여 보내주실 보혜사 성령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다(요15:26, 16;13).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요한이서에서는 진리에 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진술이 나온다. 그것은 '진리'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오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요이1:2,9). 고로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말씀이 곧 진리이자 아버지와 아들이 하신 말씀이 곧 진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다른 존재가 하는 말은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마귀가 하는 말은 결코 진리가 아니며 그것은 거짓이다(요8:44).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인량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알 때에 그 사람은 진리 안에 거할 수 있게 되며,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17:3). 그래서 장로 요한은 진리를 받은 자는 진리 안에서 걸어가는(행하는) 자라고 말했다. 특히 장로 요한은 부녀와 그녀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매우 기쁘다고 하면서 이 편지를 썼다(요이1:4).
6.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어 장로 요한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곧 진리 안에서 걸어가고 있는 부녀와 그녀의 자녀들 때문에 매우 기뻐한다. 실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어 아들이 되셨다. 그러므로 아들을 소유한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소유한 것이며, 진리를 소유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장로 요한은 "진리가 우리 안에 거주하고 있으며, 진리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요이1;2)"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퀴리아와 그녀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걸어가고(행하고) 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진리이신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간대로 행하는 것을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요,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요이1:4~6).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들을 위해 그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주려고 화목제물로써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따로 있는 아들이 있어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요1:1~3,14,18, 딤전3:16),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임마누엘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마1:23). 즉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분은 원래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셨던 것이다(사9: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것 그리고 그분의 몸을 우리 인류의 화목제물이자 속죄제물로 바치신 것이 곧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들을 성령을 통하여 받게 된 모든 믿는 이들은 자기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품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 자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자 처음부터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요이1:6).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7. 당시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누구였는가?
늙은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왜 그토록 심히 중요하게 여긴 것일까? 특히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을 적그리스요 미혹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 그 자체만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실은 이 진술에는 엄청난 더 큰 비밀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에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인정은 결국 이단이 되느냐 정통 신안을 갖는 것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당시 영지주의 이단 세력들의 미혹이 매우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각기 다른 존재로 보고 있었으며, 예수와 그리스도를 별개의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 자체를 부인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또한 부인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이와같은 많은 진술들을 부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주 크고도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고 혹은 부인하는 것은 그 바로 진리의 영을 따르는 사람인가 아니면 미혹의 영을 따르는 사람인가를 분별해주는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구원과 멸망 곧 천국과 지옥이 갈려지기 때문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만 보았다. 그리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영적인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문제라든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지 아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것인지 아닌지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안았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정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건은 죄를 지은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만약 그날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지 않으셨다면 모든 인류는 죄의 댓가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고 또한 죽어서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모람들 가운데에는 그 어떤 사람도 대속제물로 죽을만한 흠없는 사람이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육신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부인하는 이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8. 왜 성도들은 영지주의자들을 받아주지 말고 멀리해야 하는가?
왜 성도들은 영지주의자들을 자기의 집 안으로 모셔들이지 말고 그들을 멀리 해야 하는가? 심지어 노 사도는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고 주문하는가? 그것은 그들은 암덩어리로 누룩과 같이 그들을 용납할 때 많은 영혼이 주님의 성육신을 부인하여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고는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일을 행하신 것인데, 성육신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니 큰 일이 되는 것이다. 영지주의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성육신은 일종의 타락이다. 그들은 신성한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을 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가게 되면 그는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초신자들이 잘 알 리가 없다. 더욱이 영지주의자들은 초기교회의 성도들의 손님대접 습관을 악이용하려고 하기 땜누에 그 문제는 더욱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손님대접하는 일은 구약시대부터 손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에 따라, 히브리인들이나 지금의 베두인들까지도 기본적으로 실천하는 풍습이었다(히13;2, 롬12;13, 눅9:3~5, 10:7~11). 그런데 이것을 악이용하여 마치 자기들이 참된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인량 가장하여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의 가르침을 들은 자들은 쉽게 이들의 마수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 노 사도는 요한일서를 보낸 후에 빨리 이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둘째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교회가 이단세력에 의해 잠식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는 아예 집에 들이지도 말라. 그리고 그들에게 인사도 건네지 말라. 만약 그들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들의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단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장로 요한은 일차적으로 그런 자는 자기가 주님을 위해 힘써 일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요이1:8a).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온전한 보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요이1:8b). 그리하여 이단에 빠진 것을 회개하지 못하는 자가 발생한다면, 그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영원한 멸망에 처하고 말 것이다.
9. 나오며
장로 요한은 위와 같은 교회의 현실과 이단의 위험성을 너무나 잘 간파하고 있었기에 교회의 성도들에게 요한일서의 편지를 쓰는 것만으로 많이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마지마긍로 파피루스 종이나 잉크로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 것보다는 직접 가서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요이1:12~13). 그렇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이단 세력들이 여기 저기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들은 교묘한 속임수로 위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한다. 특히 요즘 들어와 이단들은 성도들을 호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알레고리컬 성경해석법을 들이밀며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지주의 계열의 이단들은 비유로 하신 말씀의의 실체를 알려준다고 접근한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성경의 비밀을 제대로 깨우쳐주는 것인량 가장하여 미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이단들은 대부분 지식을 사용하는 악한 영들 가운데 상당히 높은 계급의 영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성경의 비유해석과 논리를 가지고 접근해 들어온다면 먼저 그를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믿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단은 교만한 말장난으로 그것을 피해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이에 장로 요한은 초신자들은 이러한 이단 세력들을 처음부터 아예 용납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자신이 마치 훌륭한 성경교사인 것처럼 가장하여 들어오기 때문에, 분별력 없이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가게 되면 그들의 미혹에 금방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 사도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을 빨리 내쳐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때 사용할 기준은 이것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첫째,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부인하는가 인정하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와 예수님이 한 분이신가 아닌가를 물어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거나 잘못 전하는 자는 이단의 세력이 될 수 있기에, 이런 자들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한 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딛3:10~11).
2022년 01월 05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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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01-05 요한이서 헬라어직역과 명령과선포.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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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요한이서는 어떤 책인가? 사실 요한이서는 성도들에게 왠지 낯설은 책이다. 왜냐하면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에 비하면 그리 많이 읽혀지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에 이어서 나오는 책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의 저자였던 사도 요한이 쓴 것일까? 아니면 '장로'로 지명된 어떤 특정한 무명의 인물이 기록한 것인가? 그리고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와 대체 어떤 관련이 있길래 '요한이서'라고 명명되어 있는가? 이제 곧 요한이서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요한이서는 전형적인 편지 형식의 서신서이다. 편지로서 요한이서를 보면 오히려 요한일서가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송신자와 수신자를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문안 인사나 끝인사도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이서와 요한일서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가정하에 요한이서를 본다면, 이 책은 과연 어떤 목적을 따라 기록된 것인가? 요한일서에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내용이 있어서 저자가 그것을 요한이서에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요한일서의 편지를 보내고 난 후 수신자들에게 발생한 어떤 특정한 사건 때문에 저자가 다시 요한이서를 써서 보낸 것인가? 기왕 요한이서를 공부하러 들어왔다면, 지금이야말로 요한이서를 제대로 공부할 때가 아닌가 싶다.
2. 요한이서는 어떤 책인가?
요한이서는 누가 쓴 책인가? 요한이서는 이 책을 '장로'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는 분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요이1:1). 그렇다면 이 '장로'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헬라어로 보니, '호 프레스뷔테로스'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그 장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떤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로'는 사도 요한인가 아니면 다른 특정한 인물인가?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요한이서의 내용과 필체에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책 제목이 '요한이서'라고 명명되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에 붙어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자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요한이서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용어들이 요한일서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리, 아버지와 아들, 사랑, 새 계명, 처음부터, 미혹하는 자,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 적그리스도' 등이 아예 똑같은 단어이다. 그리고 중심 주제도 거의 같다.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미혹하는 자를 주의하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요한이서는 미혹하는 자들에 관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즉 요한일서에 비해 새롭게 추가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았을 때, 요한이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 사도 요한은 그의 나이가 90세 정도는 되었기에 장로라고 명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초대 교부들 대부분은 요한이서를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인정한다. 예를 들어, 폴리캅(Polycarp), 이레네우스(Irenae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등이 그렇다. 다만 이 책의 저자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장로’(1:1)로 표현한 것을 두고 사도 요한이 아니라 다른 익명의 장로(Eusebius, Papias)로 추측하는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장로’라는 호칭이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나이가 지긋하고 연륜이 많은 자에 대한 존칭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벧전 5:1), '장로'라는 호칭은 사도 요한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3. 요한이서의 수신자는 누구인가?
나이가 많은 사도 요한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 책은 대체 누구에게 써 보낸 책인가?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선택함을 받은 부녀와 그녀의 자녀들(1:1))" 혹은 "선택함을 받은 너의 자매들의 자녀들(1:13)"이 그 수신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부녀' 혹은 '너'로 지칭되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먼저 '부녀'를 헬라어로 보면, '퀴리아'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퀴리오스'('주')의 여성형 명사로서, 어떤 여성의 이름일 수도 있고,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퀴리아'를 어떤 개인으로 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우리'와 '너희'가 비교되면서 등장하는데 개인을 지칭하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를 향해 부르는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이서의 수신자로 등장하는 '퀴리아'란 아마도 교회 공동체를 지칭하는 대유 명사인 듯 하다. 그러므로 여기에 덧붙여 퀴리아의 자녀들 역시 교회 공동체의 각 구성원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4. 요한이서는 왜 기록했으며,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 장로는 왜 요한이서를 기록해야 했는가? 앞에서 살펴본대로 본 저작을 나이 많은 장로였던 사도 요한으로 가정한다면, 이 편지는 요한일서를 보내고 난 뒤 얼마 안 있어서 써 보낸 편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첫째, 본 서신의 내용이 요한일서를 읽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사도 요한의 칭찬과 기쁨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요이1:4~6). 그리고 둘째, 이 편지를 써 보내야 했던 직접적인 목적이 중후반에 나오기 때문이다(요이1:7~11). 그것은 바로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인 세력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다. 그것도 그들을 결코 가까이 하지 말고 그들을 배척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요한일서를 보내고 난 뒤에 어떤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난 것을 알게 된 장로 요한은 이 책을 곧이어 써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요한이서는 편지 형식을 고스란히 갖춘 전형적인 서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편지로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장로 요한이 에베소 교회나 혹은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의 회람용 서신으로 이 편지를 기록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 편지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이 편지의 송신자가 수신자에게 전하는 인삿말(1:1~3)이다. 그리고 둘째는 본 편지를 보내는 2가지 주된 목적(1:4~11)이 나온다. 그리고 셋째는 끝 인삿말(1;12~13)이 나온다.
5. 장로 요한이 첫 인사말에서 전하고 있는 '진리'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장로 요한은 서두 인삿말(1:1~3)에서 각 절마다 '진리'에 대해 언급한다. 이 편지의 발신자인 장로 요한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채 있는 모든 자들"도 역시 수신자인 퀴리아와 그녀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언급한다(1절). 그리고 진리가 장로 요한 및 그와 함께 있는 이들 안에 머물고 있으며, 또한 그 진리는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확신있게 말한다(2절). 그리고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와서 진리와 진리 안에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한다(3절). 그렇다면 장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이 '진리'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우리가 이 진리('알레데이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이서의 말씀과 함께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책을 함께 검토해 본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장로 요한이 쓰고 있는 '진리'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도 동시에 많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진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는 말이다(요1:17, 14:6). 또한 예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는 분이시다(요8:40, 45). 그리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말씀 또한 진리다(요17:17, 8:40) 더욱이 예수께서 떠나가시면서 당신을 대신하여 보내 주실 보혜사 성령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다(요15:26, 16:13).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요한이서에서는 진리에 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진술이 나온다. 그것은 '진리'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오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요이1:2, 9). 고로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말씀이 곧 진리이자 아버지와 아들이 하신 말씀이 곧 진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다른 존재가 하는 말은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마귀가 하는 말은 결코 진리가 아니며 그것은 거짓이다(요8:44).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인양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알 때에 그 사람은 진리 안에 거할 수 있게 되며,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17:3). 그래서 장로 요한은 진리를 받은 자는 진리 안에서 걸어가는(행하는) 자라고 말했다. 특히 장로 요한은 부녀와 그녀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매우 기쁘다고 하면서 이 편지를 썼다(요이1:4).
6.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어 장로 요한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곧 진리 안에서 걸어가고 있는 부녀와 그녀의 자녀들 때문에 매우 기뻐한다. 실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어 아들이 되셨다. 그러므로 아들을 소유한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소유한 것이며, 진리를 소유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장로 요한은 "진리가 우리 안에 거주하고 있으며, 진리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요이1:2)"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퀴리아와 그녀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걸어가고(행하고) 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진리이신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간대로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요,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요이1:4~6).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들을 위해 그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화목 제물로써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따로 있는 아들이 있어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요1:1~3,14,18, 딤전3:16),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임마누엘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마1:23). 즉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분은 원래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셨던 것이다(사9: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것 그리고 그분의 몸을 우리 인류의 화목 제물이자 속죄 제물로 바치신 것이 곧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들을 성령을 통하여 받게 된 모든 믿는 이들은 자기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품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 자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자는 처음부터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요이1:6).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7. 당시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누구였는가?
늙은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왜 그토록 심히 중요하게 여긴 것일까? 특히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을 적그리스요 미혹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 그 자체만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실은 이 진술에는 엄청난 더 큰 비밀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인정은 결국 이단이 되느냐 정통 신앙을 갖는 것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당시 영지주의 이단 세력들의 미혹이 매우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각기 다른 존재로 보고 있었으며, 예수와 그리스도를 별개의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 자체를 부인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또한 부인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이와 같은 많은 진술들을 부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주 크고도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고 혹은 부인하는 것은 그가 바로 진리의 영을 따르는 사람인가 아니면 미혹의 영을 따르는 사람인가를 분별해 주는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구원과 멸망 곧 천국과 지옥이 갈려지기 때문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만 보았다. 그리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영적인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문제라든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지 아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것인지 아닌지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정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건은 죄를 지은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만약 그날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지 않으셨다면 모든 인류는 죄의 댓가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고 또한 죽어서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 어떤 사람도 대속 제물로 죽을 만한 흠없는 사람이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육신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부인하는 이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8. 왜 성도들은 영지주의자들을 받아 주지 말고 멀리해야 하는가?
왜 성도들은 영지주의자들을 자기의 집 안으로 들이지 말고 그들을 멀리 해야 하는가? 심지어 노 사도는 왜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고 주문하는가? 그것은 그들은 암덩어리로 누룩과 같아 그들을 용납할 때 많은 영혼이 주님의 성육신을 부인하여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고는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일을 행하신 것인데, 성육신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니 큰 일이 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성육신은 일종의 타락이다. 그들은 신성한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을 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가게 되면 그는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초신자들이 잘 알 리가 없다. 더욱이 영지주의자들은 초기 교회의 성도들의 손님 대접 습관을 악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문제는 더욱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손님 대접하는 일은 구약시대부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에 따라, 히브리인들이나 지금의 베두인들까지도 기본적으로 실천하는 풍습이었다(히13:2, 롬12:13, 눅9:3~5, 10:7~11). 그런데 이것을 악이용하여 마치 자기들이 참된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인양 가장하여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의 가르침을 들은 자들은 쉽게 이들의 마수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 노 사도는 요한일서를 보낸 후에 빨리 이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교회가 이단 세력에 의해 잠식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는 아예 집에 들이지도 말라. 그리고 그들에게 인사도 건네지 말라. 만약 그들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들의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단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장로 요한은 일차적으로 그런 자는 자기가 주님을 위해 힘써 일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요이1:8a).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온전한 보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요이1:8b). 그리하여 이단에 빠진 것을 회개하지 못하는 자가 발생한다면, 그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고 말 것이다.
9. 나오며
장로 요한은 위와 같은 교회의 현실과 이단의 위험성을 너무나 잘 간파하고 있었기에 교회의 성도들에게 요한일서의 편지를 쓰는 것만으로 많이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마지막으로 파피루스 종이나 잉크로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 것보다는 직접 가서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요이1:12~13). 그렇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이단 세력들이 여기 저기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들은 교묘한 속임수로 위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한다. 특히 요즘 들어와 이단들은 성도들을 호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알레고리컬 성경 해석법을 들이밀며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지주의 계열의 이단들은 비유로 하신 말씀의 실체를 알려준다고 접근한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성경의 비밀을 제대로 깨우쳐 주는 것인양 가장하여 미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이단들은 대부분 지식을 사용하는 악한 영들 가운데 상당히 높은 계급의 영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성경의 비유 해석과 논리를 가지고 접근해 들어온다면 먼저 그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믿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단은 교만한 말장난으로 그것을 피해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이에 장로 요한은 초신자들은 이러한 이단 세력들을 처음부터 아예 용납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자신이 마치 훌륭한 성경 교사인 것처럼 가장하여 들어오기 때문에, 분별력 없이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가게 되면 그들의 미혹에 금방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 사도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을 빨리 내쳐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때 사용할 기준은 이것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첫째,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것을 부인하는가 인정하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과 예수님이 한 분이신가 아닌가를 물어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거나 잘못 전하는 자는 이단의 세력이 될 수 있기에, 이런 자들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딛3:10~11).
2022년 01월 05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