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자들에 대한 영적 성장을 다룬 책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의 미혹에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 것인가를 알려 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초신자들을 위한 양육 지침서라고 정의할 수 있고 더불어 이단 세력으로부터 성도를 지켜 주는 예비 주사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요한일서 1-2장의 내용이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의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다룬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고, 이어지는 3:1-4:6에서는 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로서의 성도의 신앙과 그것에 합당한 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오늘은 3:13~24까지의 말씀을 살펴볼 것인데,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삶의 적극적인 측면의 특징으로서 형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4:1~6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계를 권면하는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그래서 형제 사랑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며,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정리하고자 한다.
2. 그리스도인은 왜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 요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했는데 첫째 이유는, 믿는 이들은 형제 사랑에 대한 실천을 통하여 과연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일3:13~14). 그러므로 만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있고 또한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여전히 사망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내 안에 과연 하나님의 생명이 존재하는지를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형제 사랑의 실천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는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는 형제 사랑을 결국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는 형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가인이 자신의 형제 아벨을 미워한 것이다. 결국 그의 미움은 살인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렇다. 가인 자신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의 마음을 악한 자가 치러 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아우를 돌로 쳐죽이고 만다. 가인 안에는 자기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과연 자기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형제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는 아니다. 다시 말해, 혹 누가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안에 꼭 영생이 들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에, 그냥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요일3:23). 그렇다. 자기 안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응당 형제 사랑을 실천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이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 사랑이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일3:16).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시기 위해 먼저는 사람으로 오셨고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인류의 대속물로 내어 주신 것이다. 그분이 누구인가? 그분은 바로 성령으로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동생으로 삼으려고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자신을 낮추시고 또 낮추시어 피조물의 몸을 입으신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숨을 죽기까지 내어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다른 형제를 그렇게 사랑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3. 그리스도인들이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 삶으로 형제를 도와 주는 것이라고 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재물(재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제가 궁핍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도 본체만체 한다면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지 않다고 했다(요일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말이나 혀로서만 형제를 사랑한다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형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직접 행동과 진실함 안에서 형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 자기의 형제가 궁핍에 처하여 있는 것을 보고도 그를 도와줄 마음을 닫아 버린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어떤 그리스도인이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한다면, 그에게는 어떤 유익이 나타나는가?
이어서 사도 요한은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단계에 도달하는 자가 갖는 상태를 말해 주었는데,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 자기를 책망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 이 수준에 도달하는 자에게 주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3가지로 언급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고 했다(요일3:21). 이는 성도가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런 자에게 담대한 믿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믿음에 담대함이 없는 자는 악한 영들 앞에서 주눅이 들어 버리거나 겁먹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영들 앞에서 주눅이 들거나 겁먹는지 아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그가 책망을 들을 만한 죄악들이 자기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또한 생명의 교통을 나누고 있으며 또한 형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 안에 어떤 거리낌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면 그러한 자는 악한 영들 앞에 선다고 할지라도 담대해지는 것이다. 아니 당당히 맞서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한 것을 다 받을 수가 있다고 했다(요일3:22). 왜나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그가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들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자는 기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기도 응답을 풍성하게 받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회개하고 생명을 성장시켜 형제 사랑을 실천하라. 그러면 그것으로 인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분량을 맞춰 주실 것이다. 셋째는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그분에 거하는 상호 교통과 상호 내주가 가능하다고 했다(요일3:24). 그렇다. 주님과의 친밀도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의 친밀도는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고 그분의 말씀이 또한 우리 안에 거할 때에 생기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으며, 그렇게 구한 것들은 또한 즉시 응답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요15:7).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으며, 또한 마지막에 가서는 가지처럼 잘려 나가 밖에 버려져 불에 던져져 살라지고 말 것이다(요15:6).
5.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초신자들은 사실 사람의 말만 듣는 것으로서 그 속에 역사하고 있는 영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영들을 무조건 다 믿지 말라고 권고한다. 오히려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분별해 보라고 권고한다(요일4:1). 왜냐하면 당시에도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이미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아니면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영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느냐 시인하지 않느냐로 구분하라는 것이다(요일4:2~3).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영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영은 이미 와 있다고 했다(요일4:3). 한편 사도 요한은 2장에서도 역시 적그리스도가 누군지를 경고하였다. 적그리스도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하였다(요일2:22).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했다(요일2:22). 이는 당시 초기 기독교 이단 세력인 영지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이신 아들은 하나님으로 인정했지만 여호와는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께서는 물질을 창조했기 때문에 저급한 신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여호와와 예수님은 같은 하나님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아들을 위하여 모든 창조물들 창조했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특별히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 곧 예수께서 물과 피로 오신 것을 믿지 않는 자는 적그리스도인 것이다(요일5:6).
6. 성도들이 적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이 말한 바, 적그리스도란 악한 자인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악한 자인 사탄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는 이 세상의 임금(왕)으로 활동하고 있는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다(요12:31, 14:30, 16:11). 예수께서는 그를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하셨다. 사실 영적인 권세로 서열을 매기자면 그는 하나님 다음으로 지혜와 능력을 소유한 자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그를 어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임금의 통치를 받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 수가 있는가?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악한 자인 사탄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가서 내주하고 있는 분이 이 세상에 있는 악한 자 곧 사탄 마귀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요일4:4).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탄 마귀가 아무리 위대한 지혜와 강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자를 결코 손댈 수가 없는 것이다(요일5:18).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들이 비록 사탄 마귀보다 약한 존재일지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사탄 마귀는 우리가 가진 권세와 능력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강한 능력과 권세와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훨씬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은 이와는 달리 오히려 이 세상 임금인 사탄 마귀의 말에 순종할 것이라고 했다(요일4:5). 이는 그들이 세상 마귀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라고 했다(요일5:6).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세상 임금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서 성도들은 누가 진리의 영을 소유한 자인지 반대로 누가 미혹의 영을 소유한 자인지를 구분할 수가 있는 것이다(요일4:6).
7. 나오며
요한일서는 구조가 참으로 특이하다. 점진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수미쌍관형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일서가 순환론적인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동일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의 말씀을 통하여 '형제 사랑'에 대한 권면과 '적그리스도'에 대한 분별력을 갖추도록 2장에 이어 또다시 그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말씀을 들었다. 그래서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요한일서는 반복해서 말씀을 가르침으로 초신자들을 깨우치고 양육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이 책의 기술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은 간단하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요20:31). 그러나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은 하나가 아니다. 사실 4가지로 나온다. 첫째는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자들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 쓴 것이기 때문이다(요일1:4).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하고 마귀에게 속하게 만들어 버리는 죄를 더 이상 짓지 않게 하려고 썼다고 했다(요일2;1). 고로 성도들의 일상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죄를 범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는 성도들이 미혹하는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고 그들을 분별하여 그들에게 속하지 않기 위해서라고도 말했다(요일2:26).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요일5:13). 그렇다. 요한일서는 이처럼 영생에 관한 서신이요, 이단에 대한 예방 주사를 맞히기 위한 책이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는 이 책을 통하여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을 더 성장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죄를 짓지 않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러한 생명의 능력들이 형제 사랑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오고 있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잘 분별하여 시간을 허송세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영적 싸움에서도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1년 12월 08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