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요한일서의 내용과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사실 요한일서는 전체를 한 덩이로 읽거나 특정 구절을 통해서 은혜받기는 쉽지만 그 속에서 구조를 발견하기란 여간 힘든 구조다. 특히 요한일서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직선적 논리 순서를 따르지 않고 순환론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본다. 예를 들어서 '형제 사랑'에 대한 말씀은 분명히 요한일서 2장에서도 나오고 있지만(요일2:9~11), 또한 3장에서도 다시 나오며(요일3:14~16), 그리고 4장에서도 또 나오기 때문이다(요일4:20~21). 그렇더라도 요한일서의 주제를 살펴보면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1~2장에서는 생명을 가진 자들의 교제(코이노니아)의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삶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3~4장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성도들이 가진 신분과 거기에 따른 합당한 생활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장에 가서는 믿음을 통한 승리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살펴 보게 될 요한일서 4:7~5:3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참 사랑에 근거한 계명 실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중에서도 이번 시간의 핵심 키워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하여 '사랑'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고 '사랑'의 구체화된 역사적인 사건과 '사랑'이 어떻게 우리 믿는 이들에게까지 혜택을 베풀어 주는지 그 메카니즘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곧 계명에 순종하는 일이라는 것까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2. 성도들의 사랑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7~12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은 사실 사랑하며 살아야 할 존재인 것을 천명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요일4:8).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요일4:11).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두 번째 속성을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요일4:8,16). 사실 사도 요한은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성도들과 성도들 사이에 있는 생명의 교제(코이노니아)에 대해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첫 번째 속성으로서 '빛'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요일1:5). 그런데 이제 형제 사랑의 실천을 교훈하면서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통해서 '사랑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말을 살펴보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있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더 강조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곧 사랑은 그것이 어떤 사랑이든지 모두가 다 신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제일 속성은 역시 사랑이기 때문이다.
3. 사랑은 어떻게 밖으로 표출되어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이며 이것을 우리들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중에 '하나님(데오스)'이라는 단어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데, '사랑(아가페)'이라는 단어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을 우선 주의해야 한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정관사가 붙어 있는 명사는 주로 '주어'로 사용된다면,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는 명사는 주로 '서술어'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하나님에게는 무한한 요소들이 들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거꾸로 역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사랑은 하나님이시다'는 말은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에는 사랑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바 되셨던 예수님을 빼 놓고서 '사랑'을 운운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의 기원이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이 거기에 있다고 해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은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공동체나 개인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지 아니한가?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필리아' 사랑이든지 혹은 '에로스' 사랑이든지 그들도 역시 사랑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을 두고서 하나님이 거기에 있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랑만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으며, 또한 구원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려 할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밖으로 표출되어 나타나게 되는지를 알아야 하며, 그렇게 해서 나타난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밖으로 표출되었고 그것의 실체가 나타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출현을 통해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분은 자신이 보낸 독생자를 통해서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사람치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요일4:12, 요1:18). 아니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때 하나님께서 밖으로 표출되어 나타나신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직접 밖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들의 성육신'이다(요일4:9~10).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하신 아들을 이 세상에 화목 제물이자 그리고 구원자로 보내셨기 때문이다(요일4:10,14).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면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4.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라고 하는가?
사람들 중에는 왜 서양 종교의 하나인 기독교를 믿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좋은 종교가 많이 있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좋은 종교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을 죄와 사망과 마귀로부터 건져 주는 그러한 종교는 없다. 그건 우리나라에도 없고 외국에도 없다. 오직 기독교에만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주 예수님을 붙들어야 한다. 왜 그런가? 그분에게는 인류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하여 인류가 가진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요3:16). 그러나 이러한 일은 성경의 기록을 읽어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어디 하루 아침에 되어진 일은 결코 아니다. 맨 처음 창조되었던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롬5:12). 그리고 모든 인류는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창3:14). 그러므로 이러한 범죄에 예외는 없다. 모든 인류가 아담의 허리에 씨로 들어 있을 때에 같이 범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 가운데 이러한 문제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죄의 삯은 무엇인고 하면 사망이요(롬6:23),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가 일어난다(계2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죽기 전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 일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죄값을 대신할 제물을 이 땅에 보낸 일이었는데, 그렇게 해서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시다. 그 일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로서, 예수께서 탄생하기 전 수천 년을 예언을 통해서 말씀하시다가 드디어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그 일이 성취가 되기에 이른다. 그 사건이 바로 아들의 성육신 사건이었다.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화해시켜 준 것이다.
5. 예수님의 오심은 과연 있던 아들의 오심인가 하나님 자신의 오심인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하신(유일하게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아들 곧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니까, 하늘에 이미 있어서 활동하고 계시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라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곧 시간 밖에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맞는 일이다. 하지만 태어나기 전에 아들이 이미 하늘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리아의 태중에 성육신될 때에 그때에 그분은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이 나오셔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품 속에서부터 나와서 성육신하신 것이다(요1:18).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아들은 없었는가? 아니다. 구약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각과 경륜 속에 이미 그분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분은 하나님의 품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아들의 오심은 하나님 자신의 오심인 것이지 또 다른 아들의 오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삼위삼체가 될 수도 있다. 아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원래 한 분이셨다. 그러다가 우리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아들로 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다고 하는 표현이 훨씬 더 성경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모여서 회의를 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구약시대에 한 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신 것이고,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아들'로 오셔서 활동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분이므로,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늘에서 계시는 그분은 아버지라 불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아버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께서 아들로 오심으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6.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메카니즘으로 나에게까지 전달되고 있는가?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지금도 모든 인류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직 하나님께서 아들로 출현하기 전의 시대였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다만 약속의 말씀으로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리고 죽어서 낙원으로 갔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눈에 볼 수 있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12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사도 요한도 역시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을 직접 만져볼 수 있었고 그분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분과 식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대화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없애고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약속한 바대로 구원자이심을 알려 주시고, 드디어 공개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원래부터 죄가 없는 분이시요,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이시므로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로 가셨다. 그리고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 보혜사 성령 곧 그분의 영이신 사람 속에 내주하시는 영을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분이 보내신 영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요일4:1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며 그리스도로 믿고 시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으로 함께 하신다. 이러한 자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약속으로 전달되거나 아들에게서 실현되었으며 지금은 보혜사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와서 그것을 효과있게 하는 것이다.
7.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인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 3가지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으로서 그분이 몸소 나타나셨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3가지 혜택이 주어진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자에게 베풀어지는 3가지 놀라운 혜택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요일4:16). 물론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으로 그분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요일4:13, 3:24). 고로 이러한 성령이 죽을 때에도 떠나가지 않는 자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둘째, 심판날에도 담대함을 가질 것이라고 하였다(요일4:17).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자신에 대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로 인하여 이미 인류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고 회개를 통해서 그것을 유효하게 할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인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분의 구속 사역과 우리의 회개를 통하여 그날 심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셋째,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는 항상 어둠에 있는 자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불안하다. 어둡다. 걱정과 근심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와 저주로부터 벗어난 자는 더 이상 두려움에 매여 있지 않는다. 믿음과 회개로 두려움은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받아본 일이 없거나 그 사랑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8.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자연발로적인 증상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자연발로적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고 하였다(요일4:19).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신 자들은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분의 사랑은 마지 못해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먼저 다가오시는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요일4:19).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라고 했다(요일4:20). 왜냐하면 보는 바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응당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지키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새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5:2~3).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사랑의 드러남이요 실천이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에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틀린 말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라고 말했어야 정확히 맞추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제일 속성은 뭐니뭐니해도 아가페의 '사랑'이다. 그분 안에는 처음부터 사랑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성육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곧 예수님의 오심이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밖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을 속죄 제물이자 화목 제물로서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시고 시간과 공간 밖에 계시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미 만세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된 것은 그분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할 때다. 그러므로 아들의 오심은 곧 하나님 자신의 오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이미 대속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후 당신을 대신하여 성령을 보내 주신 이상 그분이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B.C.8세기경 남유다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그렇다.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그분은 기묘자인 모사(보혜사)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아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예수님을 모르는 자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을 모시고 그분과 함께 사는 자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수시로 그분의 이름을 불러서 그분의 기름부음을 내 안에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을 때에는 이렇게 말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이 너무 길다고 느껴지면,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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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5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