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3(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하나님께서 굳이 아들을 낳으신 이유는 무엇인가?(골1:15~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nfq33urOS9s [혹은 https://tv.naver.com/v/30434246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가장 먼저 아들을 낳으셨다(골1:15~17).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그분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아들' 또는 '독생자'라고 증언한다(요일4:9~10).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아들을 낳으셨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흔히들 아들은 아버지만 못한 존재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아들은 피조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둘 다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독생하신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보다 못한 하나님이 되는 것도 아니며, 아들이 피조물이 되는 것 역시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그래서 이 세상에 들어
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요8:42). 고로 하나님께서 낳으신 분을 가리켜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면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아들을 가리켜 '먼저 나신 이'라고 증언하였다(골1:15).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굳이 아들을 낳으신 것일까?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혼자서 모든 일을 행하시면 되실 것을 왜 아들을 낳으시고, 그 아들을 통해서 일을 하신 것일까? 거기에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다. 오늘은 먼저 첫 번째 이유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언제 아들을 낳으셨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아들을 낳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만물이 생기기 전에 먼저 낳으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들을 '먼저 나신 이'(프로토토코스)라고 증언하고 있으며,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셨으며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증언하였다(골1:16).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살아생전에 마가 다락방에서 아버지께 기도할 때에, 창세전에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지금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요17:5). 그러므로 아들은 만세전에, 시간과 공간이 생기기도 전에 먼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낳으신 분이자 만물의 창조자이신 아들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로고스)이라고도 증언하고 있다(요1:3). 만물이 말씀을 통하여 생기게 되었으니, 만물이 말씀이 없이는 하나도 있게 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예수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계셨을까? 이때만 해도 아들은 아직 육체를 입지 않으신 상태이기 때문에 이때도 역시 아들은 보이지 않는 영체로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한 번 태어난 것이 아니다. 실은 두 번 태어난 것이다. 먼저는 만물이 창조되기도 전에 먼저 태어나셨다. 그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셨다. 그런데 만세전부터 아들로 계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 또 한 번 태어나셨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베들레헴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셨던 것이다. 그래서 이때 태어난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된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때에 자신을 가리켜 1인칭 대명사로서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없이 태어난 그분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마지막 아담'이라고 언급했으며, '둘째 사람'이라고도 말했다(고전15:45,47). 왜냐하면 아담 이후 그분은 사람으로서는 죄없이 태어난 유일한 분이셨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들을 낳으셨다고 해서 아들이 하나님보다 부족한 존재이거나 그분을 피조물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채 있으니 그분은 아버지보다 더 부족한 분이거나 피조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항상 하나로 존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요10:30). 그래서 아들은 결코 아버지로부터 분리할 수가 없다. 아들은 아버지와 다만 구별할 수는 있지만 분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친히 증언하시기를 "나 자신과 아버지 곧 우리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10:30).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며(요14:9~10), "나를 믿는 것은 나를 보셨던 이(아버지)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12:44~45).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보다 부족한 분이 결코 아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신 분'이자,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증언하셨기 때문이다(요8:24,28,58, 계1:17~18, 22:13). 즉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께 "너는 누구냐?"하고 질문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해온 이"라고 하시면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요8:24,28,58).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내가 그"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출3:14~15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 주실 때에 당신의 이름으로 사용하신 것을 그대로 예수께서 인용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당신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하늘에 계신 아들 예수께서 사도 요한을 불러내어 그에게 말씀하실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나는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계1:127~18). 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에서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계22:13). 그분이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는 선언이 예수께서 처음 사용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에게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역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는 선언을 무려 3번씩이나 하셨기 때문이다(사41:4, 44:6, 48:12). 그리고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 곧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을 먼저 하셨으니, 구약으로 치자면 예수께서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예수께서 친히 증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나오셨다고 해서 아버지보다 부족한 하나님이거나 피조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롬9:5). 그분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그분의 발 아래 만물이 있는 것이며, 그분은 만물의 머리로서 만물의 통치자이신 것이다(엡1:22).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리켜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라고 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이셨던 예수님을 가리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증언하였다(계17:14, 19:15~16). 그러므로 우리는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하나님께서 굳이 아들을 낳으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왜 굳이 아들을 낳으셔야 했던 것일까? 그것은 먼저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만물들에게 자신을 창조한 이가 누군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그런 조치를 취하신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들로서 표현하지 않았다면, 피조물은 영영토록 하나님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을 창조한 이가 누군지를 영원토록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노릇하는 거짓 영들에게 속아 피조물인 귀신들을 하나님으로 섬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있다는 것과 자신이 창조주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아들을 낳으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영으로서 그분은 죽을 수도 없을 뿐더러 그 누구도 그분을 볼 수 없으며 보이지도 않는 분이다(딤전6:16). 심지어 영물인 천사들도 본 적이 없으며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피조물이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 곧 아들인 것이다.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만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먼저 아들을 낳으신 것이다.
둘째, 피흘릴 수 없고,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아들을 낳으신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을 거역하고 반역한 마귀와 그의 부하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아들을 낳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피와 살을 갖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죽으실 수가 없다(딤전6:16).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마귀의 말을 들어 영원히 죽게 생겼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은 인간을 내버려두지 않고 그들을 살리시기 위해 대신 죽기로 결정하셨다(히2:9).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죽으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죽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셨고, 아들로 하여금 종의 형체인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죽기 위해서 낮고 천한 종의 형상인 인간의 육체를 입고 태어나셨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이 되신 후에 또한 죽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히2:14).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역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모아 놓고 행한 설교에서 교회를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획득하신) 교회"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피를 흘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피흘려 죽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과정이 곧 하나님이 '아들'을 낳으신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셔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이 하나님되고자 했던 사탄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들이 되신 것이다. 마귀와 그를 따르는 귀신들은 원래 하나님 보좌 곁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천사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하나님을 거역하여 마귀가 되고 귀신이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멸하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 마귀가 보았을 때 육체를 가진 인간은 천사들보다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사람인 이상 그를 죽여 없애버리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탄 마귀는 사람들을 배후 조종하여 죄 없으신 그분을 거짓으로 고소한 끝에 십자가에서 죽게 한다. 하지만 사망 권세는 오직 죄를 지은 자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이 일을 통해 사탄 마귀는 불법자가 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여 이 지상에서 내쫓아 지옥(음부)에 가둬버린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탄 마귀는 지옥에서 나오지 못한 채, 자신의 부하들인 귀신들만 올려보내어 그의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요(요일3:8), 죽음을 통하여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고자 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히2:14).
5. 구약시대에 아들은 과연 어떠한 상태로 계셨는가?
그렇다면 아들이 육신을 입지 않고 계셨던 구약시대에 아들은 어떤 존재로 계셨던 것일까?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그분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날 때에 비로소 붙여진 이름이므로, 그분이 이 세상에 탄생하시기 전에 그분은 '예수'라는 이름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때는 '아들' 내지는 '말씀'으로 계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신격에 있어서 그분은 아버지와 항상 하나이기 때문에 그분도 역시 어느 누구도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피조물들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으로부터 먼저 아들을 낳으신 것이다. 그래서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아들은 어떻게 존재했을까? 그것은 최소 하나님의 형상(고후4:4)이자 영광의 빛(광채)(히1:3, 요1:9)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볼 수 없는데 그분이 빛으로 나타나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빛으로 보여졌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을 빛으로 계시하셨다는 것이요, 그 계시의 통로가 바로 아들이었음을 말해 준다. 고로 구약시대에는 천사들도 역시 아들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하나님의 임재를 빛으로서 조금이나마 감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도 그들이 빛을 직접 볼 수 없기에 두 날개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야 했다. 그러므로 만약 구약시대에 아들이 보여진 존재로 있었다면 천사들도 그분의 존재를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던 루시엘(루시퍼, 마귀)조차도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다. 이는 그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누군지를 알고 싶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신 것은 맞지만 예수께서 육신을 입을 때까지는 그 누구도 아들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는 아들이 다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말씀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아담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의] 아들을 따라 창조될 수 있었으며, 만물들도 생겨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시대까지만 해도 아들은 존재하고 있었으나 형체를 가지지 않는 영체로서 아버지와 같은 영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나타나실 때에 비로소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증언하였던 것이다(요1:18).
6. 나오며
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기도 전에 아들을 먼저 낳으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은 영원히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그분이 창조한 모든 만물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이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방식으로서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게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제 아버지와 아들로 존재하게 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우리는 그분을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구약의 십계명은 그때는 아직 아들도 역시 육신을 입지 않았던 때이므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이 만들어 낸 우상을 섬길 것이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계시고 또한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주신 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신 아들이 드디어 육신을 입고 아들이 되셨으니 우리는 오직 아들이신 예수님만 경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 중에 제자들은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만 경배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분을 바로 하나님으로 경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볼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찌 보면 베드로의 신앙고백 역시 놀라운 신앙고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을 가리켜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예수께서 온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계셨다는 것을 말한 것이며, 그분을 만세전부터 그리스도 특히 만유의 주인이자 왕으로 간증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간증한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감탄하시며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도 이러한 계시의 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자에게 주님께서는 영생을 주신다고 했다(요17:3). 그런 자들이 아들의 나라인 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2022년 10월 23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