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는 자신의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빼앗아간 야곱을 어떻게 되어서 용서해주었을까? 야곱의 철야기도가 쎘기 때문이었을까? 야곱이 보낸 예물 때문에 그의 마음이 녹았던 것인가? 그런데 이것만으로 에서의 용서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또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이다. 하루 아침에 에서의 마음을 바꾸게 하였던 그것,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던 것일까? 여기에 화해와 용서의 비밀이 들어있다.
1. 들어가며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아닐 수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그냥 다 바꿀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을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따르면, 도무지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의 마음이 바꾸어지는 놀라운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있어 동생을 죽이려고 4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오고 있는 쌍둥이 형 에서가 마음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말 하루 아침에 형이었던 에서가 동생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대체 에서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동생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야곱은 대체 어떻게 되어서 형의 분노와 살인의 마음을 내려놓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에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이 들어있다. 아무쪼록 이 말씀에 감추인 영적인 비밀을 모두가 다 깨닫고 실천함으로, 우리 가운데에서도 풀 수 없는 어려운 인간관계의 실타래들이 다 풀리게 되는 놀라운 일이 있기를 바란다.
2. 성경은 대체 누가 쓴 것인가?
성경은 누가 쓴 것인가? 아직까지 어떤 성경책은 그 저자가 분명하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성경 66권의 저자들을 살펴보면 대략 42명 정도가 된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 가운데 어떤 내용은 누군가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아 쓴 것이 아닌 것들도 있다. 특히 창세기 이야기가 그렇다. 창세기는 B.C.1,500년경 출애굽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쓴 성경책인데,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족장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도 썼다. 대체 어떻게 알고 쓴 것인가? 그리고 모세는 과연 자신이 쓰고 있는 성경책의 내용을 다 이해하고 쓴 것일까?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아 쓴 것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에 와서야 성경의 내용이 무엇인지 밝혀지는 것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창33:8의 말씀이 그렇다.
창33:8의 말씀은 이렇다.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창33:8)" 이 말씀은 에서가 자신의 동생 야곱과 재회하면서 정말 궁금했던 것이 있어서 야곱에게 묻는 질문이다. 그가 오면서 어떤 떼(무리)를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보통은 표준새번역에서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에서가 물었다. “내가 오는 길에 만난 ‘가축 떼’는 모두 웬 것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형님께 은혜를 입고 싶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창33:8)" 그렇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기 위해 오고 있는데 그를 향해 오고 있던 가축떼를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것은 야곱이 보낸 예물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것을 왜 나에게 보냈느냐? 나하고 화해하기 위해 그 예물로 보낸 것이냐" 하고 묻는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영어성경 번역본과 한글성경 전부가 그렇게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더 많은 영적인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에서가 전날밤 만났던 것은 가축 떼만이 아니었다. 다른 무리를 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히브리어 원문을 따라 창33:8을 직역해보자. "그리고 그(에서)가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미] 만났던(마주쳤던) 바 이 모든 군대(‘마하네’=army)는 너에게 누구냐?(‘미=who’)” 그(야곱)가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 주의 두 눈에 호의를 입기를 원합니다.”(창33:8)"
그렇다. 에서가 오면서 만났던(meet) 아니면 마주쳤던(encounter) 것은 가축 떼만이 아니었다. 군대도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것이 가축 떼만을 의미했다고 한다면 그 단어는 "에데르"라는 히브리어를 썼어야 한다. 하지만 모세는 그 단어를 쓰지 않았다. '군대' 혹은 좀 더 나아가서는 '진영'이라는 뜻의 '마하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천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하마네"라는 단어는 창32:1~2에 나오는 것으로서, 야곱이 라반과 헤어지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고향인 가나안 땅의 브엘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날 때에, 야곱이 만났던 두 무리의 하나님의 군대('마하네')를 가리킨다. 그래서 야곱은 천사들을 본 후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불렀다. 참고로 "마하네"라는 단어는 단수집합명사로서 "군대"를 의미하는 단어이며, "마하나임"은 단수 "마하네"에다가 복수접시마 "임"을 합쳐져서 만들어진 "두 군대, 두 진영"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에서가 만났던 것은 야곱이 에서의 분노의 마음을 삭이기 위해 보낸 예물 뿐만이 아니라, 어떤 군대,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천사의 무리를 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번역본에서는 거의 생략된 "너에게"라는 단어가 히브리어원문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더군다나 "누구냐?"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미(who)"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도 그것은 천사의 무리였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가축 떼를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누구냐?(미=who)"가 아니라 "무엇이냐?(마=what)"가 사용되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로 에서가 간밤에 자신의 마음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천사의 무리와 마주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의 기록이기 때문에 인간의 3차원적인 이해를 가지고서는 이해하지 못할 본문도 더러 있는 것이다.
3. 꼬인 인간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2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였지만 완전히 꼬여 있었다. 왜냐하면 동생으로 태어났던 야곱이 형의 장자의 권리를 팥죽 한 그릇으로 빼앗았고, 장자의 축복도 대신 받아서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은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었다(창27:41). 아버지를 곡할 때가 왔으니 그때 가면 동생을 죽이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간파한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게 한다. 그리고 야곱도 그곳에 가 있다가 처자식과 가축을 데리고 20년만에 돌아오게 되는데, 이제 야곱은 꼬인 형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때 야곱이 형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행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에서의 감정을 풀기 위하여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형의 노여움을 달래보기 위해 그는 먼저 형에게 줄 화해예물로서 가축들을 무려 550마리나 보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사생결단의 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창세기 32장의 이야기다. 그러면 형 에서는 동생이 보내준 예물을 받고 자신의 마음을 뒤바꾸게 된 것일까? 한 번 생각해보라. 20년동안 동생을 죽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에서가, 과연 동생이 보내준 예물 좀 받았다고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사생결단의 기도가 에서의 마음을 바꾸었단 말인가? 그것은 그것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서 야곱의 기도가 에서의 마음을 바꾸게 하였는지 설명하라고 하면 설명하는 사람이 없다. 그때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이야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만졌기에 에서가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한다. 하지만 서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에서가 마음을 바꾼 것인가?
4. 형 에서는 왜 동생 야곱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었는가?
결론적으로 형 에서가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은 2가지 차원이 있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두번째 차원은 첫번째 차원을 결코 앞서지는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번째 차원이 해결되지 않는 한 두번째 차원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 때문이다. 먼저의 것은 야곱의 기도에 다른 어떤 것이고 두번째의 것은 야곱의 진심어린 회개의 모습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간밤에 대체 무슨 일이 에서와 야곱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창33:8과 창32:11에 나와있다. 먼저, 창세기 33:8에 보면, 에서가 경험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간밤에 에서가 한 무리의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 야곱도 창32:11을 보면, 한 무리의 천사들을 만났음을 알 수 있다. 즉 에서와 야곱이 간밤에 각각 다른 한 무리의 천사들을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에서가 만났던 것은 "가축 떼"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야곱이 만났던 것도 그것이 무엇인지 애매하게 표현된 "무리"를 만났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둘이 만난 것은 둘 다 또깥이 "군대"("마하네")를 만났다고 되어 있다. 즉 에서와 야곱은 둘 다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났던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야곱은 두 무리의 군대(하나님의 천사들)를 만났다. 야곱은 그들을 보았다. 그런데 한 무리의 군대는 야곱과 함께 머물렀고(창32:11) 다른 한 무리의 군대는 에서에게로 간 것이다(창33:8). 먼저 야곱과 함께 하였던 군대는 야곱의 일행과 같이 있었는데, 야곱이 그날 밤에 자신의 두 아내과 두 여종과 열한 아들과 가축 떼들을 얍복강을 건너게 한다. 그리고 그만 홀로 남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무리의 군대가 있었다. 그 군대오 함께 야곱은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났고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였다. 여기서 씨름을 하였다는 것은 그 사람과 힘겨루기를 하였다는 뜻이다. 사실 그때 나타난 사람은 한 무리의 군대에 속해 있던 천사였다. 야곱은 그가 천사였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천사를 하나님을 대신하는 천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를 꽉 붙잡았고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치면서 야곱을 축복해주고 떠나간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다는 약속을 다시 한 번 확답받은 것이다.
둘째, 얍복강을 건너 저 멀리서 오고 있던 에서에게도 한 무리의 군대가 갔다(창33:8).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서의 눈을 열어 그 천사들을 보게 하셨다. 그러므로 에서도 아침에 야곱을 만나자 그 군대가 야곱이 보낸 것이냐로 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에서에게 나타났던 천사들은 대체 무엇때문에 에서에게 간 것인가? 그것에 대해 구약성경의 설명해주는 야사와 같은 기록 곧 "야살의 책"을 살펴보면, 에서의 살인의지를 꺾기위해 보내어진 천사들이라고 나와 있다. 이때 천사들은 중무장을 하고 있었고 위엄이 가득했는데 그들은 자신을 "야곱의 종"이라고 소개하였고, 만약 에서가 야곱의 형제만 아니었어도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에서가 잔뜩 겁을 먹고는 동생 야곱을 죽이라고 가는 것이 아니라, 20년만에 동생이 온다고 하기에 그냥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고 나온다. 그럼, 진짜 그러한 일이 그날 밤에 일어났던 것일까?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는 성경의 기록이 아니므로 참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라도 본다. 왜냐하면 중무장한 군대의 위협이 일시적으로는 에서의 마음을 두려워하게 하여 야곱과 화해하도록 할 수는 있었겠지만, 영구적으로 그렇게 할 수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창세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에서와 야곱은 완전한 화해를 이루었고, 이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둘이 함께 와서 엄숙히 장례를 잘 치러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날 천사들이 에서를 만나 엄포를 놓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을 알려주는 힌트가 있다. 그것은 한 무리의 천사들이 에서에게 갔는데, 그들이 "군대(마하네)"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군대는 싸움을 하러가는 천사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 천사들은 에서와 싸우러 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에서 안에서 혹은 에서 밖에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은 제압하러 간 것이라고 보여진다. 당시 에서는 분노와 혈기의 영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20년동안 악한 감정을 풀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왔으니 아마 미움의 영과 살인의 영도 거기에 붙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에서의 분노와 살인의지를 잠재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얍복강에서 야곱이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 기도의 핵심은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야곱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다음날 아침 에서를 만나면서 야곱이 했던 놀라운 행동들은 그가 전날밤에 얼마나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안 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야곱은 과거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형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 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살인의지를 불타게 했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야곱의 기도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천사들이 에서에게로 가서, 에서 안과 에서 밖에 있던 영들은 모조리 결박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들을 결박하여 내쫓아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야 에서의 마음이 하루 아침에 바뀔 리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 이제 에서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전날밤 야곱이 드린 회개기도에 따라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있던 에서의 마음이 쑥 가라 앉게 되었다. 왜냐하면 한 무리의 군대 천사들에 의해 악한 영들이 쫓겨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이었다. 에서가 보니 야곱이 자기를 만나기 위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야곱의 모습은 초췌했다. 그러면서 그는 절뚝 절뚝하면서 절고 있었다. 왜냐하면 밤 사이에 환도뼈가 위골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형의 용서를 받고자 하는 모습은 가련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그의 몸을 땅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 것 같다. "형님, 과거 제가 저질렀던 잘못을 용서해주소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번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걸음을 떼고는 또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또 한 걸음을 떼더니 또 그렇게 하기를 7번이나 반복하였다. 아무리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크기로, 그처럼 자신을 낮추면서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는 야곱을 보면서, 에서의 마음은 연민의 정으로 가득차기 시작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은 동생을 죽이려고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로서 장자 엘리바스가 벌써 나이가 55세가 되었는데, 야곱은 데리고 온 것은 이제 막내는 5살 정도였고 장자는 이제 고작 13살정도니, 저렇게 어린 자식들을 내가 죽여서 무엇하랴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생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자 예물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 예물이 무려 살아있는 가축으로서 무려 550마리나 되었다. 그러니 에서의 마음이 동생을 불쌍히 여기게 된 것이다. 동생이 잘못을 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자기를 낮추어 용서를 구하는데 어떻게 그를 외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콧물이 뒤범벅이 된 동생을 일으키는 형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렇게 착한 동생을 내가 죽이겠다고 400명의 군사를 거느니고 오다니..." 에서는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에 울었다. 그리고 동생은 형이 자신을 죽일 줄 알았는데 아무런 조건없이 자신을 받아준 것에 감사해서 울었다. 그래서 둘은 한 동안을 흐느껴 울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는 싸우지도 않고 다투지 않고 서로를 위해 살겠노라고 다짐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형제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5. 나오며
많은 사람은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한다. 야곱이 철야기도 하며 사생결단의 기도를 했던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바꾸어주셨을 것이라고 말이다. 말은 맞다. 하지만 간밤에 에서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에서가 마음을 바꾸었겠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라. 아니다. 분명 간밤에 에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하늘의 군대 곧 한 무리의 천사들을 만났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창33:8). 고로 그 군대는 악한 영들을 제압하기 위해 파송된 천사였다. 그러므로 혈기등등한 에서의 마음이 서서히 바뀌게 된 것이다. 그에게서 악한 영들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그제야 평점심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동생이 보낸 예물로서 550마리의 가축 떼를 보았고, 그리고 동생이 땅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가련한 모습을 그가 지켜 본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죽이려고 한 사람들이 이제 삐약삐약하는 어린이들이도 있다는 것을 보았을 때, 에서의 분노의 마음도 가라앉게 되었을 것이고, 연민의 정이 그 속에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에서의 마음이 하루 아침에 달라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면 악한 영을 먼저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을 제압하기 전에는 사람이 결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악한 영이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마음을 바꾸려면 먼저 악한 영을 제압하기를 바란다. 둘째로, 그리고 사생결단의 기도를 해야 한다. 특히 자신의 잘못을 아뢰는 회개기도를 해야 한다. 회개할 때 악한 영은 사람에게 붙어있을 근거를 상실하고 떠나가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회개기도문으로 직접 수 백 번을 회개해보니 이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본문도 이해하게 된 것이다. 회개기도하자. 그런 다음에 상대방의 용서를 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보자. 그래서 정말 진심어린 사과의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보자. 만약 야곱이 회개기도를 잘 했다고 치자. 그후에 야곱이 형의 용서를 받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에서는 과연 과연 동생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었을까? 아니다. 두 가지는 같이 있어야 한다. 먼저는 영의 문제를 해결하자. 영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영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지라도 용서받기 위해 내갈 할 수 있는 진심어린 사과를 하자. 그럴 때 야곱처럼 새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6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