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성도에게 빠짐없이 달란트와 사명을 주시는 것인가? 우리를 쉽게 부려먹으시려고 그러신 것인가? 왜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는가? 그가 주인의 재산이라도 축내거나 허랑방탕하게 써서 그렇게 된 것인가? 그리고 그가 쫓겨난 장소는 대체 어디인가? 달란트에 얽힌 그동안 알려지지 않는 많은 비밀들이 여기에 있다. 오늘은 그 놀라운 비밀을 한번 들추어내 보자.
1. 들어가며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나,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는 종말을 맞이하는 자세에 관한 비유 말씀들이다. 이 세 개의 비유는 셋 다 그 결과가 둘로 딱 갈라지게 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로 딱 갈라지고, 달란트의 비유는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갈라지게 되며,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의 비유는 만세 전에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양과 그리고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로 들어갈 염소로 갈라진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둘로 딱 갈라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는가? 그가 주인의 것이라도 허비했던 것인가? 세상 쾌락을 위해 주인의 것을 낭비라도 했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되었는가?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임직자를 세울 때 이 말씀을 즐겨 사용하는 본문으로서가 아니라, 마지막 시기에 심판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로서 들여다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 비유 말씀을 통하여 과연 '달란트'라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사명과 직임을 맡았다는 것이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지옥의 형벌에도 차등이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놀라운 영적인 진보가 있기를 바란다.
2. 달란트의 비유는 어떤 이야기인가?
달란트의 비유는 불신자들에게 주신 비유가 아니다. 먼저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비유이고, 오늘날에는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라고 주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어떤 이야기인가? 그것은 어떤 부자 주인이 먼 여행을 떠날 때에 자기의 종들을 불러다 놓고 자신의 소유물을 맡겼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주인이 그냥 자신의 소유물을 넘겨준 것이 아니라 종들의 능력에 따라 맡기게 된다. 그러자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준 은전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게 되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그만 땅에 파묻어 두고 만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주인이 다시 돌아왔다. 그때 주인은 달란트를 주었던 종들을 불러서 회계를 한다. 그러자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그것들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다고 했다. 그러자 주인이 매우 기뻐하면서 그에게 칭찬을 하고는 그가 앞으로 누릴 복에 관하여 말씀해 주신다. 그것은 당장은 주인의 즐거움 안으로 들어 오라고 하는 것이었고, 앞으로는 더 많은 주인의 것을 그에게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달란트 받은 자의 보고가 있었는데, 그도 역시 두 달란트를 더 남기게 되었다고 보고하니 주인은 또다시 크게 기뻐하면서 다섯 달란트 더 남긴 종의 경우처럼 똑같은 종류의 칭찬을 해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달란트 받았던 자의 차례였다. 그는 주인에게 말했다. "당신은 씨 뿌리지도 않았으면서 거두려고는 하는 주인이고, 알맹이를 얻으려고 흩날리지도 아니하면서 모으려는 가혹한 분이라고 알았기에, 당신이 두려우서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여기에 있습니다."하고 그 달란트를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그에게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여, 나는 씨 뿌리지 않았던 곳에서 거두고, 흩날리지 않았던 곳에서 모으는 줄을 네가 알고 있었느냐? 그러면 너는 마땅히 내 은전들을 환전업자들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돌아온 후에 나의 것을 이자와 함께 내가 받게 했어야 했다"고 하면서,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라고 명령하였으며, 그 쓸모없는 종을 더 바깥 쪽의 어둠 안으로 쫓아낼 것과 그러면 거기서 울부짖음과 이빨들을 갊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 내용이다.
3. 주인이 종들에게 맡겨준 '달란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비유는 사람마다 주어지는 달란트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여기에 나오는 비유 가운데 '주인'은 예수님을 뜻하고, 종들은 '주인'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은 사역자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주인이 종들에게 주셨던 '달란트'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 달란트를 능력, 은사, 사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체는 하나님께서 예외없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서 일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자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아무것도 없이 빈털터리로 살아가도록 놔두지 않고 그로 하여금 일할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자본금을 배려한 것이 바로 '달란트'인 것이다.
그렇다면, '달란트'는 어떻게 해서 정해지고 분배되는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며 실제 영적인 세계를 꿰뚫고 볼 때 알 수 있는 사실은 '달란트'는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부여한 사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것에 의해서 정해진다. 첫째, 달란트는 부모의 신앙적인 유산으로 인하여 결정된다. 부모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충성했고 열심을 내었느냐에 따라 또한 부모가 얼마나 회개를 많이 했느냐에 따라 자식에게 주어지는 은사와 달란트와 능력이 어느 정도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상당히 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그 사람을 보내실 때에 주신 사명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천국에 그의 영혼이 있다가 이 세상으로 보내어서 어머니의 자궁 안에 들어가게 된다. 보통 임신 후 두 달 정도 지난 시기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보내어지는 사람의 영혼의 나이는 사실 제각각이다. 그 영혼의 나이가 클수록 사명이 큰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달란트를 정하실 때에 부모의 신앙의 유산만으로 정하시지 않는가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 세상은 악한 자인 사탄 마귀의 세상이므로 그냥 놔 두어서는 스스로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올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을 지정하여 이 땅에 내려보내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그래서 이러한 사명도 그 사람의 달란트를 결정해 주는 것이다. 셋째, 달란트는 위의 2가지 것 외에도 본인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소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부모로부터 영적 유산을 받은 것도 없고 하늘의 소명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이 땅에 살다가 말씀을 들어 보니 하나님께서도 소원을 갖고 계시는데 내가 그 소원을 자신이 이뤄 드리겠다고 소망하고는 주님께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달란트의 분량을 주실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각자의 달란트는 이 세 가지 것에 의해 결정되어 그 사람의 몫이 되는 것이다.
4. 왜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상관하시고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시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셔서 자기 나름대로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가? 그 대답은 사실 너무나 놀라운 것이요 충격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 곧 악하고 게으른 자가 나왔던 이유들 중의 하나가 바로 그가 이러한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달란트를 주시는 진정한 이유를 분명히 밝혀 주셨다면, 아마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란트는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달란트(자본금)로 천국의 것을 준비하라고 주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는데, 이 세상에서 하늘의 것을 준비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와서 누리게 될 축복을 이 땅에서 보다 더 쉽게 장만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란트에 대한 우리의 기본 개념은 상당히 수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교회에 다니는 상당수의 성도들이 한 달란트 받았던 자의 생각을 똑같이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무슨 꿍꿍이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주인이 준 돈을 가지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해 봤자 자기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았던 자처럼 그 돈을 열심히 불려 줄 생각이 아예 없었다. 누구 좋은 일 하려고 그 돈을 불리겠어 하면서 그는 그 돈으로 일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그 은전들을 고리대금업자에게도 맡기지 않았다. 다만 그 돈을 축내지만 않으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땅 속에 파묻어 두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훗날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그것을 그대로 꺼내어 주인의 손에 안겨 주었다. 그렇다면 그 종은 선한 종인가 악한 종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주인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악한 종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도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 결산할 때에 자기가 남긴 것 만큼을 자기에게 도로 준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그때 주었던 자본금까지도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 참으로 어리석은 종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섬기고 있는 주인이지만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도무지 알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주인을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자기를 실컷 부려먹고 그 이익만을 챙기는 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주인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것을 종들에게 줄 것인지를 생각하고 연구한 끝에, 내려 준 방법이 바로 미리 달란트를 맡겨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가 감당할 수있는 분량 만큼의 달란트를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둘 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충성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들은 주인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시 주인이 돌아올 때에 어떻게 하면 주인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무런 이유없이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분량의 돈을 맡겼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에 주인이 그들에게 맡긴 돈의 액수는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었다. 왜냐하면 한 달란트는 은 34kg 정도 되는 돈으로서,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데, 그때 주인이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주었던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결국 1달란트는 노동자의 20년치 품삯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니 한 달란트 받은 자라도 기본 자금은 넉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이라도 이렇게 생각했어야 했다. 주인이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어마어마한 돈을 맡기실 때에는, 나에게 어떤 기대나 각오 그리고 결단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며 생각했어야 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형편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렇게 많은 달란트를 받을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왜 그렇게 많은 것을 맡겨 주셨는가를 한 번쯤은 생각해 봤어야 했다. 그래서 주인의 기대와 바램에 부응하는 자가 되기를 사모해야 했던 것이다. 최소한 아무런 조건없이 그 많은 돈을 자신에게 맡겨 준 주인에게, 똑같이 보답하려는 마음이나마 가졌어야 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는 그러한 마음을 똑같이 가졌지만, 한 달란트를 받았던 자는 주인을 나쁜 고리대금업자요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해 가는 가혹한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아예 처음부터 일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찌하든지 그것을 잘 보존해 놓았다가 주인에게 돌려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그 많은 세월 동안 그것을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보관하였으니 땅속에 묻어 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러한 생각 속에서 열심이 나오겠으며, 충성스러움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는 주인을 더 부자되게 하려는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돈을 가지고 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의 기저에는 자신의 게으른 습관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는 주인을 이롭게 하는 것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기가 땀 흘려 주인을 위해 일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날 결산 때에 그는 주님으로부터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쫓겨난 곳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한 달란트를 받았는데 그대로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고스란히 그대로 바친 종이 주인으로부터 들었던 결산의 말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가 악하고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가 악하다고 한 것은 그가 주인을 매우 곡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주인을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종들을 부려먹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정도로 알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주인은 사탄 마귀인 것이지 결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시 우리에게 자본금을 그냥 무료로 대주시면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받아 누릴 것을 장만하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를 받았던 자가 쫓겨나게 되었던 장소는 대체 어디인가? 성경에 보니, 그곳은 '더 바깥 쪽의 어두운 곳'이다(마25:30).
그런데 새 예루살렘 성 밖도 크게 세 가지 종류의 각각 다른 장소가 있었다. 첫째는 그냥 '성 밖'이다. 이곳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남겨진 장소요 버려진 장소다(마25:10). 하나님의 임재를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장소가 바로 그 성 밖인 것이다. 둘째,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쫓겨난 장소로서 '바깥 어두운 데'가 있다(마25:30). 그런데 이 표현은 비교급으로서, '더 바깥의 어두운 곳'이다. 그런데 이 장소는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종류의 지옥에 떨어져 이빨을 갈게 되는가? 그것은 마태복음에 보니 세 종류다. 첫째로, 예복을 입지 않고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갔다가 쫓겨난 자로서 그는 손과 발이 묶인 채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된다(마22:13~14). 둘째로, 주의 종들이기는 한데, 주님이 늦게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는 세상의 친구들과 함께 쾌락을 쫓아갔던 악한 종이 있다(마24:51). 그런데 이 친구는 채찍질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까지 받을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있다. 그는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그는 손발이 묶이지도 않았으며, 채찍질을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을 받지도 않았다. 지옥은 이처럼 각각의 장소가 있다. 셋째로, 불이 타는 장소에 떨어진 자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은 믿음 있는 자라 말하지만 행함이 없는 거짓된 믿음을 소유한 자로서 '가라지'이자 '염소'다. 그렇지만 세 군데의 장소 공히 성 밖에 있는 장소들인 것이 분명하다.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이며, 형벌 받는 곳이자, 항상 불과 유황이 타는 못이다. 그러기에, 지옥에서도 차등 형벌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파악할 수 있다.
6.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럼,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달란트의 비유를 들으며, 어떤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내게 과연 어떤 달란트가 주어졌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도 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게 해 주는 자본금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했다면 이제는 그 사명을 따라 충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것은 우리를 부려먹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이용해 하나님 자신의 실속을 챙기기 위함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보다 더 넉넉한 자본금을 확보하여, 하늘나라의 것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가진 자가 가져야 할 첫 번째 생각은 하나님을 나쁜 분 혹은 악한 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죄인이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피조물의 형상을 입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능력도 스스로 제한하시면서 기꺼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이나 사명에 대해 불평 불만하지 말자. 달란트가 클수록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상이 크다는 것을 생각하자. 그리고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자가 충성했듯이 우리도 충성하자.
7. 나오며
그동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어 우리를 부려먹으려 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와 정반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려먹으시려고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들어가서 더 큰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직분도 주시고 달란트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끝까지 잘못 생각하여 우리가 받은 직분이나 달란트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물질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계속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그 날에 한 달란트 받았던 자의 운명에 처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달란트와 은사와 사명을 주신 것이다. 첫째, 우리가 죽을 때에 반드시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주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인이 칭찬할 때 하신 내용과 같다. "네 주인의 즐거움 안으로 들어오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우리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될 때에는 거기에서 우리가 차지할 기업과 거기에서 누릴 영광을 위해 그것을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복과 아울러 거기에서 우리가 왕 노릇할 자가 되게 하도록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달란트와 은사와 사명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와 은사와 사명이 클수록 그것을 자신의 짐이나 부담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을 축복을 위한 기본 자본금이라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을 가볍게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달란트를 기대하고 그것을 가지고 활용하는 자는 그날에 우리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칭찬을 듣고 상급을 받게 되어 하늘의 기쁨이 가득차고 넘치며 충만하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9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