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야곱의 인생 가운데 2개의 과제는 무엇인가? 하나는 자신의 친족에게 가서 아내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형에서와 앙금을 제거하는 것이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면서 첫번째 문제는 해결했다. 하지만 진짜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형 에서와의 재회인 것인데, 야곱은 과연 형의 감정을 누끄러뜨리고 자신의 형과 재회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야곱은 그것을 결국 해냈다. 형 에서와 재회하고 화목한 형제가 것이다. 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을 일어났길래,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형 에서와 화해를 할 수 있었을까? 여기 그 2가지 방법이 있다.
2. 왜 형 에서는 동생을 죽이러 오고 있었는가?
야곱의 평생 과제의 한 가지는 외삼촌 라반에게 갔을 때 그토록 고생해가면서 결국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면 한 가지 과제가 남았다. 그것은 분노로 가득찬 형 에서와 재회하는 것이었다. 왜 형은 20년이 지나도록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을까? 그것은 야곱이 쌍둥이 형의 장자권과 축복을 야곱이 가로챘기 때문이다. 출생을 기준으로 한다면 장자권은 쌍둥이 형이었던 에서에게 있었지만 결국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왜냐하면 야곱이 16살 때에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사들여였기 때문이고, 또한 60년이 지난 76세 때에는 형이 받을 장자의 축복마저 형으로 위장하여 받아 가로챘기 때문이다. 고로 형의 입장에서 보면 동생은 자시의 복을 가로챈 나쁜 인물인 셈이다. 장자의 명분이야 팔았다고 칠 수 있겠지만, 장자의 축복은 에서가 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야곱은 자신의 어머니 리브가와 지시에 따라 에서가 받을 장자의 축복을 중간에서 가로챘다. 그러자 에서는 동생을 죽이려고 작정하였다. 그러자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하도록 조치한다. 그리고 부모를 떠나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에는 거기에서 아내를 얻어오라는 명을 받는다. 왜냐하면 에서는 가나안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함으로 이미 언약계승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정처없이 길을 떠났고, 한 달 여만에 밧단아담의 라반의 집에 도착하게 되고, 우물가에서 만난 라헬을 사랑하여,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14년간을 종처럼 처가살이를 해야 했으며, 또한 자신의 재산을 얻기 위해 6년을 일한 끝에, 4명의 아내들과 13명의 자녀들과 막대한 재산을 얻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형 에서는 자신이 빼앗겨버린 장자의 명분과 장자의 축복을 잃어버린 탓에 동생을 죽이라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야곱이 도망쳐버림으로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동생 야곱이 사람을 보내와서 고향 아버지의 집으로 온다고 친절히 기별한 것이다. 그러자 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을 죽이려고 오고 있었다.
3. 야곱은 어떻게 되어서 형 에서의 마음을 바꿀 수가 있었는가?
이제 야곱은 형하고 정면승부를 벌여야 했다. 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든지 아니면 형하고 화해하여 풀든지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해야 했다. 만약 가만히 있게 된다면 형 에서는 틀림없이 자기와 이제 자기가 20년동안 수고하여 얻은 처자식들과 재산을 다 쓸모없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형 에서와 화해할 것인가? 야곱은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먼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곧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든지 자기와 함께 할 것이며 야곱을 이끌어 가나안땅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허락한 모든 것을 다 이루기까지 하나님이 야곱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창28:15)을 상기해냈다. 그리고 또한 "이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31:3)"는 말씀에 상기해내었다. 그래서 그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2가지 작전이었다.
첫째, 야곱은 자신의 형의 노한 감정을 풀기 위해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먼저 형에게 보내는 것이었다(창32:13). 그것은 형의 감정을 풀기 위한 화목제물로서 예물을 보내는 것이었는데, 그가 보냈던 것을 살펴보니, 무려 가축들이 최소 550마리나 되었다(창32:14). 암염소가 200마리, 숫염소가 20마리, 암양이 200마리, 숫양이 20마리, 젖나는 낙타가 30마리, 암소가 40마리, 황소가 10마리, 암나귀가 20마리, 나귀새끼가 10마리였기 때문이다. 야곱은 이것을 세 떼로 나누어 각각 형에게 보내었고, 그래서 그들이 가다가 에서를 만났을 때에 그가 물어보면 "이것은 당신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의 주에게 보내는 예물이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하였다. 그렇다. 야곱은 형 에서와의 앙금을 풀어내기 위해 인간적인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물을 준비하여 에서에게 보낸 것이다. 어떻게 해서 얻었던 가축들이었는가? 그렇지만 야곱은 형 에서의 마음을 풀기 위하여 기꺼이 그많은 예물을 준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은 어쩌면 감동작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보라. 과연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에 과연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심으로 문제만 해결했다고만 할 뿐, 진짜 인간적인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그가 혹시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과의 해결일 뿐 그 사람과는 해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주님을 모르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이 녹아내릴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와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마5:23-24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둘째, 야곱은 모든 문제해결의 결정적인 열쇠는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기에 혼자 남아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렸다(창32:24). 그의 각오를 보면 참으로 눈물겹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얍복강가에서 가족들과 가축들을 다 보낸 후에, 자기만 홀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홀로 짊어져야할 짐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홀로 남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가 오직 기도를 붙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엇다. 그러니 그의 앞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나타났다(호12:3~4). 그는 하나님의 천사였으나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천사였다. 그가 그날 야곱의 곁에 있었던 것은 야곱의 기도를 받아서 하늘로 가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가나안땅으로 출발하면서 만났던 두 무리의 하나님의 천사들 중에 한 명의 우두머리가 아닌가도 싶다(창32:1~2). 그때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야곱은 그날에 응답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야곱은 그 천사를 놓아주지 아니한 것이다(사실은 놓아주어야 하나님께로 갈 것인데...). 그때 그 천사는 야곱의 기도를 가져다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온 천삳. 그런데 야곱이 자신을 도무지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그때였다. 야곱이 천사에게 요청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내가 당신을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창32:26)" 그날 야곱은 그 사람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그 천사를 통해 말했다. "네 이름이 이제까지는 야곱이었지만 지금 이 시간부터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서도 이겼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야곱의 기도가 긴박하고 간절했으며,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아니하면 안 될 정도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 우리의 기도는 지금 어떠한가? 사람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고 있는가? 되면 감사하고 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것인가? 그런데 그날 야곱의 기도는 달랐다. 사실 이전까지 야곱은 사람과 겨루어 이긴 자로 살았었다. 그의 이름처럼 말이다. "야곱"이라는 그의 이름은 "뒷발굼치를 잡았다"는 뜻이었다. 이는 인간으로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부림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그날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주었다. "너의 그 간절한 열망은 하나님인 나의 마음도 바꾸어놓는구나. 네가 이겼다. 네가 지금까지는 사람과 겨루어서도 이긴 인생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겨루어서도 이긴 인생이 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나오며
오늘날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 2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인간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것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가 주님께 있다고 믿기는 하지만 그것에 지나쳐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그런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야곱은 성령시대의 사람을 대표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가 했던 일을 보라. 그는 인간으로서 형님의 사죄를 받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 아니 형님의 분노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가 어떻게 했는지를 말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우리는 야곱의 이러한 행동을 볼 때 그에게 결코 손가락질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인간적인 노력은 아마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인간적인 노력은 그렇지 많이 하지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야곱은 인간적으로 해야 할 모든 노력은 다 하였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일은 그만이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는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가족들 중 그 누구에게도 기도부탁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을 뿐더러,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헬을 보라. 드라빔을 훔쳐가지고 나오지 않았던가? 그순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야곱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일은 그가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홀로 남았다. 어떤 이는 그가 야차하면 도망치려고 홀로 남았다고 해석하는데, 야곱을 왜 그렇게도 모르는지 모르겠다. 야곱은 장자계승에 관한 영적인 열망이 너무나도 커서 천사로 나타난 하나님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야차하면 도망치려고 남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럴려면 왜 에서에게 간다고 먼저 기별을 했다는 말인가? 조용히 가면 될 것이거늘. 형 에서는 세일산에 살고 있으니, 자기 아버지의 집은 그 앞에 가나안 땅에 있으니 형도 모르게 얼마든지 아버지의 집에 도착했었을 수 있고, 또한 그때에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면 되니까, 좀 더 쉽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형 에서와 풀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야곱은 풀어냈다.
2021년 06월 25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