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다윗의 도피여정 가운데 가장 힘겨웠던 순간이 오늘 본문에 등장한다. 오늘 다윗의 도피여정은 이렇다. '그일라'에서 '십' 황무지로, '십' 황무지에서 '마온' 황무지로 다윗이 도망을 친다. 그런데 아마도 '사면초가'라는 단어가 바로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다윗은 기브아를 탈출하여 열심히 도망을 쳤다. 사울왕이 이쪽으로 오면 저쪽으로 도망을 쳤고, 사울왕이 저쪽으로 오면 이쪽으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오늘 '마온' 황무지에서 다윗은 더이상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때 다윗은 과연 어떻게 그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오늘 이 장면을 통하여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그 위기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것을 직접 경험한 다윗은 거기서 하나님을 노래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2. 자기도 도망치기 바쁜 이 때에 왜 다윗은 그일라 주민을 구출하려고 했는가?
다윗은 참으로 인정이 많은 사람 같다. 왜냐하면 자기도 도망치기가 바쁜데 그일라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블레셋의 습격을 받아 타작마당의 곡식을 빼았고 가축을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물었기 때문이다. 그냥 모른 채 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자기 코가 석 자인데 지금 남의 힘든 형편을 돌아볼 때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삼상23:2)" 그러자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을 말리며 말했다. "우리가 지금 유다에 있어도 사울왕의 맹추격에 노출되고 있는 상황인데, 어찌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러 가야 합니까?" 그러자 다윗은 또 하나님께 묻는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다시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겨줄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두 말 하지 않고 곧바로 헤렛 수풀에서 약 9km 떨어진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 거민들이 빼앗긴 곡식과 가축까지 찾아온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3.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가?
그렇다면, 다윗은 그일라 주민들을 구출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어떻게 들은 것인가? 다윗이 그때 지시받은 음성은 직접적인 것이었는가 아니면 간접적인 것이었는가? 우리는 이것을 두고 다음과 같은 2가지로 상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정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음성을 들려주었을 가능성이다. 물론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었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들었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물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에봇을 입고 도망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자의 견해도 가능하다. 아마도 후자의 가능성이 더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일라에서 아비아달이 입고 있는 에봇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과 같이 헤렛 수풀에서 그일라 주민을 블레셋에서 구해야 할 것인지 묻는 것이 서로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단,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에는 이것인지 저것인지 둘 중의 하나만 물을 수가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림과 둠밈으로는 두 가지를 동시에 물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일라 주민을 구출한 다음에, 사울이 내려올 것인지와 동시에 그일라 주민이 다윗을 사울에게 넘길 것인지 두 가지를 물었을 때, 대제사장 아비아달은 한 가지씩만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삼상23:11~12).
4. 그일라 주민과 십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주려고 한 것은 다윗에게 어떤 충격을 안겨 주었는가?
다윗에게 도피생활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은 다 다윗을 밀고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다윗이 처음으로 놉 땅으로 도망쳤을 때에 영문을 모르던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음식을 주고 골리앗의 칼을 준 사건이 문제가 되었다. 이것을 빌미로 사울은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 제사장과 그의 동네 전체를 전멸시킨 일이 있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나라 전체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만약 도망치는 다윗을 보호해 주었다가는 동네 전체가 몰살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 그리고 한 번 이러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면 한 치의 앞도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십 사람들은 그때 과연 다윗을 도와주어야 할지 사울을 도와주어야 할지 잘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역사의 축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이전까지 다윗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은 전부다 베냐민지파 사람들이거나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다른 것이었다. 유다지파 땅에 살던 사람들이 다윗을 밀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는 그일라 거민의 배신이었다. 그일라 거민은 유대지파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다윗도 목숨을 걸고 가서 그들을 블레셋에서 구출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대표인 장로들은 이미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주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그러자 다윗이 도망친 곳은 십 황무지였다. 그런데 이곳도 역시 유다지파 사람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다. 사실 사울왕과 십 사람들은 같은 혈족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울왕에게 기별을 넣었다. 다윗이 지금 자기의 땅에 들어와서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어있다고 말이다. 십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이었음에도 북구하고 사울왕에게 "우리가 그를 왕의 손에 넘기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삼상23:20). 이때 다윗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지를 한 번 생각해 보라. 그러자 이내 다윗은 그곳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는 광야의 남쪽 마온 황무지로 도망을 친다. 그러자 이내 사울에게 다윗의 거처에 대한 정보가 보고 되었고 사울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마온으로 향하게 된다.
5. 사울왕이 다윗을 잡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이처럼 사울왕은 이스라엘 영토 내에 모든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다윗을 체포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을 끝내 체포하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사무엘서 기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삼상23:14)" 그랬다. 아무리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하나님의 막으시면 안 되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의 보기에 절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개입하시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내가 하는 일이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일인가 아닌가를 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에 우리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해주시기 때문이다.
6. 도망치고도 힘겨운 시간에 다윗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준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열심히 도망치고 있던 다윗에게 어느날 반가운 한 사람이 찾아온다. 그때는 다윗이 십 광야의 수풀에 있었을 때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왕자 '요나단'이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장남으로서 차기 왕권을 이어받을 자로서 제일순위자였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에 관하여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은 요나단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특별히 요나단은 다윗을 아주 좋게 보았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될 훌륭한 인물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비록 자기와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있는데도 그는 다윗을 친구처럼 생각했고 그를 매우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왕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삶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에도 요나단과 같은 인물이 나라에 많이 있으면 그 나라는 복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요나단이 다윗이 숨어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비상상황인지라 요나단도 그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냥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주고 가려고 왔던 것이다. 그가 다윗에게 전해주려고 한 소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삼상23:17). 그랬다. 도망치기에 바쁘고 힘겨웠던 그 시기에 이 소식은 다윗에게 가물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더 용기를 내게 된다.
7. 마온 황무지에서 다윗이 겪은 절대절명의 순간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인가?
그런데 다윗의 도피여정 가운데 가장 심각한 상황이 찾아오고 있었다. 다윗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거기는 십 황무지였다. 여기서 '황무지'라는 말은 그곳이 뻥 뚫려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무가 없어 숨을 곳이 없는 장소가 바로 황무지이기 때문이다. 사실 다윗도 수풀이나 요새에 거주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다윗의 거처를 밀고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다윗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곳이 바로 마온 황무지였던 것이다. 반대로 사울왕에 있어서 그 장소는 다윗을 찾아내어 체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는 장소가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황무지에는 계곡들이 많이 있어서 이쪽 계곡에서 저쪽 계속까지 건너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거리도 가깝지 않을 뿐더러, 만약 계곡을 내려가서 상대편 지역으로 올라가다보면, 적을 향하여 올라가는 형국이 되는데 그것은 전세에도 불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울왕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빙 돌아가 다윗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쪽 방향으로 돌아서 가보면 다윗은 어느새 저 반대편에 가 있었다. 그러다가 사울왕이 이제 양동작전을 펴기 시작한다. 그러자 결국 다윗도 에워싸이게 되었다. 그러자 다윗은 급히 계곡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사울도 따라서 내려가면 다윗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울에게 급히 전령이 찾아왔다. "왕이시여, 급히 오소서.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이 땅을 침노하고 있나이다."(삼상23:27) 아무리 다윗을 잡고야 말겠다고 하는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는 사울왕이지만 나라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기에 그 순간 그는 다윗을 쫓는 것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블레셋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코 앞에 있어 곧 잡을 수 있는 다윗이었지만 사울왕은 그곳을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자 다윗은 일보직전에 놓임을 받게 된다. 그러자 다윗은 그곳 이름을 "셀라하마느곳"이라고 칭하게 된다. 그 뜻은 "분리의 바위"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자기와 사울왕을 분리시켜주셨다는 뜻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날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다윗은 그날 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블레셋이 쳐들어옴에 따라 사울왕도 다윗을 어쩌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도 마련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람이요 불순종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죄없는 다윗을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경험을 한 후에 하나님만이 자신의 온전한 피난처요 요새라는 것을 노래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것이 시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시91: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8. 나오며
그렇다.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주관하신다. 그분의 눈에 들면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당신의 사람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할 분은 다른 분이 아니다. 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자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다윗은 위기상황에서도 그일라 주민을 구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어찌 했는가? 그는 그분의 뜻에 순종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도 과연 다윗과 같은 삶인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만약 아무리 나 자신이 보기에 멋진 일이고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은 다 허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니 될 일도 되어지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초자연적인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의세계를 영의 세계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영의 세계에서 왕 중의 왕이시다. 그분의 말씀에 굴복하지 아니할 존재는 그 어떤 것도 없으며, 그분의 명령 하나면 모든 것이 중지되고 그분의 말씀대로 다시 셋팅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노력해야 한다. 그분만이 우리의 피난처와 산성이요 요새이시며 피할 바위이시기 때문이다(시18:2).
시18:1-6
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4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2021년 12월 24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