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여호와의 이상적인 종이었던 다윗도 사람이었다. 그도 역시 범죄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어기는 죄를 짓고도 뻔뻔스럽게 지냈다. 남의 유부녀와 간음을 행하고 범죄를 은닉하려고 사람을 죽이게도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 말씀을 정면으로 어기는 파렴치한 행위이자 중대한 범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왕 사울에게서처럼 그에게서 왕위를 빼앗지도 않았고 그를 죽이지도 않았다. 사실 다윗의 범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고 4배의 변상을 해 주어야 할 중대한 범죄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는 그러한 처벌을 무겁게 물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는 편애하시는 분인가? 선왕 사울은 미워하고 다윗은 사랑한 것인가? 언뜻 보기에도 다윗의 범죄에 대한 처벌을 볼 때에, 다윗에 대한 어떤 배려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다윗이 중대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지 않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다윗이 무슨 죄를 범한 것인가?
아무리 하나님께서 인정한 선한 종이라 할지라도 온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예수님 이외에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이미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전혀 안 짓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죄의 경중에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윗은 중대한 죄를 지었다. 십계명 중에서 3가지를 범했기 때문이다. 첫째는 제7계명을 어겼다. 간음죄를 지었던 것이다. 둘째는 살인죄를 지었다. 그것도 죄질이 나쁜 살인죄를 지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직접 죽이지 않고 남을 시켜서 죽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제6계명을 어긴 것이다. 셋째는 탐욕죄를 지었다. 남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는 제10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죄들에 대한 처벌은 무엇인가? 간음죄와 살인죄는 사실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죄다(20:10, 레24:17). 그리고 남의 아내를 빼앗은 죄의 경우도 죄가 무겁다. 그것이 소의 경우라면 다섯 배로 갚아야 하고 양의 경우라면 네 배를 갚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출22:1). 그러니 이것에 상응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윗의 범죄는 사형만이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윗은 죽지 않았다. 왕위를 빼앗기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3. 다윗의 범죄가 가르쳐 주는 영적인 사실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다윗의 범죄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영적인 비밀은 무엇인가? 정리하면 그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받은 자로서 주께서 인정한 종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범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다윗이 주변의 거의 모든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안정을 이루게 될 무렵, 다윗왕도 서서히 긴장이 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을 보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권력의 맛에 점점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를 남용하여 성착취를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모든 사람은 이처럼 죄를 지을 수 있다. 넘어질 수 있으며, 양심이 마비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남자는 성적인 죄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돈과 권력과 여자를 정복할 수 있다면 그 종은 참된 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아담 이후 죄된 본성을 자기 안에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언제든지 죄를 범할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롬5:12). 더욱더 충격적인 사실은 다윗이 성령을 받은 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죄를 범했다는 사실이다(삼상16:13, 시51:11). 물론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성령이 경륜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께서 사람 위에 머물러 있었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에도 내주하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구약시대에도 여전히 성령이 내려오셔서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몇 사람이 되지 않는다. 다윗도 그러한 몇 안 되는 사람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범죄한 것이다. 십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죄를 자원하여 범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멸시하고) 나 보기에게(내 눈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삼하12:9)"라고 말씀하시고 호통을 치셨다. 그것은 그를 왕으로 세워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요 일어나서도 아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이러한 중대한 죄를 범함으로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을 기뻐하시고 그를 나단 선지자에게 '내 종'이라고 자랑하셨던 하나님의 명예는 대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4. 극악무도한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에게 사울왕처럼 왕위를 빼앗지도 아니하고 그를 죽이지도 아니한 것인가? 우리가 그 이유를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결코 미신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신뢰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과 판단이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면 누가 그분을 신뢰하고 따라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과 판단은 원칙이 있어야 한다. 절대 바뀔 수 없고 바뀌어서 안 되는 법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두 개의 법칙이 상충될 때에는 어떤 법이 우선하는지도 알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당신이 세워 놓으신 법칙과 어긋나게 판단하셔도 아니 되고 벗어나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 노릇하기가 그리 쉽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가? 만약 심판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상실된다면 하나님은 마귀도 여전히 심판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왜 사울왕과는 달리 다윗에게는 관대한 처벌을 내리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경 전체를 가지고 그 이유를 3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크게 볼 수 있는 안목이요 둘째는 당장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안목이요, 셋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5. 다윗이 죽지 않았던 첫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나마 그렇게 관대하게 처리하신 것은 그의 윗대 조상(선조들)이 행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갈6:7). 다시 말해 선조들 중에 누군가가 자기의 후손을 위해 심어 놓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윗에게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사실 인간의 모든 일에는 심은대로 거둔다(갈6:7)는 법칙이 통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가 없으며, 콩 심은 데에 팥이 날 리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 심은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윗을 이처럼 살게 했을까? 그것은 그의 선조 3대와 4대 조상이 심어 놓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의 목숨과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는 그의 3대 조상이었던 증조 할아버지 보아스와 증조 할머니 룻이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고엘 제도를 더 넓게 적용하여 과부이자 홀로 남게 된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남편 말론의 땅을 사 주었다. 다시 말해 과분한 친절, 넘치는 친절을 그녀에게 베푼 것이다. 그리고 룻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찾아서 자기의 고국과 부모와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기꺼이 넘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과부의 신세였고 더욱이 그녀가 봉양할 홀로된 시어머니(나오미)가 있었다. 그랬다. 그녀는 평생을 시어머니를 봉양하고자 고향 산천을 두고 남의 나라로 넘어온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보셨다. 또 하나는 다윗의 4대 조상이었던 고조 할아버지 살몬과 고조 할머니 라합이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이 첫 번째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을 앞두고 있었을 때에 일어났다. 살몬이 가나안 땅의 두 명의 정탐꾼으로 발탁되어 파송된 것이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여리고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쫓김을 받고 있었다. 그때 기생 라합이 그 두 사람을 자기의 목숨을 걸고 지켜 준다. 그래서 결국 살몬은 기생 라합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조상들 중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선택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마땅이 죽어야 할 사람이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윗이 그동안 계속해서 신본적인 삶을 살았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드리고픈 마음을 가졌다는 것에서도 조금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다윗이 직접 한 일이라기보다는, 다윗의 조상들이 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서 다윗에게 허락된 은혜라고 할 수 있다.
6. 다윗이 죽지 않은 두 번째 세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이어서 다윗이 죽지 않고 왕위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세 번째 이유를 알아보자.
둘째, 다윗이 죽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다윗을 죽이지도 않고 그로부터 왕위를 빼앗지 않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윗에게만 주어진 특별하고도 개인적인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드리겠다고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비록 다윗이 피를 많이 흘려서 그 일에 대한 허락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다윗은 그것을 진정 원하였고 또 원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이 진정한 것이었음은 그가 일평생을 성전을 짓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 해 주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개인적인 약속을 해 주었다. 그것은 "네 수한히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것이다"(삼하7:12)는 말씀이었고, 그의 후손까지도 계속해서 왕위가 이어지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다(삼하7:13).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이 혹시 범죄할지라도 사울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것처럼 그들에게서 왕위를 빼앗지는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 것이 있었다(삼하7:14~16). 이것은 다윗이 잘 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약속하신 것이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이 범죄했어도 그를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 다윗이 죽지 않은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도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 함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생은 아담의 범죄와 함께 다 죄인이 되었다. 아담의 범죄에 씨의 형태로 다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아담의 범죄가 의도적인 범죄 곧 고의적인 범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담의 범죄는 하와를 사랑해서 저지른 범죄였고, 또한 하와도 역시 뱀의 꾀임으로 죄를 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일부러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로 결정하신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을 상쇄시킬 자를 보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더 이상 자비가 베풀어질 수는 없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이 잘못했을 때에도 그를 급히 죽이시지는 아니하시고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다윗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어 놓고도 죄를 죄로 인식하지 않고 있는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다. 그리고 그의 죄를 책망하셨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그로 알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울왕과는 반응이 달랐다. 사울왕은 그렇게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속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은 정말 달랐다. 나단 선지자가 자기에게 어떤 이야기를 꺼내어 들려주자 즉시 그것이 자기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즉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기가 탐욕 때문에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른 것을 인정하고 눈물로 통곡하면서 회개를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범할 수 있다. 넘어질 수 있으며 실수할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인정해 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심지어 아브라함도 그랬다. 그도 모든 것을 버린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왔지만 그도 여전히 사람이었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속였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채 아내의 말을 듣고 첩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례를 통해 그는 철저히 회개했다.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기쁘게 받으셨다. 이것은 다윗에게도 마찬가지다. 다윗도 아브라함도 약한 것이 있었다. 그는 성적인 측면에 있어서 약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탐욕의 죄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는 인간이면서 가장 탐낼 수 있는 왕권도 그렇게 탐하지 는 않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버린 왕이었지만 끝내 사울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 있었을 때에도 그는 기꺼이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아들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자에게서만큼은 약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남의 아내였으며 그것도 자신의 충성된 부하 장수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훔친 것이다. 그리고 부하 장수를 전장의 최전선에 보내 죽게 하였다. 참으로 비열하고도 나쁜 죄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왕위도 빼앗기지 않았으며 죽임당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수한이 차서 죽었으며, 그의 왕위도 역시 여전히 보존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조상들이 자기의 후손을 위해 한 일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잘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적인 약속을 받아 놓은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긍휼의 법칙 곧 회개할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지적하실 때에 금방 알아차리는 감각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사울왕은 그것을 알려 주었어도 그것에 무감각했다. 알려 주었어도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과연 나의 후손을 위해 무엇을 심고 있는지를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에게 회개하라고 사인을 보내고 있는지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징계를 받아도 긍휼이 있는 징계를 받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2022년 01월 21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