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가족이나 교회의 식구들 가운데 장례가 발생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우상숭배행위라고 알게 되었으니, 아예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단절해 버리는 것만이 상책인가?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가, 혹시 장례가 났을 때에 장례예배를 드릴 것인지 안 드릴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는 교회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교회의 방침이 장례예배는 죽은 자를 위해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산 자를 위로하는 예배이기 때문에 드려도 괜찮다고 하면서 예배를 강행할 경우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고 또한 참석하지 아니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당사자가 교회의 구역장이나 장로들 같이 중직자의 경우라면 더욱 고민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당회가 있는 담임목사의 경우에는 쉽게 예배 방침을 바꿀 수도 없고, 부목사의 경우에는 담임목사의 목회방침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옳는가? 여기, 그 해결에 도움이 될 몇 가지 조언들이 있다.
1. 들어가며
가족이나 친척 중에 혹은 성도의 가정에 장례가 났다고 치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례예배에 참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죽은 자를 위하여, 죽은 자 때문에 드리는 예배는 유사 우상숭배행위이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씀드려야 하는가? 현재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교회는 사람이 죽으면 즉시 장례예배를 드린다. 임종예배,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화장)예배 등 적어도 4번 이상은 예배를 드리며, 또한 유가족들을 위해 위로예배를 몇 차례 더 드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죽은 자에게는 부정이 임한 것이므로 조문도 가지 말아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장례가 났을 때의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데가 많지 않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자기의 가족이나 교회의 성도들 중에 장례가 났을 때에 실제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2. 내가 섬기는 교회는 장례예배를 드리는 교회인가 드리지 않는 교회인가?
한국교회는 언제부터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생각보다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제가 속해 있는 장로교에서는 1970년대말에 예식서에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들어갔다. 그러나 감리교 총회에서는 벌써 1934년에 "교리와 장정"의 책 속에 부모기일 추도예배 순서가 들어가 가 되었다. 감리교단에서 추도예배가 권장되기에 이르자, 이 영향을 받은 구세군과 성결교단도 1950년에 이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오늘날 대한민국의 거의 대부분의 교단에서는 다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수용하여 예배드리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에서는 추도예배나 장례예배가 없었는데, 나중에 교회가 그것을 수용하게 되어, 지금의 교회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그러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일까?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목회자가 집례를 하니까 그냥 따라서 장례예배를 드리고 또한 추도예배도 드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예배에 해당하며, 더 나아가서는 성경의 진리에 부합한 예배인지에 대해서는 묻고 행하는 이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례가 나면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장례가 나면 당일에 시체를 파묻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의 시체는 부정하다고 율법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장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는 조상 대대로 부모공경에 남다른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사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귀신의 해코지를 무서워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사실 선교사들에 의해 성경이 보급되기 전까지, 한국인들에게 귀신은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냥 무당들이 말을 하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보면, 다 귀신이 죽은 조상의 흉내를 내고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기 위해 만들어낸 교묘한 술책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성경이 보급되면서 그리고 선교사들에 의해 조상제사는 귀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라고해서 금지되었다. 그렇지만 대대로 조상제사를 드려왔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었어도 조상제사를 단숨에 끊어내지는 못했다. 잘못 했다가는 불효자식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도 있었고, 조상도 몰라보는 파렴치한 후손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추도예식"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1897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궁궐에서 물품을 관장하는 정3품의 높은 벼슬을 가진던 정동감리교회 이무영 성도가 모친 기일을 맞아 추도예배를 고안해 낸 것이다. 어머니 제사를 안 드리자니, 불효자식이라는 말을 듣겠고, 드리자니 우상숭배행위를 금하는 상황에서, 이무영성도는 둘 다를 절충한 기독교식 추도예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핍박을 교묘히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다가왔고, 예수님을 믿는데도 자손들이 온갖 불치병과 저주와 가난에 시달리는 원인으로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계2:23~24).
그렇다면 현재 한국교회들 중에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유사 우상숭배 행위로 규정하고 이러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는 교회는 얼마나 될까? 정확히 조사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는 알 수는 없지만, 통합측의 경우 0.4%정도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그나마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완전한 우상숭배행위로 보고 금하고 있는 윤석전목사가 소속되어 있는 침례교단 소속의 교회들 중이 상당한 교회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는 것 같다.
3.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라면?
그렇다면,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때에도 추도예배나 장례예배가 유사 우상숭배행위라고 생각지 아니하면서,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예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물론 그것은 영적으로 심각한 우상숭배 행위에 해당됨으로, 자신과 후손에게 치명적으로 결과를 가져다 주는 요인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첫째로, 자신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엄연한 우상숭배행위라고 믿는 성도의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런데 자기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는 지금 그것이 우상숭배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교회의 방침으로는 장례예배가 우상숭배행위가 전혀 아니라고 보는 가운데, 자기 가족이나 구역식구나 교회식구가 상을 당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때에 과연 나는 장례예배에 참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장례예배에 참석하지 말아야 하는가? 사실 오늘날 자신이 교회의 중직자가이거나 구역장이라면 교회식구들의 한 명이나 그의 가족이 사망했을 경우, 교역자가 인도하는 장례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속으로 그것을 우상숭배행위로 알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로 참석하지 않는 것도 한 두 번이다. 언젠가는 자신의 신앙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우상숭배행위로 보느냐 마느냐는 오늘날 대한민국교회의 경우 신앙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안 가자니 교회의 방침을 어긴 것 같고, 가자니 우상숭배행위에 동참하는 것이 되어버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은 그것을 우상숭배행위로보니 절대 갈 수 없다고 선포하면 되는 것인가? 우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복음을 전하러 파송하실 때에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자. 그때에 주님은 "뱀처럼 지혜롭로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마10: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왜 그들에게 "뱀처럼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말씀하셨을까? 사도바울의 말에 의하면,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도 했다. 우리가 어떤 신앙행위에 대해 잘못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표현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가 정한 방침을 따라가야 한다. 무턱대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다가는 그것 때문에 자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99,6%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믿고 있는데, 거기에다 대고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는 우상숭배 행위입니다"라고 말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평신도로서 장례가 났을 때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무턱대고 목사님을 찾아가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는 우상숭배행위이니, 저는 이제부터 더이상 장례예배에 참석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전포고하듯이 말해버리면 속이 후련하겠는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가치판단기준이 나름대로 서 있어서 그것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상대방이 인지할 수 있도록 시간적인 안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본인도 그것이 정말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고 조사해고 알아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내 주장이 옳으니 나는 내 뜻대로 행하겠소"라고 과단성있게 말하기보다는 좀 더 생각해보고, 조심스럽게 그 문제를 꺼내보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뱀처럼 지혜롭게 행동하라는 주님의 명령의 본 뜻은 아니었을까?
이제는 둘째로, 이제 막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우상숭배행위로 믿게 된 교역자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만약 교회를 개척했던 담임목사의 경우라면 그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차근차근 그 이유를 설명하고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안 드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회가 있는 당회장 목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만약 당회원 중의 한 명이라도 그것을 거부하거나 반대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장로가 노회에 그 문제를 제소한다고 치자, 시시비비를 떠나서 그 문제는 상당히 시끄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잘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앙금은 쉬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가 부목사였다고 치자. 부목사는 담임목사를 섬기라는 직책이기에, 부목사가 장례예배가 우상숭배행위라고 믿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부목사라도 교회의 방침을 따라가야 할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에는 이제 양심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분명 우상숭배행위임이 분명한데, 부목사로서 그러한 예배를 드리지 아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때에 우리는 나아만장군의 경우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람나라의 나아만 장군이 북이스라엘에 가서 엘리사로부터 문둥병을 치유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그는 여호와만을 자신의 하나님의 섬기기로 결단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주군인 아람나라 왕이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림몬신에게 절을 할 때에, 그때 왕을 부축하는 나아만 장군도 림몬 신 앞에서 허리를 굽혀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나아만은 그 문제를 엘리사에게 아뢴다. 그러면서 나아만 장군은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왕하5:18)"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엘리사는 나아만의 청을 듣고는 더이상 그에게 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나 허용은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목사의 경우, 만약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의 방침이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예배로 인정하는 교회라면 임명받은 그 해까지는 그대로 교회의 방침을 따라야 할 것이다(물론 회개도 같이 해야 할 일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해를 넘기기 전에 그는 결단해야 한다. 하나는 당회장목사님을 설득하여서 교회가 장례가 발생했을 때에, 성도가 예배를 드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결의를 하면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장례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교회가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릴 자는 드리고, 반대로 드리지 않을 자는 드리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주어진다는 측면에서는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방침을 바꿀 수 없는 경우라면, 부목사는 교회의 방침에 따르든지 아니면 자신의 직임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교회를 사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나서는 교회를 개척해야 할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지 않고서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용은 평신도로서 구역장이나 장로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교회에서 계속해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방침에 순종하지 않는 구역장이나 장로들은 그 직임을 아마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구역장이나 중직자는 교회의 방침을 가장 앞장서서 순종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성도들 중에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우상숭배행위로 알고 그것을 거절하고 있는데, 목회자가 그 성도에 대해서 이상한 사람 취급하거나 그와 상종하지 말라고 교회에 광고하거나, 그가 이단에 물들었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끝까지 그 교회에 남아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우상숭배라는 것을 모든 성도들로 알게 하고, 그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하고자 하는 사명이 있다면, 그는 그 교회에 계속 남아서 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마치 두아디라교회에 남아 있으나 거짓 선지자 이세벨에 물들지 않고 올곧은 신앙을 계속해나가는 몇몇 사람의 경우에 해당한다. 또한 사데교회의 경우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성도로서 그 교회를 끝까지 진리로 수호하겠다는 결의가 있으면 그교회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신앙에 따라 결정할 일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이러한 성도들을 계속해서 이단시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경우에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교회를 떠나는 것이 그 교회의 목회자에게나 자신에게나 더 낫지 않겠나 싶다.
4. 추도예배나 장례예배가 우상숭배행위라고 믿는 성도는 장례식장에 아예 가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추도예배나 장례예배가 우상숭배행위라고 믿는 성도는 결코 장례식장에 가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다. 자기의 가족이나 구역식구의 가족이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에도 찾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 가족의 식구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경우에는 가서 조문은 해도 될 것이다. 다만, 조문을 하기는 하되, 영정 사진을 두고 거기에 절을 하거나 그 앞에서 묵념을 하거나, 국화꽃을 바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을 하거나 묵념을 하거나 국화꽃을 바치는 행위는 사실 과거에는 죽은 자에게 향을 피우는 일 대신에 행하는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실 언제부턴가 향을 피우는 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국화꽃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장례가 나면 왜 상당한 가족들은 검정색의 옷을 착용하고, 국화꽃을 바치게 하는가? 이것이 어디에 나온 전통인가? 이것은 결코 우리나라의 전통방식은 아니다. 우리나라 정통방식은 삼베옷을 입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 손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발에 집신을 신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많이 불편하고 힘들기에 간편식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도 영락없이 일본식으로 바뀐 것이다.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검은색 상복을 입고 국화꽃을 바치기 때문이다. 그것을 여러 상조회들이 받아들여 지금 우리나라 장례식장에서도 검정색 상복을 입고 국화꽃을 대령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고보면 이것은 외래문화인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들어가보면, 조상제사도 하나의 외래문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일도 사실은 알고보면, 반만년의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채 500년도 안 된 짧은 역사를 지녔기 때문이다. 즉 조상제사는 조선의 왕이 중국으로부터 조상제사도를 받아들여 종묘사직제사를 드리면서부터였다. 그때가 바로 조선 정종 때(A.D.1398~1400)였다. 한편, 우리나라의 평민들도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된 때에는 조선후기 정도였으니, 짧아도 매우 짧은 역사요, 그것도 중국 송나라 주희(A.D.1130~1200)에게서 들여온 외래문화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가족이나 교회의 식구의 가족이 상을 당하면, 가서 위로해주라. 하지만 결코 우상숭배행위를 하지 말라. 죽은 자에게 절하거나 꽃을 바치지 말라. 다만 상주에게 절하는 정도까지는 괜찮다. 왜냐하면 상주가 귀신들린 경우가 아니라면 그 사람에게 절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상숭배행위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절할 때에 살아있는 상주 뒤에서 귀신이 와서 절을 받아먹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귀신들이 즉시 시체를 곧바로 접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귀신들은 사람의 몸을 자기의 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마12:43~45). 하지만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 사람도 하나의 인격체이니까 귀신이라도 결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가 죄를 지었을 때에만 합법적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주에게 절을 하는 것은 허용이 된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물론 상주에게 절을 하지 않고 손만 잡아주어도 된다. 그리고 위로의 말 한 마디를 건넨다.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길 빕니다"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장례식장이라면, 식사하는 장소로 이동한 다음, 유가족들 중에 자기교회 식구와 관련된 유가족들을 불러다놓고 장례식에 귀신이 틈타지 못하도록 그리고 유가족들이 다투지 않고 장례절차를 마치도록 그리고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해주면 된다. 이때 기도만 하는 것은 예배의 행위라고 보지 않는데, 이는 요한계시록에 천상의 예배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예배의 순서가 찬송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찬송하고 기도하면 그것이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찬송하는 일을 하지 말라. 다만 기도만 해주라. 그래서 장례식장의 식구들이 귀신들이 오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5. 본인의 가족에게 장례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는 자기 가족 식구들 중에 돌아가셨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우리 주님께서는 가족의 상을 당했을 경우라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 죽은 자들로 자기의 (육이)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였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여 아직도 살아 있으되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 자를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죽은 자는 그의 영혼이 천국 혹 지옥에 가고 없는데, 거기에다 대고 우리가 빌어본다고 한들, 지옥에 떨어진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옥에 떨어진 자가 다시 살아나서 천국에 들어갈 리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식구들 중에 장례가 났다고 할지라도, 첫째, 목회자를 불러 예배를 드리도록 요청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만 교회에 그와같은 사실을 알려 조문을 할 수 있도록만 하면 된다. 둘째, 장례절차는 교회 목사님께서 오셔서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화장예배) 등을 주관할 것이 아니므로, 그냥 상조회에 맡겨두 상조회에서 다 알아서 해 준다. 주님께서도 "영이 죽은 자들로 육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했으니, 상조회를 직업으로 알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간소하게 입관을 하게 하고, 발인하게 하면 된다. 그것을 두고서, 어떻게 해야 바르게 행하는 장례절차인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셋째, 장례절차가 완전히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목사님께 부탁드려 (장례식장이 아니라) 가정예배를 부탁하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위로예배다. 왜 그런가? 구약시대의 경우 죽은 시체를 만지면 일주일동안 부정하고, 그 공간 안에 들어가 있어도 일주일동안 부정하다고 했기 때문이다(민19:11,14).
6. 나오며
자기 가족이나 교회식구 가운데 장례가 나면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다. 구약시대에는 누구든지 시체를 만지거나 시체가 있는 장막 안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일주일동안 부정하게 되고 정결케 하는 의식을 준행하지 아니한 상태로 성막(성전)에 들어가면 죽임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만 제사장이라도 자기 가족이 죽었을 때에는 시체를 만지고 장막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다. 하지만 대제사장은 그것도 안 되었다. 그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망이 있는 것과 거룩한 장소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무영 성도의 모친기일제사 대신에 드린 모친기일추도예배 때문에 오늘날에 거의 모든 교회가 죽은 자를 위한 제사나 장례식 대신에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믿는 성도가 되었어도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사건사고가 떠나지 않고 있는 줄을 거의 대부분 모른다(계2:22~23). 아니다.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는 분명히 변형된 우상숭배행위에 해당한다. 그것을 행하면 귀신이 와서 그 예배를 받고 경배를 받고 기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무 짜르듯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단절하여서 가족간에 성도와 목회자간의 의를 상하게 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예수님도 뱀처럼 지혜롭게 행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비둘기처럼 순결을 지킬 수 있야 한다. 둘 다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가 필요한 때다. 오늘 전한 말씀이 그러한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래 본다.
2019년 08월 18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