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그것 가운데서 사도요한은 7개가지만 골라서 요한복음에 기록해두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 7가지 기적들이 모두 하나같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주는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6번째 기적인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치유도 그것들 가운데 하나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기적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사실 창세로부터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자가 눈을 뜨게 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당시 예수님께서 그 기적을 행하셨다. 그리고는 이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세상의 빛이로다(요9:5). 내가 심팜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9:39)" 사실 예수께서 초막절이 지난 후에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이유는 한 가지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둠 가운데 행하던 사람들에게 빛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시는 분임을 믿고 알게 하시려 함이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그 사람은 수십년간을 그렇게 어둠 가운데 살았었다. 하지만 빛이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 그는 눈을 뜨게 되어 보게 되었다. 특히 예수님께서 그로 하여금 다른 곳이 아니라 실로암 못가에 가서 자신의 눈을 씻도록 명령하신 것에도 다 뜻이 들어 있었다. 즉 예수님께서서 탄생하기 200년전부터 초막절 일주일기간동안 매일 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새벽미명이 되면 제사장들이 황금주전자를 가지고 실로암 못가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서쪽의 굴뚝에 붓는 의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밤이 오면 온 성전이 훤할 정도를 등불을 밝혀 놓았다. 이것은 겔48장의 예언처럼, 물이 성전 문지방에서 나와 강을 이루어 아라바바다까지 흐르는데 그 물이 가는 곳마다 바닷물을 살리고 그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로 가득하게 한 것처럼, 예수께서 바로 그 생명의 물로서 사람을 살리는 분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막과 성전의 기름등불처럼 주님 안에 있으면 항상 어둠에 다니지 아니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 사건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은 과거를 묻지 아니하신채 현재의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란느 사실이다. 그분은 질병과 고통과 가난의 원인을 묻지 아니하신다. 단지 그것들 가운데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 바로 그주님은 그러한 분이시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이유가 그의 부모의 죄인지 아니면 그 사람 자신의 죄인지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답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 사람의 죄도 아니다. 단지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주님께서는 인간의 불행을 그 사람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지적하지 아니하신다. 오히려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고통과 아픔에서 그를 건져주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사실 과거를 캐묻지 아니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정죄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려주시고 고쳐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불행마저 오히려 복이 되게하려고 오셨다. 어둠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해주기를 기뻐하신다.
또한 우리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9장에서 고침받은 소경의 믿음과 신앙고백을 눈여겨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자신을 고쳐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증거하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신 그분이야말로 선지자요,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며, 죄인이 아니라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라고 과감히 증언한다. 그 고백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초래될 엄청난 어려움이나 역경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그것으로 인하여 그가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했지만, 그는 하나님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심방받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믿는 성도들이여,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혹은 주님 때문에 환난이나 고난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오히려 영광스러움임을 생각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직접적인 방문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주님을 죄인으로 낙인찍으려 한다. 우선 자신의 귀부터 닫아버린다. 그리고 인간의 불행을 볼 때에는 그 사람을 정죄하기에 바쁘다. 또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아니한다. 오히려 트집을 잡아 넘어뜨리기에 바쁘다. 왜 그러는 것일까? 악인은 진리를 보면 그 진리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악을 행하려 하는 마귀의 속성을 따라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이여,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면 숨기지 말라. 회개하라. 주님이 내민 손길을 붙들라. 악을 도모하지 말라. 그것이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