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稱義)와 구원은 서로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서로 다르다. 칭의와 구원을 들여다보면 공통분모를 차지하는 것들이 있기는 하다. 그것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어지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칭의만으로는 사람이 100% 구원을 받지는 못한다. 칭의를 받은 자들 중에서도 구원에서 떨어지는 자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구원안에 포함된 것이다. 하지만 칭의가 곧 구원은 아니다.
1980~90년대만해도 칭의가 곧 구원인 줄 아는 때가가 있었다. 한 번 칭의를 받게 되면 곧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믿는 자는 무조건 다 칭의를 얻고 그것이 곧 구원이다고 가르쳤다. 심지어 그것을 믿지 못하는 자에게는 성경구절을 들이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래 아니면 네 자신의 생각을 믿을래?"하면서 다그쳤다. 하지만 그때 인용했던 성경구절들은 원문을 정확히 번역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많이 흘렀다. 이제는 성경을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어플만 스마트폰에 설치하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을 곧바로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한글성경의 자구만을 들이대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자, 그렇다면 과연 아브라함은 한 번의 칭의(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칭의를 받은 후로도 넘어져서 다시 회복해야 했는지를 살펴보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이 받았던 칭의는 그가 곧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아니다. 칭의는 사람이 의롭다고 칭함받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것을 인간이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에게 부여하시는 은총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칭의를 받은 이유는 그의 행위에 있지 않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들(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대속이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에게 전가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칭의가 주어지고 재확인되고 확정되기까지는 세 차례의 분수령이 있었다. 하나는 그의 나이 85세 때에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되었고 또 한 번은 99세 때에 재확인되었으며, 마지막으로는 그의 나이 125세 내지는 137세 때에 확정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았던 때는 그의 나이 85세되던 해였다. 이때는 아브라함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앞이 전혀 보이지 않던 시기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의 선포로 인해 아브라함은 믿음 위에 서게 된다. 자, 그렇다면 대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칭의는 언제 주어졌을까? 그리고 언제 다시 확인되었으며, 마지막으로는 언제 확정지어졌던 것인지를 알아보자.
아브라함은 창12장에 비로소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는 다윗보다 약 500년정도 앞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다(B.C.2091년경). 당시 아브라함은 우상을 제조해서 팔던 아버지 데라의 집에 거하고 있었따. 그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것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창12:1).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군말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선택하고 기꺼이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만을 믿고 따르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해 주신다. 그것은 바로 그와 그의 후손을 많게 해 주고 그들에게도 거할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당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당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니 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긴 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항상 후손이 걸렸다. 그리고 언제 그 땅을 받을 것인가에도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었다다. 그러던 후에 금방 3년이 지나가버렸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신이 갈대우르를 떠나올 때부터 함께 했던 조카 롯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서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려고 계획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시로 조카 롯을 떠나보내게 한다. 그후 또다시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여전히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다메섹사람 엘리에셀을 자신의 양자로 삼겠다고 하나님게 말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그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창15:4)"라고 대답해주셨다. 그때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끌어내시더니, 캄캄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을 세어보게 하셨다. 그리고는 말씀하기를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게 될 것이다"고 하셨다. 그러면 보통 사람이라면 피식 웃으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 기분좋게 들으라고 하시는 이야기죠?"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달랐다. 오히려 하나님게서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가진 그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그에게 의로 간주하셨다(창15:6). 이것이 바로 그가 85세에 받았던 최초의 칭의였다. 그 시점은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나온지 10년이 되던 해였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태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아내 사라가 안달이 났는지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그것은 꼭 자신의 몸을 통하지 않더라도 아브라함의 후사를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몸종 하갈을 들여보내어 자식을 얻어보자는 제안이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선뜻 내키지는 않는 제안이었지만 더 늙어가기 전에 자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아내 사라의 제안을 받아이게 된다. 그리하여 그 다음해, 아브라함의 나이 86세 때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뒤로 아들은 태어나서 기쁜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나주시지 아니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1~2년이 아니라 무려 13년동안이나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방문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첫 마디가 "이제는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다시 시작해보자는 차원에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고 하셨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가 이전에 육신을 따라 행했던 습관을 죽음에 넘기는 의식을 할례를 시행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그날 그시에 자신과 자신의 아들 이스마엘과 종들을 다 불러다가 할례를 행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나이 85세 때 받았던 칭의를 14년 뒤인 99세 때에 회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할례란 14년전에 이미 그가 받았던 칭의의 회복하는 인침인 것이다.
그후에 아브라함은 정말 어떻게 달라지게 되었을까? 아브라함은 그 다음 해에 정말론 자신의 아내 사라로부터 아들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항상 이스마엘에 대한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음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금새 흘러갔다. 벌써 그의 아들이 자라서 25세 내지는 37세가 되었을 무렵이다. 하나님께서 또다시 그를 찾아오셨다. 그리고는 그에게 명령하셨다.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내가 지시한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렴(창22:2)" 하지만 3일길이나 걸어가는 길을 가면서도 아브라함은 전혀 믿음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이제는 100세에 얻은 아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죽은 자도 살려내실 분이며, 없는 것도 있게 만드실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롬4:17~18). 이윽고 아브라함은 칼을 들고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급히 찾으셨다. 그리고 그의 아들 독자 이삭에게 아무짓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셨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시면서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셨다. 그가 85세 때 받았던 칭의가 40년 내지는 52년만에 완전히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행함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85세 때에 받았던 칭의가 이제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초지일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졌던 자는 결코 아니었다. 믿음이 있었던 그였지만 그도 중간에 넘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할례를 통해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곧바로 할례를 행함으로 옛 자아를 죽음에 넘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그가 얼마나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랬다. 그도 칭의를 받은 자였지만, 중간에 넘어졌던 경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회개를 통해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뒤로 다시는 넘어지지 아니했다. 그러자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이 다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어주실 놀라운 은혜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가 의롭지 못해도 우리를 의롭게 해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칭의를 얻었다고 그 순간부터 온전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아브라함처럼 육체대로 행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인생에 한 두 번 쯤은 큰 어려움에 직면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느가? 즉시 회개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내가 과연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의롭지 않아도 다시 의롭다고 해주실 하나님을 또다시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옛사람을 더욱 더 죽음에 넘겨야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다. 인간의 구원은 칭의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중간에 넘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반드시 회개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다음에는 더이상 옛사람의 습관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칭의를 받아 구원의 여정에 들어선 자들이다. 하지만 날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내 자신이 과연 최종적인 구원을 향하여 바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믿음과 회개로 받은지, 결코 믿음과 행위로 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진정 믿음으로 산다면 우리의 삶에는 행위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행위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행위의 열매는 단지 우리가 최종적으로 얻을 구원을 향해 바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증표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모름지기 믿음과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해서는 절대 아니 된다. 우리가 받는 구원은 결국 믿음과 회개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공생애의 첫 외침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