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과연 사울을 바울로 만들었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사울이 바울이 된 데에는 오직 하나님뿐이었을까? 아니다. 거기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신구약성경을 통틀어서 가장 역사적인 장면을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도 사도행전9장의 사울의 회심장면일 것이다. 사실 구약시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하신 사건은 아주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께서 직접 현현하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는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사울만큼 중요한 인물이 나오기가 쉽지 않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자유의지를 가진 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로버트처럼 조종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대체 어떻게 해서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하나님의 뜻과 반대의 길을 가는 사울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사울은 대체 어떻게 되어서 자신의 남은 모든 인생을 주님에게 걸었던 것일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울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의 앞잡이노릇을 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탄은 그를 순순히 내어줄 리가 있었겠는가!
사울(그는 나중에 신약성경을 13권이나 기록하고 소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한 사도바울이 된다), 그는 다소출신의 사람이었다. '다소'라는 도시는 길리기아의 수도다. 당시 인구 50만명의 상당히 큰 도시였다. 사울은 거기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그가 살던 지역은 장막만드는 도시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장막(텐트)만드는 일을 배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가문은 유대인의 가문이었기에 그는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매 안식일을 지키며, 회당예배를 드리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때부턴가 예루살렘 유학길에 올랐는데, 그는 꽤 유명한 랍비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를 가르친 선생님은 당시 유대인 최고의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이었다. 결국 사울은 율법의 전문가인 바리새인으로 길러졌고 유대최고의 랍비교육을 받고 자란 것이다. 이처럼 그의 배경을 보면 화려하기 그리없다. 다만 그가 말하는 데는 조금 부족한 듯 했으며 얼굴도 그리 잘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당시 랍비후보생들 가운데 가장 유망주였다. 특히 그에게 있어서 언어능력은 탁월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헬라어에 능통하였고 또한 히브리어와 아람어에도 능한 자였으며, 로마어인 라틴어도 사용할 줄 알았다.
▲ 바르톨로메오 몬타냐가 그린 성 바울의 모습. ⓒ업코리아 |
그런데 딱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유대교가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하나님께서는 유대교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유대교를 철폐해 버리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새 창조의 역사를 쓰시고 있었다. 하지만 사울은 낡고 병든 유대교의 최전방에 서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잔존세력들을 없애버리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요 출세길이라고 여겼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지만 사두개인의 우두머리였던 대제사장에게 찾아가, 핍박으로 멀리 도망친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옥에 넘길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했고 그러한 공문까지 받아냈다. 이제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대제사장으로부터 체포영장을 휘둘를 권한까지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만한 학식에, 그만한 배경에, 그만한 권한을 지닌 자는 당시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다메섹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얼마나 신났을 것인지를 한 번 상상해보라.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그에게 몇 마디의 말을 던졌다. 그런데 그가, 다시 말해 유대교의 앞장이요 사탄의 앞잡이였던 그가 그만 그 순간 완전히 고뇌에 빠지게 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사렛예수께서 그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이 음성은 과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렀을 때와 똑같은 것이었다. 모세 때에는 타지않는 가시떨기 가운데서 천사의 음성이 들려왔다면(출3:4), 지금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강렬한 빛이 비친 후에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나님같은 음성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처음에 그는 그 음성이 누군지를 몰랐으나, 적어도 하나님 내지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지금 자기를 부르고 계신 분은 적어도 그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어떤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되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주여!" 이것은 헬라어원문을 직역한 것이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결국 이 한 마디는 사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그는 죽은 줄로 알았던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곳에서 만났던 것이다. 그는 눈이 멀어갈 때에 빛으로 그에게 나타난 주님을 보았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자기가 그동안 그렇게 핍박하고 있었던 성도들이 곧 주 예수님과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만 보고 살아왔던 그의 눈이 감기면서 그는 새로이 영의 눈이 떠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세상만 바라보고 살았을 때에 그는 오로지 자기자신의 영달과 명예와 성공만을 위해 달려온 자였다. 그는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고 있었고, 예수믿는 자들을 잔인하게 핍박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성공시켜 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그 일을 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그런데 죽은 줄로 알았던 예수님이 자신 앞에 나타났고, 똑똑한 음성으로 자신을 부르시며,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말씀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분은 정말 예수믿는 사람들을 자기와 한 몸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사울은 자기가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서고 있을 때, 곧 그는 스데반을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댔던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 놀랐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다메섹 도성 안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은 까닭에주변의 사람들에게 붙들려 성 안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간신히 들어갔다. 그리고 3일간 식음을 전폐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자기가 경험한 일들이 왜 일어났으며, 왜 하나님께서는 벌레만도 못한 자신을 찾아오셨는지, 그리고 자신을 거기로부터 불러내었는지를 말이다.
그때 다메섹도성 안에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자타가 인정해줄만한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였다. 그는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일어나 곧은 길이라고 불리우는 거리가 가서, 유다의 집 안에 머물고 있는 다소출신의 사람 사울이라 이름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는 지금 기도중에 있느니라. "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안수하여 그의 눈을 뜨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왜 예수께서 사울을 그 자리에서 불러내었는지를 알려주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동안 사울이 해 온 행적을 잘 알고 있었던 아나니아는 그가 얼마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해를 끼쳤는지를 주님께 말씀드린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사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일러주신다.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또한 그는 나로 인하여 엄청난 고난도 함께 받게 될 것이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를 찾아가 그대로 했다. 그 즈음에 금식하면서 기도하던 사울에게도 아나니아가 들어와서 자신을 안수하고 고쳐주는 환상을 보게 된다. 진짜 아나니아가 들어왔고 자신에게 안수했다. 안수를 받은 사울은 즉시 그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겨지게 된다. 그러더니 다시 눈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그러자 사울은 기다렸다듯이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에 그리스도인이 된다.
▲ 미켈란젤로가 그린 "사울의 개종" 1542-45, 625x661cm, 프레스코 벽화, 바티칸, 성 바오로성당. ⓒ업코리아 |
우리는 여기서 사탄의 종이었던 사울이 대체 어떻게 되어서 하나님의 사역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마음대로 사람을 이랬자 저랬다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사람도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전능자인 하나님이시라도 인간이 거부한다면 그를 강제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여 천국에 데려가실 것이다.
그렇다면 사울은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남은 일생을 바치게 되었을까? 그것은 순전히 스데반 때문이었다. 당시 스데반은 죄가 없이 죽임당한 순교자다. 그러므로 어쩌면 스데반을 잃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대단한 손해가 아닐 수 없다. 그처럼 성령충만하고 지혜로우며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었을까? 하지만 산헤드린공회에 잡혀간 그는 불법적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사형을 당해야 했다. 불법적인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때 아마 사탄도 함께 춤을 추었으리라. 이제는 주님을 믿고 따르면 어떻게 된다는 것에 대해 스데반을 통해 본 때를 보여주었으니, 더 이상 예수님을 전하겠다는 놈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웬 걸. 주님께서는 스데반을 내어준 대신 그 현장에 있었던 사울을 가져가신 것이다. 물론 사울이 스스로 주님의 뜻에 순복하지 않았더라면 그것도 아니 되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울은 달랐다. 다메섹도상에서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과 배경과 지식과 학벌과 혈통과 종교를 단숨에 버려버렸다. 그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오로지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살던 자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난 후, 그는 비로소 자신을 보게 되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라.
사람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사실 없다. 그러자 사울은 과거에 그가 자랑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값을 갚기 위해 이제는 자신 앞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하나님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기로 결단한다. 그것이 그간에 그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며 산 것에 대한 일종의 보속같은 것이었으리라. 특히 자신은 그 죄값으로 죽어마땅하며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사람인데, 주님께서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만나주시고 깨우쳐주시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그는 감사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사울은 그후 단 한 번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어떤 고난도 아프다고 떼 쓴 적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형벌의 만분지일도 안 된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아나니아로부터 받은 사명을 부여잡고 일평생 그 길을 달려가게 된다.
만약 그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박해하고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그가 이토록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너무나 잘못 빗나가고 있었다. 잘못된 열심이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그동안 너무나도 하나님의 뜻에 빗나간 삶을 살고 있었다. 주님을 만나보기 전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을 그는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은 그는 영안도 동시에 열리게 된다. 그의 육신의 눈만 떠진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만 열려있던 그의 눈이 이제는 하늘을 향해 열리게 된 것이다.
사람은 이처럼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것 때문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그리고 스데반과 같은 순교자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은 결코 나오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사울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바울을 우리가 결코 볼 수 없었으리라. 이 모든 일을 수행하신 하나님께 오직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죄를 우리 자신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많은 우리를 들어서 주님나라를 위해 살도록 기회를 주신 주님께 다시 한 번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