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칭의를 받았고 그것을 인침받았으며 완전히 인정받았을까? 미안하지만 아브라함은 단 번에 칭의를 얻은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전 인생을 통해 점차적으로 완전한 칭의를 얻어갔다. 그것을 나이로 계산해본다면, 그의 나이 85세 때와 99세 때와 125세 때이다. 대체 이때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 들어가며
아브라함의 칭의는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3차례에 걸쳐서 발전되고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이신칭의만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로마서를 가지고 아브라함의 칭의를 다 논할 수는 없다. 로마서는 이신칭의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논하려면 우리는 성경66권을 보아야 한다. 성경 66권이 말하고 있는 칭의에 대해 다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의 기자들을 통해 이것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다.
2. 3단계로 완성된 아브라함의 칭의
사실 아브라함의 칭의의 사건은 이미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칭의가 어떻게 발전되고 완성되었는지를 정확하게 보려면 우리는 신약성경의 저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이미 그 문제를 다 다뤄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칭의의 사건은 첫 시작이 있었고(창15장) 그리고 발전이 있었으며(창17장) 나중에 완성이 있었다(창22장)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3. 아브라함의 칭의의 시작(창15장) - 이신칭의
아브라함의 칭의의 시작은 창15장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신칭의를 얻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이때에 비로소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기 때문이다(창15:6). 그런데 이때가 언제였는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갈대아우르를 떠난지 약 10년정도 경과된 때다. 이신칭의를 얻는 것도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즉시 이신칭의가 반드시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나이가 85세정도 되었던 때에 아브라함에게도 칭의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어서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칭함받게 되었을까? 그것은 몇 번의 실패 이후에 얻은 것이다. 그가 처음 창12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2가지 약속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라 나선 것이다. 그것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며, 가나안일경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었다(창12:2,7).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때부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나올 때부터 이미 그의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기 때문이다. 아차하면 조카 롯을 자신의 후사로 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조카 롯과 헤어지게 하셨다. 결국 아브라함은 아들처럼 생각했던 조카 롯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러자 그의 후사는 점점 멀어 보이기만 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브라함은 이번에는 자기집에서 길리고 자란 다메섹사람 엘리에셀 종을 양자로 삼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에셀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후사는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올 자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를 밖으로 데리고 가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와같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 이것이 아브라함의 칭의의 시작이었다.
4. 아브라함의 칭의의 발전(17장) - 할례 곧 회개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로부터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자기의 후사를 얻기 위한 다른 작업에 착수했다. 조카 롯도 안 되고 다메섹 엘리에셀도 안 되자, 이번에는 자기 아내의 말을 못 이긴 척 하면서 첩 하갈을 맞이하여 후사를 얻어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일은 진행되었고 그리하여 아들 이스마엘이 그에게서 태어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아브라함의 곁을 찾아오지 않았다. 아브라함을 떠나신 것이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13년이 지났다. 이제 그의 나이가 99세가 되었다. 그러자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그렇다. 이때까지 아브라함은 전능한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 후사를 이으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온전하지 못했다. 아니 그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나타나시어 그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여 할례를 행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할례란 두 번 다시 자기자신의 생각이나 방법대로 행하지 않을 것임과 그후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할 것을 자기의 몸에 새기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할례는 단지 육체의 포피만을 잘라내는 의식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에 할례를 동시에 행하는 것이었다. 영적으로 보았을 때, 아브라함의 할례는 더 이상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는 본질적인 회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86세에서 99세까지 약 13년의 기간동안 무엇을 하며 보냈을까? 적어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할례를 행함으로 두 번 다시 육체의 본성에 따르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을 맹세했던 것이다.
5. 사도바울이 평가한 아브라함의 할례의 의미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다(롬4:11)" 그랬다. 그가 85세 때에 받았던 이신칭의는 좀 불안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인침을 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인침이란 도장을 찍는 행위로서 일종의 보증을 받는 것이다. 그랬다. 아브라함은 그날 비로소 할례를 행함으로써 자신의 이신칭의에 대해 하나님의 보증 곧 인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의 믿음이 비로소 하나님 앞에 효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찬찬히 들여다보라. 그의 할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를 말이다. 그가 받은 할례는 그가 그동안 행했던 자범죄에 대한 회개에 대한 결산임과 동시에 자신은 본질적으로 죄된 본성을 소유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본질적인 죄에 대한 회개표시였다. 그러므로 할례는 곧 회개인 것이다. 그렇다. 사람의 두번째 칭의는 이처럼 할례를 행함으로써 회개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음으로 난 의가 어느 정도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라는 것이 수반되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 사람이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는가? 그것은 자신의 믿음에다가 회개생활이 동반될 때인 것이다. 믿음만으로 구원을 보증받기는 어렵다. 사람은 죄를 짓기 때문이며,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자는결국 주님의 필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의 믿음이 허물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신칭의 이후에 지속적인 회개생활이 더 필요한 것이다. 회개도 낱낱의 자범죄를 회개하는 생활과 자신이 본질적으로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죄성에 대한 회개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할례를 받음으로 두번째 칭의를 얻게 되었다.
6. 아브라함의 칭의의 완성(22장) - 순종
이제 아브라함이 얻게 되었던 세번째 칭의에 대해 살펴보자.이때는 아브라함의 나이가 약 125세쯤 되었을 시기다(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 참고). 아브라함의 셋째칭의에 대한 언급은 야고보서에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두번째 칭의에 대해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했지만(롬4:11), 세번째 칭의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장로가 언급한 것이다(약2:21~23). 장로 야고보는 말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어찌 자신을 구원하겠느냐고 말이다(약2:14).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행하지 않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약2:17). 이때 재미있는 비유를 하나 이야기한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 믿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 믿은 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헛된 것이며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자신이 믿음이 있노라고 말은 하지만 행함이 뒤따르지 아니할 때에는 그의 믿음이 쓸모없는 것이라는 논리가 야고보의 논리다. 참으로 맞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언제 온전하게 되었을까? 야고보 장로는 분명하게 말한다. 그의 칭의가 완성된 것은 그가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라고 말이다(약2:21~23). 그랬다. 아브라함의 칭의는 창15장에서 시작되었다(다메섹 엘리에셀사건 직후). 그리고 그의 이신칭의는 창17장에 가서야 인침을 받게 된다(할례의 언약 때에). 그리고 그의 칭의는 창22장에 가서야 완성된다(이삭을 번제로 바칠 때에).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통해 아브라함의 회개를 받으셨지만, 그의 믿음을 최종적으로 승인하실 때에는 아들을 제단에 번제물로 바칠 때(창22장)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 자란 청년 이삭(25세 혹은 37세)을 제물로 번제로 바치라고 주문하신다. 이것이 바로 칭의에 대한 최종적인 시험이었던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미 지난 13년(86세~99세)간의 회개와 할례의식을 통해서 더 이상 자신의 생각과 관점으로 살아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이제 절대 순종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진실로 회개의 사람으로 변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저없이 이삭을 데리고 3일길을 걸어 모리아산으로 간다. 그리고 가차없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그랬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칭의에 대한 최종적인 승인을 받은 것이다.
7. 아브라함의 칭의의 여정과 오늘날 성도들의 구원의 여정의 상관관계
그렇다. 아브라함의 칭의의 과정은 3단계로 진행되어 완성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구원의 여정과도 거의 똑같다. 누구든지 믿음생활을 하다가 어느정도 후에 이제는 자신의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 이신칭의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인구원 여정의 첫출발에 해당한다. 이때부터 믿음생활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믿음은 사실 온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2차의 칭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할례 곧 세례로서(골2:11) 영적으로 보면 회개생활을 가리킨다. 사실 믿음만으로 천국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마4:17). 천국에 이르는 두 개의 관문은 믿음과 회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아울러 철저히 회개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믿음과 회개만 있으면 구원은 어느정도 보장이 된다. 하지만 구원의 완성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의 단계가 더 남아 있는 것이다. 곧 순종의 단계가 남아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통해 자신의 구원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칭의의 3단계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침으로써 자신의 믿음에 대한 최종적인 승인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생활도 구원에 이르려면 순종으로 표현되어야 마땅하다. 이런 삶이 바로 계명에 대한 순종인 것이다. 이를테면 십계명을 준수하는 것이다. 그렇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철저히 회개하는 삶을 산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믿음과 회개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지만 순종의 삶은 자신의 구원의 여정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준다. 믿음과 회개가 구원에 있어서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곧 행위는 그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인 셈이다.
8. 나오며
당신은 지금 당신의 믿음의 삶에 회개가 들어 있는가? 아니면 빠져 있는가? 당신이 만약 믿음만 가지고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당신의 구원은 요원한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러면 당신의 구원은 보다 더 가까운 것이다. 이제 우리의 삶을 뒤돌아볼 차례다. 우리에게 과연 용서가 있는가? 남을 위한 중보기도의 삶이 있는가?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아파하는가?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가? 혹 이러한 삶이 자신을 뒤따르지 않고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한참 멀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꼭 구원받을 것처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도 있다. 아니다. 회개없는 천국은 없다. 회개생활(창17장)은 믿음(창15장)과 더불어 구원의 필수다. 그리고 순종생활(창22장)이 뒤따르는 것이다. 회개도 되지 않은 자가 무슨 순종의 삶을 살겠는가? 만약 그런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 생색내기에 불과한 것임을 알라. 다 자기의 의를 쌓고 있는 것이다. 그런 행위는 가증스러운 것이다. 사람 앞에 잘 보이려고, 자기만족을 위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개 후에 순종하라. 그래야 그것이 진짜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