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죄를 짓는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할 때 내 죄가 용서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요일1:9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순간에 그것이 이루어지는가? 그런데 그때 자신의 죄가 용서되고 있는지 아니 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놀라운 비유의 말씀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죄용서에 관한 놀라운 비밀을 이제 살펴보자.
1. 들어가며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장차 주님 앞에 나가 심판을 받게 된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져 있지만 그후에 심판이 있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히9:27). 또한 주기도문에 의하면, 우리가 장차 심판 앞에 섰을 때에 우리가 지은 죄들을 용서받으려면 나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 모두를 다 용서해주어야 하는가? 혹 그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우리에게 용서를 요구하면 그 때에 용서해주어야 하는 것이지, 그가 회개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를 용서해주어야 한다 말인가? 그래서고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라면 누구든지다 용서해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회개하는 자만 용서해주어야 하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주기도문에 나타난 놀라운 죄용서의 법칙은 무엇인가?
주기도문에 보면 인간을 위한 3가지 간구 가운데 두번째 간구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도 역시 우리의 빚진 자들을 탕감했던 것처럼, [당신은]우리의 빚들을 탕감해주소서(마6:13)(원문직역)" 그러나 이 본문은 의역되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대부분 번역하 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의 평행본문에 따르면, 마태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빚(오페일레마타)"은 분명 "죄(하마르티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장차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우리의 지은 죄들을 용서받는 조건으로서 우리도 역시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과연 맞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성경주석가들이 이 말씀을 다르게 번역하거나 해석하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었으니 우리도 남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본문은 그러한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들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본문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이 말씀을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죄를 짓게 되더라도 회개하면 다 용서되는 줄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죄용서의 대원칙은 맞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할 때에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여 죄용서를 구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주기도문에 나오는, 인간의 필요에 관한 두번째 기도이기 때문이다(마6:12).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여서 그 말씀을 들었던 자들이 혹 말씀을 바꾸거나 곡해할까봐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에 이어서 "왜냐하면"이라는 이유접속사로서 부가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바로 마6:14~15의 말씀이다.
마6:14-15 [왜냐하면] [만약]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역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장차]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그런데] [만약]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장차]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렇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빌어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회개를 했어도 누가 끝내 죄용서를 받지 못하는가?
그럼, 어떤 사람이 죄용서를 받지 못받는가? 먼저, 어떤 자의 회개기도가 상달되는지부터 살펴보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첫째, 요일1:9에 말씀에 의하면,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형제는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자백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주기도문에 의하면, 사람이 자신이 죄를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주기도 가운데, 자신의 죄용서에 관한 청원이 있는데, 거기에는 "[그리고 당신은] 우리도 역시 우리에게 빚진(죄지은) 자들에게 탕감했던(용서했던) 것처럼, 우리의 빚진 것들(죄들)을 탕감해(용서해주) 주옵소서(마6:12,직역) "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둘째, 하나님으로부터 언젠가 심판을 받게 될 날이 올텐데, 그날에 자신이 지은 죄들을 다 용서받으려면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주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고 있을 때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경우를 다 알기 쉽게 표현한 예화가 하나 있다. 그것은 마18장에 나오는 "일만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다. 여기에 보면, 일만 달란트(6천만 데나리온=약30조원) 빚진 자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 그런데 그가 주인에게 잡혀왔다. 주인은 그에게 빚을 갚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갚을 것이 없었다. 그러자 주인은 그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자식들과 그리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으라고 했다. 그러자 종은 엎드려 절하면서 "당신은 내게 오래 참아주소서. 제가 모든 것들을 장차 갚을 것입니다."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를 놓아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주었다(정확히는 '내버려두었다'이다). 그런데 그 종이 밖에 나간 후에 자기에 백 데나리온(노동자의 100일치 삯=약500만원) 빚진 동관을 찾아내었다. 그리고는 그를 붙잡은 후에 목을 잡아 질식시키면서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동관도 자신과 똑같이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동관에게 허락하지 않고, 그가 빚을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던져넣었다. 그런데 그가 행한 일을 그의 동료종들이 보았다. 그리고 그의 주인에게 알렸다. 그러자 그 종의 주인이 그 종(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를 불러다가 이렇게 말했다. "악한 종아, 네가 간청했기에, 너에게 모든 빚을 내버려두었거늘, 나도 역시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역시 너도 네게 동료종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않느냐"하고는 크게 분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이상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내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지옥에 떨어질 큰 죄를 지은 자인데, 갚을 수 없는 은혜로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자라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주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의 당연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주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다. 고로 우리가 비록 이러한 상태에서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무리 빌어도 사실 그는 자신의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물론 우리가 회개할 때 내가 지었던 죄가 용서되고 있는지 아니 되는지는 눈으로 볼 수 없기에,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의 죄들이 용서되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작은 죄를 지은 자들을 용서해주고 있을 때다. 그럴 때에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지은 죄들이 그 순간 용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주기도의 간청에도 조건이 붙어있지 않으나, 죄용서를 비는 간청기도에는 조건이 하나 붙어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지은 죄들이 용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과연 내가 지은 죄들을 용서되고 있는 것일까?
4. 주님께서는 누구의 죄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는가?
주님께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께,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장차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입니까?" 그때 주님께서는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오히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해주기 위해 예수께서 들려주신 비유가 바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다. 고로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죄용서를 받은 자가 되었으며, 또한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할 때에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내게 죄지은 자들을 내가 용서하는 것이다.
5. 성경에 나타나 있는 죄용서의 대상에 관한 2가지 예는 무엇인가?
그런데 우리게 범죄한 자라도 그가 우리를 찾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자일 수도 있고, 끝까지 용서를 빌지 않는 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중에서 누구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하는가? 둘 다 인가? 아니면 죄용서를 비는 그 사람인가?
첫째 원칙은, 내게 죄를 범하는 자를 다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마18:21~22). 그 자가 내게 와서 죄용서를 빌든 빌지 않든 상관이 없다.
둘째 원칙은, 내게 와서 죄용서를 비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용서해주어야 한다(눅17:3~4). 우리는 이미 일만 달란트를 빚을 탕감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가복음에 조금 더 자세히 나와 있다.
눅17:3~4[직역]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고 있어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그를 엄히 꾸짖어라. 그리고 만약 그가 회개하거든 그를 단번에 용서하라. 그리고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그가 네게 죄를 짓고 그리고 그가 일곱번 네게 돌이킨다면 그리고 내가 회개합니라라고 말하고 있다면 너는 그를 장차 용서해줄 것이다(용서해주어야 한다).
셋째 원칙은, 혹 내게 나아와 자신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그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예는 예수님도 그렇게 실천했고, 초기 예루살렘교회의 스데반도 그렇게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랬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그때 십자가 앞에 있는 군중들을 향하여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을 단번에 용서하여 주옵소서. 왜나하면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행하는지 알지 못한 채 있기 때문입니다(눅23:34, 직역)" 그리고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신을 돌로 쳐죽이는 자들을 향하여,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두지 마옵소서" 기도했다.
그렇다면, 왜 내게 죄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라도 우리는 그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하는가? 그것은 위의 경우처럼, 주님께서 그렇게 실천하였고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실천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파송할 때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과 그 원리가 같기 때문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면서 전파하며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그리고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10:7,11~13)"
그렇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의 죄들을 용서해줄 때에, 그가 만약 회개를 한다면 그의 죄들이 용서되겠지만 만약 그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의 죄들의 용서를 빈 기도가 내게 돌아와 내가 지은 죄들을 용서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게 돌아오는 기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단 용서하는 기도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축복하는 말도 마찬가지요, 저주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지금 어떤 언어를 상대방에서 사용하고 있는가? 내가 사용하는 언어대로 사실은 내가 받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말해왔는가? 오늘부터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기도를 점검해볼 줄 알아야 한다.
6. 나오며
나에게 죄를 지은 자들은 누구라도 다 용서해주어야 하는가? 그렇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가 죄용서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죄를 용서받는 데에 영향을 미칠 것이요, 그가 죄용서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언 그 간구가 오히려 내게로 돌아와 내가 지은 죄들을 용서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용서의 비밀"이다. 그렇다. 무조건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이 회개한다고 해서 다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 나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고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하고 있지 않으면서 늘 회개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죄는 오늘도 용서되고 있지 않을 확률이 많다. 그는 지금 소용없는 회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는 회개기도를 해보자. 그것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사항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9월 8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