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는 왜 하게 되었고 또 해야만 하는 것일까? 율법의 조항에 십일조법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게 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응당 십일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십입조를 하면서 주의할 것도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십일조를 하는 자가 받게 된는 축복은 무엇인가? 주님은 오늘도 당신을 위해 일하는 자들을 위해 십일조를 내는 자들에게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아니하신다. 이 시간이 성경이 말해주는 십일조의 축복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십일조"라고 말하면, 우선 겁부터 먹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도리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가 십일조 같은 것을 만들어서, 내 생활도 빠듯한데 십일조를 내야 하느니 말아야 하느니 귀찮게 하는 것이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기부행위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선 이러한 심적인 부담을 줄이려면, 십일조도 일종의 헌금이 아니겠는가 하고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냥 헌금은 헌금인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을 만큼의 헌금으로서, 헌금의 표준을 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이제는 약간은 부담스러운 십일조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인지 그리고 십일조를 드릴 때에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십일조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에 받을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를 원한다. 이 메시지는 지난주 금요일(2020.01.17)에 전했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꼭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골2:16~23)_2020-01-17(금)"(https://dongtanms.kr/57461)의 후속편이다.그러므로 이 설교를 처음 듣는 분들은 그 영상과 말씀을 먼저 보기를 권해드린다.
2. 율법의 규례에서 십일조는 어디에 속하는가?
율법의 규례에서 십일조는 좀 특이한 항목에 해당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2가지 면에서 그렇다. 첫째, 율법에서 십일조 조항은 율법말씀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어떤 종류의 율법의 유형에 속한 것인지 정하기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율법은 크게 도덕법(십계명)과 의식법(음식법, 제사법, 절기법, 정결법)과 재판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십일조 규례는 그 어디에서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만약 그가 도덕법인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불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계21:8). 그러나 오늘날 예수믿는 그리스도인은 의식법을 지키지 않아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한 예표(모형, 그림자)이기 때문에, 실체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그것을 다 완성해버리신 후 폐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명태나 낙지, 고등어나 돼지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불못에 던져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의식법을 완성하심으로 폐지하셨기에, 어떤 음식이든지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먹으면 버릴 것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구약의 절기를 지키지 않는다고 형벌을 받지도 아니한다. 그렇다면, 십일조 규례는 도덕법에 속한 것인가 아니면 의식법에 속한 것인가? 둘 다가 아니다. 어디에 속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율법의 저주를 받거나 불못에 떨어지지도 아니한다.
둘째,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에게 드린다는 것이 좀 특이하다(민18:28).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3. 십일조는 어떤 법인가?
그렇다면, 십일조는 어떤 법이라고 할 수 있인가? 그것은 감사의 헌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십일조는 예물(봉헌물, 헌금)에 해당하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하나님께 성도들이 헌금을 바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되지 아니하듯, 십일조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꼭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므로, 자기에게 소득이 없을 때에는 십일조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에게 소득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도 십일조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 인색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감사해서 바치는 일종의 헌물이기 때문이다. 구약으로 치자면 땅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땅에서 나오는 곡식(보리와 밀)과 나무의 소출(포도주, 감람기름)과 우양이 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은총을 베풀어 주심으로 얻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감사함으로 2가지 예물을 바쳤다고할 수 있다. 하나는 십일조였고 또하나는 헌물(맏물=첫것=첫열매, 낙헌예물, 거제물, 서원예물)였다(신12:17, 민18:12~13).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속죄를 위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감사해서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십일조는 누가 누구에게 드리는 것인가?
십일조는 애굽에서 구원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레위인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자손에게 기업으로 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민18:21). 그 이유는 레위인들로 하여금 백성 중 구별되어 하나님을 위하여 회막에서 봉사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내야 했는가? 만약 오늘날 누군가가 이러한 역사적인 유래를 잘 모른다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내는 것을 매우 아깝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내 자신을 하나님께서 빼앗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내야 했는지를 알게 된다면, 그저 감사함으로 십일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5.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했는가?
사실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을 회막봉사를 하게 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게서 레위인들 이스라엘의 장자 대신 받으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해내실 때에,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데려오셨는데, 그때 마지막 재앙이 장자죽음의 재앙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살 길을 마련해주셨다. 그것은 흠없는 1년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자기 집 문설주와 좌우인방에 바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애굽인들의 집에서는 장자와 동물의 첫태생이 다 죽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건재했다. 어린양이 대신 죽어 죽음의 재앙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나중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장자를 살려주었으니 장자를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모든 이스라엘의 집에 장자들이 하나님께 볼모처럼 잡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자 대신에 레위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사용하시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자손 중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셨다(민8:14~19). 왜나하면 그렇게 하여 회막에서 봉사할 일할 수 있는 사람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속죄하는 일을 감당케 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 알고보면 레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봉사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장자 대신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은 자신의 기업이 없이 하나님의 회막에 나와 봉사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자신의 소득의 십일조를 내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소득 중에서 곡식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그리고 우양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게 된 것이다. 만약 자기 자식을 하나님 앞으로 보내 일하게 했다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장자를 위하여 음식과 옷을 해서 갖다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인을 취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삶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는 것이었고, 그것의 핵심이 바로 십일조와 첫열매였던 것이다.
6. 십일조를 드리는 자가 정말 염두해두어야 할 사항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내는 우리 성도들이 주의할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이 바치는 십일조는 목사에게 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인 것이지 목사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위해 전시간으로 일했던 레위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게 하셨듯이, 오늘날에는 전시간을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목회자들을 위해 십일조를 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지는 않으신다. 소득의 십일조만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마23:23에서, 소득의 십일조의 한 예로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입조를 드리는 것에 대해 언급하셨다. 하지만 십일조가 형식적으로 드릴 위험성을 지적하시면서, 십일조를 드릴 때에는 자신의 마음까지 함께 바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마23:23).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도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 십일조를 바치고 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렇게도 말할 것이다. 십계명은 율법의 규례이니만큼 폐지된 것이고, 초대교회에서도 십일조를 냈다는 사례를 살펴볼 수 없으니, 예수께서도 십일조법을 폐지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초대교회의 기록에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 주 금요일에 말씀드린 말씀을 참고하기를 바란다(https://dongtanms.kr/57461).
7. 십일조를 하는 자가 받을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십일조를 드리는 자가 받게되는 축복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봉사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위하여 그리고 매3년의 십일조는 레위인들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십일조를 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런 말씀을 안 하셨는가? 아니다. 십일조를 내는 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분명한 복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신명기 26장에 나온다.
신명기 26:1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내는 자들에게 2가지 복을 약속하셨다. 하나는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 자신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과 또 하나는 그들이 농사짓는 땅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라 약속의 말씀이다. 그렇다. 농사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복이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 수 있어야 하고, 일찍 죽지도 않으며, 전쟁같은 것에 나가 죽지 않고, 주님이 주신 천수를 누리며 사는 복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경작하는 그 땅에 복을 주시는 것이다. 기근이 생기지 않게 때를 따라 비를 주실 것이고, 깜부기 재앙이나 메뚜기 재앙 등이 임하지 않게 막아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의 건강과 장수 그리고 땅의 풍성함의 소출은 십일조를 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물질적인 땅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손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말라기선지서에도 동일하게 나타나 있다(말3:10~12)
8. 나오며
오늘날 어떤 성도들을 보면 열심히 일하는 것 같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것 같은데, 늘 물질에 허덕이는 자들이 있다. 정말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그렇게 동분서주하는데도 불구하고 물질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오늘의 말씀을 적용해보는 것이다. 그가 물질에 허덕이게 된 것은 자신이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도 아니고, 사업의 시기를 잘못 정한 것도 아니다. 그가 하나님께 인색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인데도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않고 살고 있기에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의 가산과 토지를 붙들어주시지 아니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는대로 거둔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심지도 않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마구 물질을 부어주실 리가 없다. 그것은 공의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했는데 물질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틀림없이 그 물질로 인해 타락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과 땅의 축복은 심는대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물질을 통해서도 자신의 신앙을 키워나갈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더욱더 알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자가 되라. 그것으로 일환으로서 십일조를 주님께 드리는 것에 결코 인색하지 말라. 주님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 기억하고 계셨다가,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법으로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으라.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라. 건투를 빈다.
2020년 1월 19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