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의 길목인 휴전선 앞에서 평화기원제를 드리면 평화가 오는가? 남북정상이 만나서 서로 악수하고 회담을 개최하다보면 과연 평화가 오는가?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탄생에 맞춰 그 소식을 전하고 그것을 찬양했던 천사들의 노랫소리 속에서 우리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과연 이 땅 위에 평화는 올 것인가? 그리고 만약 평화가 온다면 어떻게 오는가?
1. 들어가며
이 땅 위에 평화는 과연 언제 어떻게 오는 것인가?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에 베들레렘의 들녘 하늘에서는 천사들의 대합창이 있었다. 그때 천사들은 이렇게 찬송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과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그래서 우리들은 흔히들 줄여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 그런데 예수께서 과연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땅 위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었을까?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일이 되었는지를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님의 탄생은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는가?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날, 하늘에서 울려퍼진 천사들의 합창의 내용은 2가지였다. 하나는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것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소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 것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에게는 슬픔이요, 하나님의 고통이며 하나님의 낮아지심이셨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되신 사건을 두고 어찌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사건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사실 "영광"이라는 뜻은 높여 기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요, 어떤 결과물로 말미암아 누군가를 빛나게 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육신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죽기 위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숙연한 일이요 우리에게는 송구스러운 일이며, 하나님에게는 너무나 자기를 비하하는 일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권한을 스스로 제한하여 피조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천사들은 예수께서 아기로 탄생하게 된 사건을 두고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찬양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여기서 "영광(독사)"이라는 단어는 사복음서 중에는 요한복음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단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사도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과 예수께서 직접 말씀해주신 것을 가지고 정의해보면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과 예수께서 죽으신 것과 그분의 부활하신 것을 두고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한다(요12:23~24, 7:39, 11:4).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에서는 만세 전에 계획해두신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실현된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이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시고 그것을 차근차근 실행해 가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획의 실제적인 나타남은 하나님의 성육신이었다. 고로, 하나님의 원대한 뜻과 계획이 성취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아기예수의 탄생에 대한 천사의 찬송은 합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의 탄생은 과연 이 땅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일이었는가?
예수님의 탄생은 과연 평화에 관한 소식이었는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것은 절반은 맞지 말이라고 하겠지만 절반은 사실 틀린 대답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탄생 소식은 모든 인간에게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고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평화가 임하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천사들이 합창했던 것이다. 당시 천사들은 당시 이렇게 찬양했다. "땅 위에는 선의의(호의의, 기쁨의) 사람들 안에 평화가 [있습니다. 있을지어다]" 그렇다. 예수의 탄생은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평화를 안겨주는 것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다툼과 싸움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때 천사들은 분명하게 말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환영하는 자들에게는 평화의 놀랍고도 기쁜 소식이 될 것이지만 그 반대는 평화의 소식이 아니라 갈등의 소식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탄생이 평화의 소식이 되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소식이 될 것인가? 그것은 결코 평화의 소식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불을 던지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바라지 않거나, 예수님의 오심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예수의 탄생소식은 결코 평화의 소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분쟁과 다툼과 싸움의 소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예수의 탄생소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그것을 싫어하는 자들은 누구였는가?
4,000년 동안 예언되어온 메시야가 탄생했것만 당시 유대나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분을 환영하지 않았고 영접하지도 않았다(요1:11). 그들의 반응은 2가지였다. 하나는 헤롯대왕과 같은 반응이었다. 헤롯은 예수의 탄생소식을 자신의 왕권을 무너뜨릴 위협적인 존재의 탄생으로 알아들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을 무너뜨릴 사람의 싹을 잘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의 방문이후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 지경 안에 살고 있는 2살이하의 모든 남자아이를 다 죽이라고 명령했다. 화근은 없애려는 시도였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탄생소식은 결코 그들에게 기쁨이 되지 못한다. 그런 자들에게는 예수탄생소식이 결코 평화의 소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소식은 긴장과 갈등과 불화의 소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반응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의 탄생을 거역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의 반응이다. 이들도 역시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지도 않았고 환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기예수의 탄생소식을 듣고도 경배하러 가지도 않았다. 그들은 메시야의 탄생이 혹시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아가지는 않을까 염려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두개인은 사두개인대로,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들대로 많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그것을 고대할 것을 가르쳤지만 막상 그분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기는 들었어도 그것이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을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것으로 마음먹었다. 결국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거짓고소와 불법적인 재판을 동원하여 오신 메시야를 십자가에서 죽게 한다.
5. 이 세상에서는 어떤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며, 이 땅 위에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그리고 이 땅 위에 평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가? 하나는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성취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의 중심으로 모셔들이고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누가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불화를 만들어내는가? 그것은 자기의 중심에 자기가 주인이 되어버린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셔들인 사람은 다르다. 그는 예수님과 똑같은 삶을 살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힘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앞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은 어떻게 삶을 사셨는가? 그분의 삶은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사셨다. 자기의 높은 위치를 내려놓으셨다. 권력을 누리고 향유하는 삶을 포기하셨다. 창조주와 전능자로서 가진 기본적인 능력마저 내려놓으시고 친히 사람으로 내려오셨다. 그럼,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인류의 대속제물이 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인류의 죄값은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받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피흘려 죽으셔서 인류의 죄값을 담당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인간이 되어 오시는 순간부터 자신의 권한을 스스로 내려놓으셨다. 인간의 형편과 처지를 고스란히 체험하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며 섬기다가 가셨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려면, 과연 내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실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을 낮추지도 못한 사람이, 자신의 귀한 것은 내어놓지도 못하는 사람이 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사람은 이 땅 위에 평화를 가져다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그들 때문에 이 땅에 온갖 불화와 시기와 질투, 싸움과 살인이 벌어질 뿐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정치적인 야심이 강했던 헤롯대왕은 자신의 권력을 탄탄하게 하고 장기적인 집권의 야욕을 성취하고자 어떻게 했는가?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자기의 자식도 죽였고, 자신의 아내와 장모마저도 살해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권력을 한없이 지향했던 헤롯은 예수의 탄생은 걱정근심의 소식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죄없는 어린아이들의 학살자로서 낙인찍히고 말았다. 왜냐하면 동방박사들이 자기에게 기별하지 않고 떠나자 곧바로 베들레헴으로 사람을 보내 2살이하의 모든 사내아기를 다 죽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주인되지 못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거나 사탄마귀의 인도를 따라가는 자는 결국 사탄처럼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교만하고 악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나중에는 실로 가증한 사람이 되어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종교지도자들 곧 대제사장들은 어떠했으며, 서기관을 포함한 바리새인들은 또 어떻게 했는가? 그것은 역시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자기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토록 싸움을 벌인 것이다.
6. 나오며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사탄마귀가 계속해서 도사리고 있고, 우리의 마음 속에 죄된 본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모두는 오늘도 헤롯대왕이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길을 걸어가려고할 것이다. 날마다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과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심은 가중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결국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이가 될 수는 없다. 아니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사도바울처럼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자신을 죽음에 넘겨야 한다. 내 안에 성전삼고 거하고 계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날마다 말씀과 씨름해야 한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만약 우리가 자기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을 줄도 모르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려고도 하지 않고, 말씀을 듣지 않으며, 기도도 하지 않는 상태에 놓여있다면 정말 큰 일이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서는 안 된다. 통렬한 자기반성과 회개가 절실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반성과 회개는 남이 대신해줄 수 없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엎드려야 한다. 부르짖어야 한다. 그래야 나도 평화를 가져오는 이로서 조금만 밀알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2019년 12월 27일(금)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