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더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학이고 교리요 신앙고백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후 5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나 교리 그리고 신앙고백을 살펴보면, 성경과는 많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에 들어와서서 많은 이들이 성경을 따라가기보다는 신학노선을 따라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믿고 있는 신학노선이 최고라고 알고 그냥 따라가는 것이다. 아니다. 아무리 내가 아무리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신학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과 동떨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무턱대고 그것을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오늘은 칼빈주의의 교리와 알미니안주의 교리가 과연 얼마나 성경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혹 성경을 말하고 있다면 어떤 것이 보다 더 성경적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신앙고백을 찾아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었지 왜 이딴 것까지 알아야 하는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맞다.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된다. 하지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확실하지 않는데 어떻게 잘 믿을 것인지는 생각해 보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지에 대해서 도와주는 자료들을 찾게 된다. 그러한 것들 중에는 교리서나 신앙고백서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이중에서도 전 세계 교회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교리 내지는 신앙고백이 있다면, 뭐니뭐니해도 1648년에 영국에서 나온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일 것이다. 대부분의 장로교 교회들이 이 신앙고백을 교리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종교개혁의 노선이자 정통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신앙고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거기에는 성경과 어긋된 신앙고백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채택된 신앙고백은 바꾸기가 여간 쉽지 않다. 그리고 한 번 신앙고백이 밖으로 나오게 되면 그것으로 고착화되는 것이 대체로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와 어떻게 행할 것인가의 표준은 반드시 성경이어야 한다. 즉 성경에서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를 그대로 보고 믿고 순종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두꺼운 66권의 성경책을 읽기보다는 보다 더 손쉽게 신앙생활하고자 교리집이나 요약집이나 신앙고백서를 찾게 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오늘날 신앙고백의 가장 큰 근간이 될 뿐만 아니라 가장 논쟁이 되고 있는 두 교리 곧 칼빈주의의 신앙강령과 알미니안주의 신앙강령을 성도의 입장에서 조금이나마 들여다봄으로써 우리가 진정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가?
알미니우스(A.D.1560~1609)는 칼빈의 제자의 제자다. 그는 칼빈의 가장 신실한 제자였던 베자(A.D.1519~1605)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년의 간격을 두고 둘은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알미니우스는 칼빈(A.D.1509~1564)이 죽기 5년 전에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칼빈의 제자 베자가 타락전예정론을 외쳤을 때에 그것에 반기를 들고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하는 평신도가 나타났다. 그는 코른헤르트(A.D.1522~1590)였다. 그러자 베자는 자신의 제자였던 알미니우스를 시켜 코른헤르트의 부당함을 반박하게 했다. 그래서 알미니우스는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보는데, 아뿔싸, 나중에 보니 코른헤르트가 훨씬 더 성경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자 알미니우스는 베자를 오히려 반박하게 된다. 그러자 베자는 다른 제자인 고마루스(A.D.1563~1641)를 통해, 알미니우스를 반박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알미니우스와 칼빈간의 신학적 쟁투가 시작된다.
그러다가 칼빈도 죽고 베자도 죽는다. 그러자 알미니우스의 제자들 46명이 칼빈과 베자의 예정론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항론서 5개 항목을 의회에 제출하게 된다. 그러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도르트회의(A.D.1618~1619)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때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우스는 추정하는 46명에게 변론할 기회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이들을 파문하고 주동자를 화형에 처해버린다. 그리고 칼빈이 주장했던 5대항목만을 정통교리라고 선포해버린다. 그리고 이 교리가 영국으로 건너가서 결국 1648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된 것이다.
3.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가?
그렇다면,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칼빈주의보다는 알미니안주의가 훨씬 더 성경적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알미니안주의가 100%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알미니안주의도 잘못된 교리와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들의 주장이 왜 성경적이며 왜 성경적이지 않는지를 하나하나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가. 칼빈주의의 5대강령
먼저, 칼빈주의의 5대강령을 살펴보자.
첫째, 전적 타락. 이것은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해 있으며(렘17:9, 롬3:10~12), 전적으로 무능하다(시14:2~3)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올바른 주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로 인하여 부패하긴 했지만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았으며, 전적으로 무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에 이르도록 결코 이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부어지게 되면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할 수 있을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롬3:10의 말씀 곧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문장은 실은 시14:1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 아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전7:20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 롬3:11의 말씀은 시편14:2을 인용함으로서, 하나님을 없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로서 나발같은 자가 그렇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롬3:10~11의 말씀은 롬3:9의에 대한 근거로 제시되는 구절들에 대한 인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롬3:10~11의 말씀은 롬3:9의 말씀에 따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할 뿐,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전적으로 무능하여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한다는 말씀인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께서는 마12장에서 자신이 메시야로서 사역하고 있음을 구약성경 이사야 42:1~4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그때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실 것이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미 죄로 오염되어 있고 죄성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볼 때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갈대가 상하긴 했으나 완전히 상한 것은 아니며, 심지가 꺼져가고 있으나 완전히 꺼지지는 아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베푸시어 성령으로 도와주시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다시 살아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무조건적인 선택.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창세전에 작정하신대로 바꿀 수 없는 예정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는 선택하신다는 것이다(롬9:11,15, 엡1:5,9,11). 그런데 이 주장은 더더욱 틀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어떤 개인을 구원하신다고 단 한 번이라도 예정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롬9:11의 말씀은 큰 자인 에서가 어린 자인 야곱을 섬길 것이라는 사역적인 예정에 해당하는 말씀인 것이지 구원에 관한 개인 예정의 말씀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섬기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셨으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선택적 개인 구원 예정에 관한 말씀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롬9:13에 나오는 말씀 곧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25장 때부터(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말라기서로부터 인용한 말씀(말1:2~3)으로 1,600년 뒤에 결국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려 망령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결국 큰 자이지만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제한 속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사역을 하셨는데, 이때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사람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요6:37,39,10:29).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구속사건은 모든 인간을 위해 대속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 다만, 그것을 믿지 못해서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자가 발생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제한 속죄에 대한 근거로서 요6:37,39과 10:29을 인용하는데, 사실 이 구절들을 헬라어성경으로 보면 우리말 성경과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말 성경에 나오는 요6:37과 39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로 보내주시는 자(남성,단수)가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한다는 말씀처럼 보인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이 두 구절은 둘 다 어떤 사람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둘 다 중성단수명사로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보내주시고 있는 것(중성,단수)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께로 다다를 것이라는 말씀이며, 예수께서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마지막 날에 일으켜 세울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나오는 "그것"은 예수께 구원받으려고 나오는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부어주시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런 것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지혜과 명철, 성령과 분별력 등이 있을 것이다.
넷째, 불가항력적인 은혜.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선택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이때 그 사람은 이러한 은혜에 저항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어 전부 다 구원받게 된다는 주장이다(요6:37).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명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 은혜를 베푸시어 그를 불러낸다는 것은 맞지만, 때로 인간은 그것을 거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에게는 이것을 택할 것인가 저것을 택할 것인가 하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롬1장의 말씀처럼 사람 중에는 자기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도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인간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을 거부할 없는데, 왜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요청하시겠는지를 말이다(계3:20). 아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을 거부할 수 있는 작지만 조그마한 자유의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죄인이기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섯째, 성도의 견인(인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전적으로나 최종적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할 수도 없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의해 능력으로 끝까지 지킴을 받는다는 교리다(요5:24, 10:27~30, 롬8:35~39, 딤후4:18). 다시 말해, 일단 진정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두 번 다시 아주 타락하는 일이나 멸망받는 일이 없다고 하는 교리다. 이는 한 번 구원받으면 계속해서 구원받는 것이며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되었다. 이미 믿음으로 중생하여 영생을 가진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그러한 사례가 무수히 나온다. 구약에서는 아간과 시므리와 사울왕이 나오며,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고(행5:1~11), 딤전1장에 보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도 있다(딤전1:19). 그렇다고 사람이 믿음으로 얻은 영생을 잃어버리는 시점은 예수님을 버린 그 시점이 되지는 않는다. 한 번 주신 영생을 하나님께서는 바로 거둬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죽는 날에 실행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점에 영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죽어서 심판받을 때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영생을 가진 자가 타락했어도 자신이 죽기전까지는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아닌 것이다. 이는 언제든지 다시 되돌이킬 수 있다는 말이다. 성령의 은혜 아래에서 회개하면 되돌이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시들어가는 영생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살전5:19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계속해서 범죄한 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있는 영생은 영적으로 볼 때 점점 꺼져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믿다가 핍박 때문에 주님을 부인한 자라도 주님은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나,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심판 때에 부인당하게 될 것이다(마10:32~33).
나. 알미니우스의 5개 항론
이제는 알미니우스를 지지했던는 46명의 탄원서에 나오는 항론서 5개항목에 대해 살펴보자. 알미니우스 지지자들이 주장한 5가지 항론서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성경적인 주장들이 많으나 모두가 성경적인 주장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첫째, 조건적인 선택.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선택하시되, 믿고 순종 안에서 견딜 자를 구원하기로 결정하셨으며, 하나님께 반항적이고 믿지 않는 자들은 죄와 진노 아래 두시고 저주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예정론의 변형일 뿐이다. 그래서 이 주장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이 주장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사람이 믿고 순종 안에서 견딜 것을 미리 아시고 예정했다고 말하지만, 칼빈의 예정론과 타협안을 제시한 듯인 인상을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로 예정하셨다고 말한다(엡1:3~6,11). 하지만 어떤 특정한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았다고 말씀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누구나 복음을 듣고 주님이 부르실 때에 응답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신다(엡3:16, 요7:37~38, 계22:17). 그러므로 이미 믿음과 회개를 통해 영생을 받았던 자라도 믿다가 주님을 부인하거나 주님을 떠나서 죄를 짓게 된다면 그는 구원으로부터 탈락될 수 있다. 물론 죽기 전까지 회개한다면 그는 다시 구원을 항하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알미니우스의 첫번째 항론은 틀린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변형된 예정론의 수용이기 때문이다.
둘째, 보편적인 속죄(요3:16, 요일2:2). 이것은 예수께서 모든 인류의 화해와 사면획득을 위해 죽으셨으며, 그래도 믿는 사람만이 속죄의 효력를 실제로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매우 성경적인 주장이다. 왜나하면, 딤전2:6에 보면, 사도바울은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요한도 요일2:2에서, "그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에수께서는 골고다언덕에서 모든 인류의 속죄를 위한 피를 흘리셨고 속죄제사를 드리셨다. 그것도 단 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그러므로 속죄제사는 두 번 드릴 필요가 없다. 단 번의 제사로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할 만한 충분한 효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속죄를 믿지 못하고 또한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자유의지. 이것은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는 은혜를 가지지 못하며, 자신의 자유의지의 작용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고 새롭게 되려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것을 이해하고 생각하고 원하고 수행하기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반응할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것은 절반 정도 맞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왜나하면 죄아래 놓여있는 인간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놔두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꺾여진 갈대는 꺾어지고 말 것이며, 꺼져가고 있는 심지는 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실 때에 자신의 남아있는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손을 붙잡기를 원한다면 그는 구원 안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저항가능한 은혜. 이것은 인간의 선행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은혜가 불가항력적이지는 않으며, 그것은 성경에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한 많은 기록들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어느정도 성경적인 주장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시기를 원하신다(딤전2:4)고 했고, 아무도 멸망당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기에 이르시기를 원하신다(벧후3:9)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셨고, 다른 사람의 중보기도에 따라 하나님은 그에게 선행적인 은총을 베풀어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도 문밖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저항 가능한 은혜가 없다면, 그분은 문을 두드리실 필요가 없으며, 당신의 소원이 이런 것이다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다. 그냥 당신 뜻대로 행하시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구원으로 초청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오라고 하신다.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끝까지 거부한다면 그는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거절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0%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은혜로부터 탈락. 이것은 참된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생명주시는 영에 참여한 자들은 사탄에 의해 실족하거나 낚아채이지 않도록 하나님께 지지하시고 붙들어주신다(요10:28)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쪽에 가까운 주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믿을 때에 주시는 영생을 영원히 주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 영생은 믿는 자가 죽을 때까지 주어지는 생명이다. 그 생명이 다음 세대(세상)까지 가져가려면 예수님을 믿고 나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럴려면, 믿는 자는 계속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견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양태에 따라 견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견인은 조건적인 견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요5;24)"이라는 단어에도 주목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영생이라는 단어는 "영원한 생명"을 단축해서 부르는 말인데, '영원한'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아이오니오스(eternal)'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아이온(age)'에서 온 형용사다. '아이온(age)'은 '시대, 세대, 세상'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영생(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는 "시대의(단수) 생명"이라는 뜻이다. 이것보다 더 원어적인 번역은 없다. 그러나 성경은 대부분 그것을 "영원한 생명(영생)"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성경에 "영원히(영원토록)" 혹은 "세세토록"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때 "영원히"나 "세세토록"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복수) 톤 아이오논(복수)"이다. 이 뜻은 "아이온들(시대들,세대들)의 아이온들까지"다. 곧 "세대들의 세대들까지(till the ages of the ages)"라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에 대해서는 "영원히"나 "세세토록"으로 번역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문구는 무려 12번이나 나온다(계1:6,8, 4:9,10, 5:13, 7:12,10:6,15:7, 19:3, 20:10, 22:5). 그리고 이 문구는 다 하나님을 향하여만 쓰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대들의 세대들까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생(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는 이 문구와는 쓰임새가 전혀 다른 표현이다. "그 시대(단수)의 생명"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믿는 자가 영생을 가진다는 말씀은 곧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유효한 생명을 가진다는 뜻이다(요일5:12). 그러므로 믿을 때에 받았던 영원한(시대의) 생명이 다음 세대(세상)까지 이어지게 하려면, 우리는 끝까지 좁은 길을 가야만 한다. 그것을 계속 유지하느냐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4. 나오며
오늘날에 와서 보면 종교개혁자들에 대하여 많은 아쉬움을 갖게 된다. 왜 루터는 바울의 서신만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야고보서는 성경에서 빼버리려고 했는지 아쉽기만 하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라도 얼마든지 죽기전에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건만, 루터는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을 죽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더욱이 종교개혁의 완성자인 칼빈은 또 어떠했는지 아는가? 그는 자신의 예정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낫으로 목을 잘라 죽이던지, 화형시켜 죽이던지 여러가지 고문으로 사람들을 처형한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어찌 복음으로 무장된 신학자라는 사람이 이럴 수가 있었는가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라고 해도 그들을 향해 일체 함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들도 성경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향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온 우주 가운데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이는 우리 주 예수님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100%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자들이든지, 교리든지 하는 것은 얼마든지 성경을 잘못 인용하거나 요약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있다면 얼마든지 바로 잡아야 한다. 그래야 믿는 우리가 구원의 마지막 순간가지 긴장을 놓치 않고 믿고 회개하다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빌2:12). 건투를 빈다.
2018년 1월 7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