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31(일) 주일낮1부예배
제목: [기독론(107)]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특징(13) 그는 자신이 받은 고난을 통해 비로소 메시야를 알았다(시편69:19~28)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Ci5ukZCWp4U
1. 들어가며
시편은 기독교 예배의 핵심에 자리 잡은 책이다. 유대인들은 오랜 전통 속에서 예배마다 토라(모세오경), 선지서, 그리고 시편을 반드시 낭독해 왔으며, 오늘날 기독교 예배에서도 시편은 빠질 수 없는 필수 본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찬양, 인생의 깊은 고통 속에서 쏟아 낸 탄원,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절박한 부르짖음. 시편은 이처럼 인간 영혼의 모든 결을 담고 있다. 그 문학적 아름다움과 신학적 깊이로 인해 시편은 수천 년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이 가장 많이 읽고 암송하는 성경이 되었다.
그러나 시편 속에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을 심각하게 당혹스럽게 만드는 본문들이 있다. 바로 '저주의 시편(imprecatory psalm)'이라 불리는 시편들이다. 원수에게 저주를 퍼붓고, 그들의 자녀가 고아가 되기를 기원하며, 그들을 산 채로 지옥에 보내 달라고 간구하는 이 본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이 시편들의 표제어에는 "다윗의 시"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행 13:22),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귀신을 쫓고 장차 올 메시아의 시대를 예언적으로 노래했던 다윗이 이러한 저주의 기도를 드렸단 말인가!
사울의 악한 영이 떠날 때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여 그 영을 물리쳤고, 구약 시대에 귀신을 쫓아낸 단 한 번의 기록이 바로 그 사건이다. 그는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 귀신을 보았고, 지혜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로 장차 천 년 뒤에 일어날 일들을 환상으로 보았다. 이처럼 영적으로 성숙한 다윗이 어떻게 그토록 과격한 저주의 기도를 드렸단 말인가! 이것이 설교자들이 시편 강해를 꺼리며 오랜 세월 붙들고 씨름해 온 핵심 물음이다.
오늘 시편 69:19-28의 말씀은 이 오랜 신학적 물음에 정면으로 답하는 본문이다. 다윗은 까닭 없이 자신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서 지워지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왜 다윗이 이러한 기도를 드렸는지, 그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저주의 시편들 속에 숨겨진 놀라운 메시아 예언은 무엇인지를, 나아가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오늘날 설교자들이 시편 강해를 가장 어려워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 걸림돌은 무엇인가?
시편은 기록 시기, 저자, 편집 과정 모두에서 성경 중 가장 복잡한 책 중 하나이다. 시편의 기록 기간은 모세 시대(약 기원전 1406년)부터 바빌론 포로 귀환기(약 기원전 391년)까지 천여 년에 걸쳐 있다. 저자도 다양하다. 모세가 한 편(90편), 솔로몬이 두 편(72편, 127편), 아삽이 12편, 고라 자손이 11편을 기록하였으며, 다윗이 가장 많은 73편을 썼다. 이 시편들은 히스기야 왕 시대에 1차로 편집되었고, 포로 귀환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최종 편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빌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하는 장면을 노래하는 시편 126편과 137편이 후기 편집에 포함된 것이 그 증거이다.
시편은 모세오경의 구조를 반영하여 다섯 권으로 나뉜다. 1권(1-41편), 2권(42-72편), 3권(73-89편), 4권(90-106편), 5권(107-150편)이 그것이다. 마지막 5권은 특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며, 146편부터 150편까지는 각 편이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나도록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시편 119편은 히브리어 22개 알파벳의 첫 글자를 차례로 각 단락의 첫 단어로 삼아 지은 알파벳 시(acrostic poem)로, 히브리어 원어를 아는 자에게만 그 의도적인 아름다움이 온전히 드러난다. 이처럼 시편은 단순한 기도 모음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정교하게 설계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교자들이 시편 강해를 기피하거나 어려워하는 이유가 있다. 그 핵심적인 걸림돌은 바로 '저주의 시편'이다. 학자에 따라 저주의 언어가 포함된 시편을 28편까지 분류하기도 하지만, 저주 내용이 중심을 이루는 시편은 약 열 편 정도이다. 시편 7편, 35편, 55편, 58편, 69편, 109편이 대표적인 저주의 시편으로 꼽힌다. 10개의 저주시 가운데 두 편(79편, 83편)은 아삽의 작품으로 전해지지만, 나머지 여섯 편 이상은 명백히 다윗의 이름이 표제어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시편들이 설교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이유는 내용의 과격함 때문이다. 이제 시편 109:7-10을 보자.
시 109:7-10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으로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소서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시고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이 기도를 오늘날 성도들이 그대로 따라 드릴 수 있겠는가! 아무리 원수가 밉다 해도 그의 자녀가 고아가 되기를, 그의 아내가 과부가 되기를, 그들이 거리에서 빌어먹기를 하나님께 구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 시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다. 이번에 함께 나누고 있는 시편 69편의 표제어도 마찬가지이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소사님에 맞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소사님'은 백합화 곡조에 맞춘 음악 형식을 가리킨다. 다윗은 이 저주의 기도를 단지 혼자 속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악단을 시켜 음악으로 연주하게 하고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노래하게 하였다.
또한 저주시의 대표작인 시편 55편에는 "그들의 혀를 잘라버리소서"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시편 58편에는 "불의한 재판관들의 이빨을 꺾어 버리소서"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처럼 과격한 내용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에 보존되었다는 것이 설교자들로 하여금 선뜻 이 본문 앞에 서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 걸림돌 뒤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
3. 저주의 시편이란 무엇이며, 성경은 왜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겨 놓았는가?
저주의 시편(imprecatory psalm)은 기도의 형식을 통해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하는 시편이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는 자가 하나님께 그 심판을 위탁하는 신앙의 행위이기도 하다. 즉, 직접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판단을 맡기는 것이다. 오늘 본문인 시편 69:25-28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시 69:25-28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되며 그들의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주께서 치신 자를 그들이 핍박하며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들의 슬픔을 그들이 말하나이다 그들의 죄악 위에 죄악을 더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을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이러한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에 수록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실존을 가감 없이 기록한다. 창세기 38장에는 유다가 자신의 며느리 다말을 취하여 자식을 낳는 부끄러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믿음의 조상 유다의 이 허물이 성경에 남겨진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완전한 인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최종 편집자로서 다윗의 저주의 시편을 성경에서 제거하지 않고 보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음을 알았다.
둘째, 믿음이 있어도 까닭 없는 극심한 고통 앞에서는 절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인정한다. 믿음이 있어도 까닭 없이 고통을 당하면 사람은 절규한다. 믿음이 있어도 억울함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께 하소연한다. 믿음이 있어도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면 그 원인 제공자를 향해 분노를 쏟아 낼 수 있다. 믿음이 있어도 자신을 까닭 없이 죽이려는 자들이 강하고 자신은 홀로 남았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지 않느냐고 되물으며 구체적으로 그 심판을 요청할 수 있다. 성경은 이 인간적 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셋째, 가장 중요하게, 저주의 시편들은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 이것이 저주의 시편이 단순한 감정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에 보존된 가장 핵심적인 이유이다. 다윗이 자신의 억울한 고통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가운데, 성령의 감동으로 장차 오실 메시아가 당하실 고난이 예언적으로 선포되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저주의 시편은 영원히 걸림돌로 남겠지만, 이 비밀을 알면 저주의 시편은 복음의 핵심을 담은 예언의 노래가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저주의 시편을 성경에 보존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공의를 향한 믿음 안에서 그 심판을 구하는 기도 자체가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있음을 보여 주시려는 의도도 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님이 가르치신 원수 사랑의 계명 안에서, 이제 성도들은 그 기도를 심판이 아닌 회개와 구원을 향해 돌리도록 부름 받았다.
4. 다윗은 생애 어느 시기에, 누구를 향해 저주의 시편을 기록했는가?
다윗이 기록한 저주의 시편은 최소 여섯 편에서 여덟 편에 이른다. 이 시편들은 다윗의 생애 전체에 고르게 분포된 것이 아니라, 초기와 중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말기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다윗이 고통의 경험을 통해 점차 성숙해 갔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번에 나누고 있는 본문인 시편 69편은 다윗이 생애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될 것으로 추정되는 저주의 시편이다. 이 시편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윗은 15세 무렵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고, 20세 전후에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을 쓰러뜨려 이스라엘에 큰 승리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이 승리가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사울은 천천을 죽이고 다윗은 만만을 죽였다"(삼상 18:7)고 노래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울은 깊은 시기심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 하였다. 결국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역적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시 69:8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어머니의 자녀에게 이방인이 되었나이다
왕이 공적인 원수로 지목한 다윗을 돕는 것은 곧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조차 그를 외면하였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평소에도 다윗을 홀대하였고, 형제들도 그가 도망할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다윗의 어머니는 이름조차 성경에 기록되지 않을 만큼 이른 시기에 그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7편에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시 27:10)라고 고백하였다. 온 세상이 자신을 버렸지만 하나님만은 자신의 편이라는 믿음으로 버텨 낸 것이다. 시편 29절에는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라고 고백하여, 이 시편이 그의 초기 도망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시 69: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오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이처럼 시편 69편은 사울 왕과 그를 추종하던 세력을 향한 다윗의 최초 저주의 시편이다. 그 후 다윗의 생애를 따라가면 각 시기별로 저주의 시편이 등장하는데, 각각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과 연결된다. 그중에 시편 7편과 35편은 십 황무지 사람들이 다윗의 위치를 사울에게 밀고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같은 유다 지파이면서도 자기 백성의 지도자가 될 다윗을 배반하여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에 빠뜨린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구한 것이다.
시 35:8 그가 생각하지 못한 때에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그가 숨긴 올무에 자기가 잡히게 하사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시편 109편은 놉 땅 제사장들의 참혹한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다윗이 도망칠 때 놉의 대제사장 아히멜렉은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배고픈 다윗에게 제단의 떡과 골리앗의 칼을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은 에돔 사람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을 포함한 제사장 85명을 학살하고, 나아가 놉 땅의 남녀와 아이들, 소와 양까지 모두 진멸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처참한 소식을 접한 다윗이 극도의 분노와 비통함 속에서 쓴 것이 시편 109편이다.
시 109:9-10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시편 55편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킬 때 그의 가장 가까운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으로 돌아선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로, 다윗과 함께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하며 깊은 우정을 나눈 인물이었다.
시 55:12-14 나를 책망하는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가장 가까운 벗에게 배신당한 다윗의 상처는 깊었다. 그는 이 원수의 혀를 잘라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산 채로 스올(음부)에 내려가게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히도벨은 이 기도대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삼하 17:23), 압살롬도 요압 장군에 의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5. 다윗이 저지른 세 가지 실수는 무엇이며, 그것이 그의 인격 평가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행 13:22)로 불렸고, 성령의 강한 임재를 받아 귀신 들린 사울 왕에게서 악한 영을 물리치는 역사를 행하였으며, 지혜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로 수백 년, 아니 천 년 뒤의 메시아를 환상으로 보고 예언하였다(시 110:1,4).
그러나 그도 사람이었다. 성경은 그의 실수를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기록한다. 크게 세 가지 주요한 실수가 그의 생애에 기록되어 있다.
다윗의 첫 번째 실수는 충성스러운 부하 장수 헷 사람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간음과 살인 교사라는 이중적 죄악이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 이 죄를 지적하셨고,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중하였다.
삼하 12:10 이제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음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이 하나님의 선언은, 이후 압살롬의 반란과 아도니야의 반역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졌다. 다윗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실수는 신명기 17장의 왕에 관한 세 가지 규정과 연결된다.
신 17:16-17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왕에 대한 세 가지 규정, 즉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 아내를 많이 두지 말 것,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 중에서 다윗은 마지막 하나만 온전히 지켰다. 그는 모든 전쟁의 전리품을 자신을 위해 쌓지 않고 장차 세워질 성전 건축 자금으로 헌납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두 규정은 지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군사력을 알아보려고 인구 조사를 실시한다. 다윗이 노년에 왕위를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줄 준비를 하면서, 요압 장군을 시켜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을 계수하게 하였다. 요압이 "여호와께서 자기의 백성을 백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삼하 24:3)라며 만류했음에도 다윗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인간의 군사력을 믿으려 한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전염병으로 7만 명이 죽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많은 아내를 둔 실수를 범했다.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다윗의 아내는 최소 여덟 명이다. 첫 번째 아내 미갈(사울의 딸)부터 시작하여 아히노암, 아비가일, 마아가, 학깃, 아비달, 에글라에 이어 일곱 번째가 밧세바이며, 그 이후에도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아내들이 여럿 있었다.
다윗의 세 번째 실수는 저주의 시편을 기록하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연주하게 한 것이다.아무리 억울한 처지라 해도, 원수의 자녀가 고아가 되게 해달라거나 생명책에서 그들의 이름을 지워달라는 기도는 지나쳤다. 그러나 이 실수가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경륜 안에서 메시아 예언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역설이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럼에도 분명하다. 그는 저주의 시편을 썼지만, 실제로 원수를 직접 보복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손대지 않았고, 압살롬도, 아히도벨도, 시므이도 그의 손으로 직접 해하지 않았다. 다윗은 분노를 하나님께 쏟아 냈지만 복수는 하나님께 맡겼다. 그것이 다윗의 위대한 신앙이었고,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불린 이유였다.
6. 저주의 시편 속에 숨겨진 메시아 예언은 무엇이며, 다윗은 그것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는가?
저주의 시편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 안에 단순한 감정의 분출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다. 다윗이 자신의 억울한 고통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가운데, 성령의 감동으로 장차 오실 메시아가 당하실 처참한 고난이 예언적으로 선포된 것이다. 이것이 저주의 시편들이 성경에서 제거되지 않고 반드시 보존되어야 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다.
오늘 본문인 시편 69편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시 69:19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나의 대적들이 다 주 앞에 있나이다
이 구절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며 당한 비방과 수치를 노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비방과 수치와 능욕의 예언이기도 하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강도들 사이에 달리시고 지나가는 자들에게 조롱당하시며, 종교 지도자들에게 능욕당하시던 그 장면이 이미 이 구절 속에 담겨 있다. 21절은 더욱 분명하다.
시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 식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정확하게 예언한 것이다. 마태복음 27:34은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했다고 기록하며, 요한복음 19:29은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라고 기록한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고통을 호소하는 가운데, 그 언어가 정확히 천 년 뒤 예수님의 십자가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시편 109편에도 같은 패턴이 나타난다.
시 109:24-25 나의 무릎은 금식으로 약하여지고 내 육체는 기름기가 없어 수척하오며 나는 그들에게 욕거리가 되었으며 그들이 나를 보고 머리를 흔드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마지막 길에서 굶주리고 수척한 몸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분을 향해 머리를 흔들며 조롱하였다(마 27:39). 다윗의 고통의 언어가 메시아의 고통을 예언하는 언어가 된 것이다. 시편 55편은 또 다른 면을 보여 준다. 가장 가까운 벗 아히도벨에게 배신당한 다윗의 경험은, 가장 가까운 제자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하신 예수님의 경험의 예표이다. 다윗이 느낀 배신의 아픔, 그 깊은 울분이 예수님이 유다에게 팔리실 때의 처참함을 미리 노래한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생애를 통해 예수님이 걸어가실 십자가의 길을 미리 노래하게 하신 것이다.
다윗은 처음에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악단이 이 노래를 반복하여 연주하고, 회중이 거듭 부르는 가운데, 그는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 점차 깨닫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이 억울한 고통, 이 비방과 수치와 능욕, 이 배신의 아픔이 단순한 나의 불행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당하실 고난의 미리 그림자였구나. 나의 절규가 메시아의 십자가 고난을 세상에 알리는 예언의 노래였구나. 이 깨달음이 다윗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가 원수를 향한 저주의 기도를 멈추고 하나님의 공의에 모든 것을 맡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저주의 시편을 성경에 남겨 두신 이유이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기록이 아니라, 메시아의 고난을 미리 알리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경륜이 담긴 예언의 노래였다.
7. 신약의 예수님과 스데반, 사도 바울은 원수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으며, 다윗과 어떻게 다른가?
다윗이 원수를 향해 저주의 기도를 드렸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은 원수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는가? 이 비교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계시의 진보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첫째,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원수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분명하게 가르치셨는가?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은 다윗의 저주의 시편과 정반대의 입장이다. 다윗이 "저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소서"라고 기도했다면, 예수님은 그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명령을 가르치시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실천하셨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붙잡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군사들은 그분을 채찍으로 때리고 가시관을 씌웠으며 조롱하였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순간,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기도는 단순한 관용이 아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다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 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회개할 기회를 얻기를 원하셨고, 그 기회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유예해 달라고 간구하셨다. 그 결과 예루살렘의 멸망은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40년이 지난 서기 70년에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둘째, 첫 순교자였던 스데반의 태도는 어떠하였는가? 그런데 그도 예수님과 같았다. 유대인들이 돌을 던져 스데반을 죽이는 그 순간, 그도 역시 예수님처럼 기도하였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기도가 얼마나 큰 역사를 만들었는지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서던 사울이 이날도 증인들의 옷을 맡아 보며 스데반의 죽음을 기뻐하였다(행 7:58). 그런데 만약 스데반이 그날 다윗처럼 "주님, 저 사람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소서"라고 기도했다면, 사울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얼마후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고, 그 덕분에 사울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 사울이 훗날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었다. 스데반의 기도 하나가 신약 성경의 절반을 쓴 사도 바울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로마서에서 이렇게 정리하였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인간이 직접 보복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겨 두는 것이 신약 성도의 길이다. 오히려 원수에게 선을 베풂으로써 그가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가장 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도록 협력하는 것이 신약의 성도에게 요구되는 삶의 방식이다. 엘리사가 도단 성에서 아람 군대를 이기고도 적군 병사들을 오히려 먹이고 입혀서 돌려보냈던 것처럼(왕하 6:22-23),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8.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왜 다른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다윗과 근본적으로 다른 위치에 있다. 다윗은 성령의 특별한 임재와 은사를 통해 예언하고 이적을 행하였으나, 그것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시며 영구히 함께하신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안에 부어 주시고, 원수를 향해서도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성도가 다른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귀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그 가장 분명한 증거이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던 자였다. 그러나 회개한 후 그는 신약 성경의 절반을 기록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만약 누군가 "저 사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소서"라고 기도했더라면, 우리는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들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나발 사건은 다윗 자신이 이 진리를 배운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윗의 부하들이 갈멜 사람 나발의 양 떼를 보호해 주었는데, 나발은 다윗의 요청을 문전박대하며 홀대하였다. 이에 분노한 다윗이 군사 400명을 이끌고 나발을 치러 가는 순간,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급히 달려와 다윗 앞에 엎드리며 말하였다.
삼상 25:30-31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다 이루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내 주께서 까닭 없이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원수를 갚으셨다든지 하는 것이 내 주에게 걸림이 되지 아니하게 하소서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번쩍 깨달았다. 하나님이 나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텐데, 내가 직접 보복에 나선다면 그것이 훗날 내게 걸림이 될 것이다.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자. 그는 군사를 돌이켰고, 나발은 얼마 후 하나님의 치심으로 죽었다. 다윗이 배운 교훈은 분명하였다. 내가 보복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된다. 이 경험이 쌓여 갔기에, 다윗의 생애 말기에는 저주의 시편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주어져도 손대지 않았고,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도 그를 직접 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심지어 시므이가 자신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해도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을 것이니 그를 저주하게 내버려 두라"(삼하 16:10)고 말하며 감내하였다. 다윗은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배워 간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도 같다.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 사이에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나를 비방하는 그 사람이 회개하면 또 다른 사도 바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이미 성령이 내주하신다. 그 성령의 능력으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9. 나오며
이번 시간에 우리는 시편 69:19-28을 중심으로 저주의 시편에 얽힌 여러 물음들을 살펴보았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시편 강해를 어려워하는 가장 큰 걸림돌인 저주의 시편이 무엇인지, 성경이 왜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겨 놓았는지, 다윗이 생애 어느 시기에 누구를 향해 이 시편들을 기록하였는지, 그의 생애에서 드러난 세 가지 실수는 무엇이었는지, 그 저주의 시편들 속에 어떠한 메시아 예언이 숨겨져 있었는지, 그리고 예수님과 스데반과 사도 바울이 원수를 향해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지,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다윗은 완성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자였다. 그래서 그는 억울한 고통 앞에서 절규하였고, 원수가 미울 때 저주를 쏟아 냈으며, 욕정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함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연약함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다윗의 고통이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하는 노래가 되었고, 다윗의 배신 경험이 주님이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하실 처참함을 미리 보여 주는 그림이 되었으며, 다윗의 수치와 능욕이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당하실 비방과 능욕의 예언이 되었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처럼 깊고 오묘하다.
신약 시대를 사는 성도는 다윗이 말기에 도달했던 자리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서 이미 출발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이미 받았고, 성령이 이미 내주하시며,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이미 주어져 있다. 그 명령은 불가능한 요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 안에서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다.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며, 그 사이에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도, 나를 비방하는 그 사람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붙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다윗이 고통 속에서 점차 배워 갔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는 이미 주어진 은혜 안에서 온전히 살아 내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6년 05월 31일(일)
정보배 목사
[설교핵심]
이 설교는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저주 시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연단 과정과 그 속에 감추어진 메시아적 예표를 탐구합니다. 설교자 정보배 목사는 성군으로 알려진 다윗이 원수들을 향해 가혹한 저주를 퍼부은 이유가 단순히 개인적인 분노를 표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장차 인류의 죄를 위해 무고한 고난을 겪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미리 체험하고 예언하기 위함이었음을 역설합니다. 다윗은 초기의 혈기 어린 저주를 넘어 생애 후반으로 갈수록 보복을 하나님께 맡기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갔으며, 이는 오늘날 성도들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신약적 용서의 교훈으로 연결됩니다. 결국 이설교는 고난의 현장 속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던 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고 찬양의 사명을 완수하는 왕으로 세워졌는지를 심도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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