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그냥 대충 살면 아니 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시간을 사용할 때에 어떻게 사용해야 시간을 구원해 낼 수가 있으며,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가 있는가? 그 비결이 오늘 말씀 안에 들어 있다.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심오한 책일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예정론이 들어 있으며, 영적 싸움에 관한 놀라운 진리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여러 번의 시간을 통하여, 새 사람인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를 살펴보았다. 이어서 우리는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한 삶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것은 에베소서 4:1~6:20에 기록된 말씀이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삶과 성령충만을 받는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엡5:1~21). 특히 오늘 말씀 안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놀라운 비밀과 성령충만한 삶이 무엇인지에 관한 진리의 말씀들이 들어 있다.
2. 에베소서의 4장과 5장의 위치는?
우리는 지난 몇 시간을 통하여 에베소서 4장을 살펴보았다. 에베소서 4장은 에베소서의 후반부(4-6장)의 첫 시작이다. 여기 4:1-16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연합과 성장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4:17-6:20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구성원 각자의 새 생활에 대한 권면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6:21-24은 짤막한 결어 부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에베소서 4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삶에 대한 교훈들이 듬뿍 들어있는데, 첫째 부분(엡4:1~6)을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들이라면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둘째 부분(엡4:7~16)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5가지 직분을 교회에게 주셨으며, 이러한 직분자들로 인하여 성도가 온전케 될 수 있고, 그 목표치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라고 배웠다. 그리고 셋째 부분(엡4:17~24)에서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이전의 생활방식을 따르던 옛사람을 버리고 오직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창죄된 새 사람을 계속해서 입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넷째 부분(엡4:25~32)에서는 서로 지체가 된 형제자매들은 서로에게 죄를 짓고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이제 오늘은 에베소서 5장을 살펴볼 차례다. 에베소서 5장은 에베소서 5:1~6:20의 말씀 속에 위치해 있다. 그중에서 첫째 부분(엡5:1~14)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 받는 삶을 살아야 함을 권면하고 있으며, 둘째 부분(엡5:15~21)은 성도로서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꼭 실천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 부분(엡5:22~6:9)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대 이웃관계들 곧 아내와 남편의 관계, 자녀와 아비들의 관계, 종들과 상전들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부분(엡6:10~20)에서는 성도들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갖추어야할 장비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언급하고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삶(엡5:1~14)과 성도로서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실천사항들(엡5:15~21)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3. 그리스도인들은 왜 더러운 행위를 멀리해야 하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가?
에베소서 5:1~14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더러운 행위들을 멀리하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이때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로 하여금 사랑을 받는 자녀들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엡5:1).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성도들을 사랑한 것같이 사랑 안에서 계속해서 걸어갈 것을 권면하였다(엡5:2).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떻게 성도들을 사랑하셨던 것인가? 그것은 자신을 하나의 예물로서 그리고 하나의 희생제물로서 넘겨주셔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물"이라 함은 피없는 예물들을 가리키고, "제물"이라 함은 피를 가진 제물들을 가리킨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생애를 예물로 하나님께서 드리셨으며, 그분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드리셨다.
이어서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음행과 불결함과 탐욕을 버리라고 권면한다(엡5:3). 탐욕은 우상숭배하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에베소 성도들이 성령을 모신 자가 되었음에 불구하고, "음행과 불결함과 탐욕"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가? 사도바울은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엡5:5). 그렇지만 사람들은 헛된 말로 성도들을 속일 것이라고 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혹시 자신이 음행을 저지르거나 불결하고 탐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에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런 이들을 향해 단호하게 경고한다. 그런 자들 위에 하나님으로부터 진노가 내려오고 있으며, 끝내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서 상속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엡5:5~6).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왕국)에서 상속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들어가겠지만 그곳에서 받을 상속분이 없다는 뜻일까? 그런데 놀라지 말라. 사도바울의 경고는 경고의 수준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음행하는 자와 우상숭배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계21:8). 그러므로 이런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혹 징계는 받을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받지 않는다는 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 아니다. 사도바울은 믿는 이들이라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하는 아들들에게 계속해서 임하고 있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엡5:6).
4.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왕국)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상속받게 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은 두 개의 왕국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하나의 왕국을 가리키는 것인가? 다시 말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들어가게될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왕국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왕국인가?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왕으로 통치하는 왕국이 있다고 말한다(엡5:5, 딤후4:11, 벧후1:11). 하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는 왕국도 있다고 말한다(마12:28, 21:31, 행14:22, 28:31, 갈5:21). 예를 들어, 스가랴 14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재림하시어 천하의 왕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슥14:5,9). 그렇지만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고전15:25,딤후2:12).어떤 것이 맞는 표현인가? 장차 세상이 새롭게 되어 도래할 왕국(나라)은 그리스도의 왕국(나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왕국(나라)인가? 그것에 대한 해답은 요한계시록에 있다(계11:15,17).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계11:17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창조하실 새로운 세상은 "주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다. 오늘날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전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한 분은 아버지, 한 분은 아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비록 둘의 모습은 다르지만 그분들의 뜻과 속성(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엘로힘)께서 구약시대에는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자신을 "예수"라고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만 나올 뿐, "여호와"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 구약시대에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라는 명칭이 있는데, 이 명칭은 원래 "에흐예" 내지는 "아하아[흐]"였다(출3:14). 그런데 "아하야[흐]"라는 이름의 뜻은 "나는 알렙이다(헬라어로 표현하면, 나는 알파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셨고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때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하셨다(계22:13). 이것은 결국 구약시대에 창조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여호와)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심으로 모든 역사를 마치실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이신 분"의 왕국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엡5:5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그 왕국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이신 분의 왕국"이라고 나온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님"이라는 문장 앞에 오직 하나의 정관사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왕국"이라는 단어도 복수명사가 아니라 단수로 나온다. 그러므로 엡5:5의 말씀을 직역한다면,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이신 분의 왕국"이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요한계시록 22:1,3에 나오는 하나님의 보좌가 곧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인 것과 같은 이치다. 보좌는 하나로 단수인데 이것을 수식하고 있는 것은 둘로서, 그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이기 때문이다.
5. 빛의 자녀들이 맺어야 할 열매들은 대체 무엇인가?
이제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전에 그들이 어둠에 있을 때에 행하던 행실을 버릴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이제는 빛의 자녀들처럼 계속해서 걸어갈 것을 권면한다(엡5:8~14). 그렇다면 빛의 자녀들이 걸어가면서 맺어야 할 열매들은 무엇인가? 바울은 빛의 열매를 3가지로 소개하고 있다(엡5:9). 그렇다면, 여기서 "빛"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하나님 내지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빛이시며(요일1:5), 그리스도도 참 빛이자(요1:9)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8:12). 그러므로 이 빛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결국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빛의 열매는 "선과 의와 진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빛과 반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어둠이다. 그리고 어둠의 열매들이 뒤따라 올 것이다. 이때 "어둠"을 인격화시키면 그것은 어둠의 세상주관자인 마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어둠의 열매들은 "악과 불의와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탄은 악한 자(요일3:12,5:18)와 불의한 자이며(욥34:7), 거짓의 아비(요8:44)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빨리 마귀로부터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빛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엡5:10~11). 왜나하면 그리스도께서 이제 잠자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시고 있기 때문이다(엡5:14)
6. 어리석은 자의 삶에서 지혜로운 자의 삶이 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성도가 어둠의 일에 동참하지 않고 빛 안에서 걸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행해야 할지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보고 지혜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지혜있는 자같이 해야 한다고 권면하였다(엡5:15).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지혜있는 자가같이 살 수 있는가? 그것을 바울은 다음의 4가지로 언급한다.
첫째, 세월을 아끼라고 권면한다(엡5:16). 왜냐하면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을 아끼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을 헬라어로 보면, "카이로스를 구속하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카이로스"란 시간은 시간이지만 "크로노스"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카이로스'의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의미가 주어지는 시간을 가리킨다. 골로 흘러가는 시간이 진짜 의미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로 바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시간 속으로 침투해 들어와야 한다. 그러면 그 순간에는 이 세상에 속한 물리적인 법칙이 중지되며, 하늘에 속한 법칙이 그 시간과 장소에 도래하게 된다. 그러면 이 땅에 속한 물리적인 시간 안으로 하나님의 법칙이 실행되면서,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에서 영적인 시간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면 이때에는 물리적인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통용되는 시간으로 바뀐다. 그러면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육체에 속한 자이기는 하나, 우리의 영을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가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현되기 하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끼라"는 말의 헬라어는 "구속하다. 구원하다. 값주고 되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사들여 하나님의 시간이 되게 하기 위해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나님과 접촉하는 시간을 일부러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곧 기도하고 말씀듣는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서 살 수 있고 하나님의 법칙이 통용되는 놀라운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사도바울을 둘째, 주의 뜻의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엡5:17).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뜻 곧 혼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방탕(무질서)이 들어있는 육신을 따라서 술취하지 말고, 오히려 영 안에서 충만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한다(엡5:18). 그러면 사람은 영 안에서 무엇으로 충만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사람이 되시어 인생을 거치고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로 충만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후에 생명주는 영이 되셨으니(고전15:45), 우리가 영 안에서 충만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나 성령은 우리가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분이시다. 다만 그분의 움직임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이 내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분이 행하는 모든 것들을 확인해 보면 그러한 일들은 다 "살리는 일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후에 생명주는 영이 되셨기 때문이요, 성령도 생명의 성령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5:45, 롬8:1~2). 그러므로 성령과 내 영이 하나 된 연합된 영 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생명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로 충만케 되는 일이며,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을 사람을 살리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람 살리는 일에 지금도 집중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사도바울은 사람이 지혜있는 자같이 되려면 말을 더럽고 추한 말을 일절 말하지 말고, 오히려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노래하며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권면한다(엡5:19~21). 지혜있는 자는 말을 잘 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자는 서로 복종하는 가운데, 찬양하는 말, 감사하는 일, 살리는 말, 격려하는 말을 해야 한다.
7. 나오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났다면 그는 어떤 상태가 되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영적으로 어린아기의 상태로 태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가 이제 갖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마치 신앙의 모든 노정을 다 마친 것처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러 있다. 그는 지금 도움을 받아 성장해야 할 사람인데 불구하고, 자기는 마치 이미 다 성장한 어른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미성숙한 자가 교회의 직분을 맡게 되면 교회는 상당히 시끄러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늘 불평불만하고 성질을 부리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워야 할 지도자는 참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자여야 한다. 그런 자들의 삶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들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 자신은 과연 영적인 훈련을 기꺼이 받는 자가 되어 성숙한 자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훈련도 받지 않은 채,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듣지 않는 자인가? 그러면서도 자신은 성숙한 자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만약 자신이 성숙한 자라고 한다면, 그는 첫째, 자신을 희생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 온갖 더러운 행위를 그쳤거나 그치고 있을 것이다. 셋째, 어둠에 속한 일을 벗어버리고 선과 의와 진리만을 붙잡고 가고 있을 것이다. 넷째,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자신을 충만케 하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2021년 02월 03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