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자기 안에 있는 두 사람 사이에 항상 서 있다. 하나는 옛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새 사람이다. 옛사람이란 사탄의 본성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고, 새 사람이란 성령의 본성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혹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사람의 사고방식을 따라 살고 있다면 한 번쯤 그는 심각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몸의 구속의 날에 성령께서 그런 사람에게서 떠나가신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엡4:30). 그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여기에 그 해법이 있다.
1. 들어가며
새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된 자들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것과,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교회에게 주신 직분자들 곧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인 교회를 통하여 성도들이 성장하고 온전케 될 것을 권면한 후에, 그렇게 되기 위한 방법으로서 옛사람의 생활방식과 아울러 새 사람의 생활방식을 소개하였다(엡4:1~24). 그리고 이제는 새 사람으로서의 성도가 이웃에 대해 적극적으로 베풀어야할 덕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이웃관계와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실천덕목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2. 옛사람의 생활방식에서 새 사람의 생활방식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신 자들이 살아야 할 새로운 생활방식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엡4:22~2).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벗을 벗을 벗어버리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입어야 할 것을 입지 않고 사는 이들도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면서 동시에 새 사람을 입는 두 가지 방식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는 새 사람으로의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인가? 먼저 사도바울을 옛사람에 대해서 정의를 하는데, 그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자"라고 하였다(엡4:22). 이것을 헬라어에서 직역해보면, 옛 사람이란 "속임을 욕망들을 따라서 파멸당하고 있는 이전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사실 아담의 타락이후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살고 있는 인류전체를 가리킨다. 즉 옛 사람은 창조된 아담 안에서 타락한 자들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 불구하고 옛 사람이 살던 방식으로 계속해서 산다면 그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나아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새 사람된 또 다른 사람이 하나 더 있다. 여기서 "새 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한 사람을 가리킨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24에서 새 사람에 대해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창조하심을 받은 자"라고 정의하였다. 성령을 통하여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모셔들인 자가, 그분이 자기 안에 거처를 정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고, 생각의 영을 새롭게 함으로 자신의 생각을 영에 두게 될 때, 그 사람은 새 사람으로 충만케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는 새 사람의 본성을 늘 입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때 그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바울은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실천덕목을 여러 개 소개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는 것이다(엡4:25절). 여기서 "거짓"은 마귀의 대표적인 속성이며, "진리"는 예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사실 옛사람의 속성의 하나가 거짓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을 거짓말을 해서는 아니 된다. 반대로 새 사람의 속성 하나가 진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참 된 것말을 말해야 한다. 둘째,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고 있어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이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엡4:26~27). 참고로, 모든 분이 다 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헬라어원문에 따르면, "분을 낼 수도 있으나나 죄를 짓지 말고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의분을 낼 수도 있기 때문다. 대표적인 경우가 비느하스의 의분이다(민25:11). 출애굽2세대들이 싯딤에서 모압의 신을 섬기고 모압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르게 되었을 때, 대제사장 아론의 손자였던 비느하스가 일어나 창으로 당시 음행하는 자의 배를 찔러 죽였는데,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에게 말하기를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평가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에 만약 비스하스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의분을 내지 않았더라면 전염병으로 2만4천명만 죽었을 것이라 이스라엘이 전멸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분이라고 하루를 넘겨셔는 마귀가 틈을 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이다. 셋째,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함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엡4:28). 악하고 게으른 것은 죄가 되기 때문이다. 넷째, 모든 더러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해야 한다(엡4:29)고 했다. 새 사람된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언어습관이다. 어떤 언어를 말해내느냐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 되느냐 추한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섯째,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엡4:30).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를 인치시고 보증하는 기간은 구속의 날까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한 번 믿는 자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정확히 "그 시대까지" 곧 그 사람이 죽는 그 순간까지는 결코 떠나지 않지만, 만약 계속 죄를 짓고 돌이키지 아니한다면, 그가 죽어서 몸의 구속을 받아야 할 그 순간에 그를 떠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사람에게 있어서 구속은 3가지다. 영의 구속, 혼의 구속, 몸의 구속이 있다(롬8:23). 이중에 몸의 구속(속량)은 사람이 죽을 때에 일어나는 몸의 부활체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의 구속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할 때 곧바로 일어난다. 예수께서 우리의 영의 구속을 위하여 대신 죄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평생 동안 우리는 혼의 구속을 받다가, 죽을 때에 몸의 구속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께서 우리를 보증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죽는 날, 몸의 구속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성령을 존중해드리고 그분이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성령님도 예수님처럼 매우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무안을 당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무시를 당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내 몸을 성전 삼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을 존중해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날 성령께서 떠나시고 말 것이다. 그리고 여섯째, 모든 성도는 악독과 분냄과 진노와 소리지름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나쁨과 함께 버리고 오직 서로 친절하게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엡4:31~32)고 하였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먼저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는가?
사도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는데, 그러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3가지 방법을 준행하라고 제시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걸어가라고 하였다(엡5:2). 둘째, 어둠에 속한 일들을 제거하라고 하였다(엡5:3~7). 그것은 음행과 불결함과 탐욕이며, 더러움과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는 장차 도래할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이신 이의 왕국에서 기업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셋째, 빛의 자녀로서의 빛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다(엡5:8~14). 이때 성도들이 맺어야 할 빛의 열매는 선과 의와 진리다. 이 부분에 관하여는 시간관계상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5. 나오며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의외로 쉬울 수가 있다(물론 이것은 신비에 속한 영역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자신의 과거의 죄를 회개하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때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시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나 그 다음이 관건이다. 과연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거처를 정하시고, 그분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때에 과연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계시는 예수님을 근심하게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국 성도가 죽는 날에, 성령께서 그 사람을 떠나는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분명 그리스도를 모셔들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자기가 여전히 주인되어 있는 자가 아주 많다. 타락한 죄된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가 대대수다. 혼의 인도함을 마치 영의 인도함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아주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사람의 행위를 날마다 벗어버려야 한다. 타락한 본성이 나를 주관하는 삶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성령께서 주인되어 이끄시는 새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의 본성이 지배하는 새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소극적인 것들은 날마다 우리에게서 제거하면서 적극적인 것들은 받아들여야 한다. 사탄의 속성은 버리고 예수님의 속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거짓은 버리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어둠을 버리고 빛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죽는 날 몸의 구속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1년 01월 27일(수)
정병진목사